준규쌤을 만나다 - 박준규를 읽다 1
본격적으로 교보문고에서 자리를 옮겨 이야기 한마당이 펼쳐졌다. 대화는 두서없이 진행되었지만, 동섭쌤과 초등학교 교사 3명이 던져준 숙제로 혼란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던 나에게 어떤 실마리를 제공해줬다.
내가 단재학교로 들어오기 이전에 ‘리빙 라이브러리Living Library’라는 프로그램을 2회에 걸쳐 진행했다고 한다.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본 적이 없으니 알 수는 없지만, 몇 명을 섭외하여 도서관에 온 사람은 책을 빌리는 대신, 섭외된 사람을 빌린다. 그리고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얼핏 보면 ‘그건 그냥 수다 떠는 거 아냐?’라고 의아할 법 하지만, 일반적인 대화가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 그 사람의 가치관을 듣는 것이기에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단재학교 초임교사로 어리버리하게 헤매고 있을 때 준규쌤은 카페로 나를 데리고 가더니, 단도직입적으로 “공부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라고 물었다. 평소의 꿈이 ‘일 하면서 공부도 하는 것’이었기에, “당연하죠!”라고 목소리 높였다. 그러자 준규쌤은 “대학원에 가거나 그런 공부를 말하는 건가요?”라고 물었고, 나는 학위나 학문에 갇힌 공부가 아니라 연암이 열하에 가서 보고 느낀 것을 정리하여 『열하일기』를 만들었듯, 다산이 강진에 유배당해 500권의 책을 펴냈듯 유유한 시대의 흐름을 낚아 채 그걸 체계화하는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듣고 뭔가 다른 얘기를 해주실 줄 알았는데, 대뜸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라는 책을 건네 주셨다. 아마도 ‘그 책을 읽으면 당신이 하고자 하는 공부의 방향이 잡힐 것이다’는 말을 하고 싶으셨던 거 같다.
그 책은 ‘리빙 라이브러리’를 직접 경험한 사람이 그 때 만나 나눈 내용을 정리한 책이었다. 그 책을 읽다 보니, 사람이야말로 ‘소우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래 인용한 시도 ‘리빙 라이브러리’의 생각과 공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낼 수 있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정현종, 「방문객」
준규쌤이 던져 준 책과 내용들은 박노해 시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고 말한 것의 다른 버전 같았다. 사람을 읽으려면 그 사람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일 맘이 있어야 하며, 그건 곧 사람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준규쌤은 여러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그걸 자기화하는 공부를 해나가라는 조언을 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부터 나의 공부는 시작되었고, 그렇게 단재학교에서 4년이란 시간을 보내며 사람 책을 읽는 공부를 꾸준히 해오게 되었다. 오늘 준규쌤을 만나는 이유도 어찌 보면 박준규라는 책을 읽고 싶어서 이다. 과연 나는 박준규라는 책을 읽으며 어떤 독후감을 쓸 수 있을까?
최근에 준규쌤은 페이스북에 ‘눈물 시리즈(다큐멘터리 눈물시리즈를 말하는 게 아님돠)’를 연재했다. 긴 내용이긴 해도 현실을 그대로 담은 경험담이기에 무협소설을 읽듯 긴박감 넘치게 한 번에 읽을 수 있었다.
남자가 흘리는 눈물은 어찌 보면 보수적인 한국사회가 억압해 놓은 금기를 넘어서는 일이기도 하다.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운다’는 식의 금기를 만들어 한없이 강해지도록 인내하고 참아내도록 요구하는데, 준규쌤은 그런 금기를 깨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 때문이든, 사회적인 부조리 때문이든, 부모들의 강압에 힘들어하는 아이들 때문이든 맘껏 울어재낄 수 있다면, 그건 건강하고 밝은 것이다.
연암의 글을 읽으면 준규쌤이 흘린 눈물의 의미가 더욱 입체적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단지 칠정(희노애락애오욕) 가운데서 오직 슬퍼야 울음이 나오는 줄 알 뿐 칠정이 모두 울게 할 수 있는 줄은 모르지.
기쁨이 지극하면 울 수가 있고, 분노가 사무쳐도 울 수가 있으며, 즐거움이 넘쳐도 울 수가 있고, 사랑함이 지극해도 울 수가 있으며, 미워함이 지극해도 울 수가 있고, 욕심이 지극해도 울 수가 있어. 가슴 속에 답답한 것을 풀어버림은 소리보다 더 빠른 것이 없거니와, 울음은 천지에 있어서 우레와 천둥과 같다고 할 수 있지. 지극한 정이 드러나, 드러나면 능히 이치에 맞게 되니, 웃음과 무엇이 다르리오?
人但知七情之中, 惟哀發哭, 不知七情都可以哭. 喜極則可以哭矣, 怒極則可以哭矣, 樂極則可以哭矣, 愛極則可以哭矣, 惡極則可以哭矣, 欲極則可以哭矣. 宣暢壹鬱, 莫疾於聲, 哭在天地, 可比雷霆. 至情所發, 發能中理, 與笑何異?
-朴趾源, 『熱河日記』, 「好哭場論」
연암은 삼종형이 청 황제 고희연에 사절단으로 가게 되자, 따라간다. 그 때 드넓은 요동벌판을 보았고, “울어 재낄 만하다”고 한 마디를 외친다. 보통 엄청난 광경이나 자연의 위대함을 보면, 환호성을 지르거나 감탄하여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는 표현을 쓰지 ‘한 바탕 울어볼만 하다’는 표현을 쓰진 않는다. 그러니 그 옆에 따라가던 사람이 “어째서 울만 하다고 표현하나?”라고 묻자, 연암이 울음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연암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우는 건, 꽉 막힌 세상에서 천지사방이 환히 트인 세상으로 나왔기 때문에 기뻐서 우는 것이라 이야기 하며, 그처럼 나도 산으로 꽉 막힌 조선 땅에서만 살다가 요동의 드넓은 벌판을 보니 기뻐서 그러노라 대답했다. 그러면서 사람은 슬퍼서도 울 수 있지만, 기뻐도, 분노해도, 즐거워도, 사랑해도, 미워해도, 욕심이 나도 모두 울 수 있다고 울음의 의미를 확장한다. 연암에게 울음이란 격해진 감정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을 뿐이다.
연암은 희喜의 감정이 폭발하여 울었다고 한다면, 준규쌤은 노怒의 감정이 복받쳐 올랐기에 울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슬퍼서 흘린 눈물이 아닌, 다른 칠정에 의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감수성이 살아 있다는 얘기고, 그만큼 현실을 가슴 깊이 끌어안아 그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런 부분들이 느껴지니 준규쌤의 눈물에 공감할 수 있었고, ‘눈물 시리즈’가 더욱 맛깔스런 글로 읽혔다.
그래서 준규쌤에게 “이번에 쓴 글은 저번에 썼던 ‘야매이야기’에 버금가는 흡입력이 엄청난 글이던데요. 그리고 1부와 2부로 나누어 쓴 것은 오히려 신의 한 수였어요”라고 말했다. 준규쌤은 한달음에 완성하고 싶었지만, 그 때 하필 약속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두 편으로 나눌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물론 쓰는 사람 입장에선 글이 써질 때 마무리 짓는 게 좋다. 글이란 게 내 맘대로 써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무언가 내 안에 웅성거림이 있을 때 쓰면 1시간 만에도 몇 페이지를 쓸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땐 한 줄도 쓰기 어렵다. 이런 상황이니 글이 잘 써질 때 마무리 짓고 싶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글을 쓴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흔히 글 쓰는 이의 능력이 출중하여 글을 쓴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우린 작가들을 대단한 사람인양 바라보며 인정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글이란 어찌 보면 나를 스쳐지나가는 흐름인지도 모른다. 그 흐름이 나를 타고 들어와 ‘도저히 쓰지 않으면 안 돼~’라고 요동칠 때, 미친 듯이 써내려가게 된다. 그 땐 ‘좋아요’를 만 개를 눌러도 부족하지 않은 글이 나온다. 하지만 의무적으로, 또는 어떤 부담에 의해서 억지로 쓰게 되면 진도도 잘 나가지 않을 뿐더러, 글의 질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전 시인들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시를 쓰게 만드는 요소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여, ‘시마詩魔(시를 쓰게 만드는 악마)’라는 용어를 만들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글을 쓰게 만드는 것은 ‘서마書魔’라고나 할까.
이 때 준규쌤은 정말 미친 듯이 쓰고 싶었나 보다. 과음을 하고 집에 들어와 잠을 잤지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바로 2부를 쓰기 시작했다고 하니 말이다. 명문은 ‘쓰고 싶다’는 그 마음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쓰는 사람의 입장 말고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가장 긴박감이 넘치는 순간에 한 번 정도 끊어주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준규쌤에게 “1부와 2부를 나눈 건 신의 한 수”라고 표현한 것이다.
드라마를 볼 때 가장 짜증나는 건, 뭔가 중요한 순간에, 갈등이 고조될 만한 순간에 끝나며 다음 편을 기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글을 드라마처럼 기계적으로 끊어서 기대감을 증폭시킬 필요는 없지만, 이번 눈물시리즈처럼 두 번의 눈물을 기록할 때는 한 편 한 편 따로 올리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첫 번째 눈물을 읽고 그 눈물의 의미를 곱씹을 수 있으며, 그에 따라 다음 편엔 어떤 눈물에 관한 얘기일지 상상하며 기대하게 되니 말이다. 물론 페이스북의 성격 상, 1편을 봤다고 꼭 2편을 보란 보장은 없지만 나중에라도 1편을 본 사람은 2편을 찾아볼 것이고, 2편만 본 사람은 1편을 찾아볼 것이다.
준규쌤의 글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너무 과하게 띄워준다고 생각하셨던지 나의 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주신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하도록 하겠다. 이게 바로 끊음의 미학!!(어디서 돌 날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애초에 이 독후감은 두 편을 쓰려 했는데, 또 세 편으로 늘어나고 말았다^^;;
목차
알아, 교보문고의 탁자?
숨겨진 이야기는 사물을 달리 보이게 만든다
나무가 던진 메시지, ‘너 혼자 잘났니?’
2. 박준규를 읽다 ① - ‘눈물 시리즈’는 준규식 「好哭場」
책! 책! 책! 사람 책을 읽읍시다!
‘눈물시리즈’ 1 - 울어재낄 수 있는, 그 마음
‘눈물시리즈’ 2 - 서마가 강림하사, 눈물 시리즈를 쓰게 하셨네~ 할렐루야!
‘눈물시리즈’ 3 - 1부의 흡입력, 2부의 가슴뭉클함
내 글에 대한 평가를 듣다
조회수, 좋아요가 뭐길래
완벽한 글이 아닌, 나의 글을 쓸 수 있나?
활발발한 아이들 1 - 한 학생을 오롯이 지켜볼 수 있다는 장점
활발발한 아이들 2 - 쇼를 하는 아이들
활발발한 아이들 3 - 행동을 바꿀 만한 빌미를 주는 교사여야 한다
『박준규』란 책을 덮으며, 수고했어 오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