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건빵 Feb 10. 2017

한치 앞도 모르면서

2009년 국토종단 29 -  5월 1일(금)

이미 시간은 저녁 8시가 넘었다. 도보여행 중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잠 잘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게 될 거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랴 지도를 잘못 보고 판단한 탓에 이렇게 궁지에 몰린 것을 말이다.                


▲ 어둠이 짙게 깔렸지만 아직도 잠 잘 곳을 구하지 못했다. 과연 어찌 되려나?




한치 앞도 알 수 없다  

   

첫 교회에서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지만, 그럼에도 아직 희망은 있었다. 이 작은 마을에 교회가 두 군데나 있었기 때문이고, 가는 길엔 경찰서가 있는 것까지 확인했기 때문이다. 궁지에 몰리면 누구든 생각지도 못한 용기가 생긴다. 이미 어둠에 짙게 내린 거리를 걸어 교회로 향한다. 

언덕을 올라가니 바로 교회가 보이더라. 교회가 특이하게도 옆으로 쭉 늘어선 건물이었다. 사택이 어딘지를 찾아 한참 헤매다 드디어 사택을 발견하고 초인종을 조심히 눌렀다.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다. 이쯤 되면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나가셨는가 보지. 

이젠 마지막 수단만이 남았다. 어찌 보면 최후의 보루이자, 배수진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서까지 거부할 경우 난 완전히 절벽에 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말이다. 그곳은 바로 ‘민중의 지팡이’이자, 지금 나에겐 희망의 등불인 경찰서인 것이다. 처음으로 경찰서에 들어가 본다. 경찰서엔 보통 안 좋은 일이 있어야만 간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쉽게 들어갈 만한 곳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선 나에게도 이런 일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 이제 남은 곳은 경찰서 밖에 없다. 걱정 한 가득 안고 들어가 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경찰관들이 나를 뻔히 쳐다본다. 아마도 이곳은 작은 시골마을이다 보니 오는 사람들이 뻔할 텐데, 전혀 낯선 사람이 그것도 늦은 시간에 찾아왔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천천히 나의 사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경찰관은 그런 사정을 딱하게 생각하시며, 손수 여기저기 전화를 하기 시작하신다. 그건 공적 업무로 내 이야기를 처리하는 방식이 아닌, 지극히 한 개인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에서 도와주려는 방식이었다. 몇 번의 통화를 한 끝에 한 이장님과 통화를 하셨고 마을회관에서 자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주셨다. 그쯤 되니 금방 전까지 궁지에 몰렸던 나의 불안감은 씻은 듯 사라지고, 저 멀리 광명이 비춰오듯 희망이 어려오더라. 그러니 온 몸의 긴장이 풀어지면서 얼굴 가득 미소가 지어지더라. 그건 바로 “다 이루었다”고 말하며 십자가에서 죽어간 예수의 말과 같이 고통의 순간이 사라지고, 기쁨의 순간이 찾아올 때 느껴지는 감흥이었다. 

1분 1초 뒤도 알 수 없는 게 사람이다.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사람들은 불안해하여 어떻게든 계획대로 살아가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예측 가능한 미래를 만들기 위해 현재를 무한정 희생물로 바치게 됐던 것이다. 현재가 없는 미래, 미래의 기획 속에 사라진 현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린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것이지, 미래에 사는 것은 아니다. 1분 1초 뒤도 알 수 없는 게 사람이라면 그걸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미래를 예측하려 애쓸 필욘 없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면 오히려 그렇게 미지수인 삶에 대해 긍정하는 건 어떨까? 모르기에 살아볼만하고, 늘 변화무쌍하기에 기대해볼만하다고 말이다.                



▲ 미래에 저당 잡힌 현재. 두려움, 그걸 제대로 봤다.




거리의 인연 8 - 도보여행의 취지에 가장 적합한 날 

    

잘 수 있는 곳을 알아봐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그곳이 여기서 한참 떨어져 있다며 데려다 주시겠다고 하신다. 정말 말로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 행복한 시간이다. 이로써 함열에서 후배의 차를 탄 이후로 두 번째로 차를 타게 됐다. 

왔던 길을 따라 다시 간다. 걸을 때는 한참이더니 역시 차를 타고 가니 곧바로 초평저수지가 나오더라. 저수지 쪽으로 가니 사람들이 꽤 있었다. 연휴를 맞아 수많은 사람들이 낚시를 하러 온 것이다. 빼곡히 들어선 차들 사이로 경찰차가 경광등을 켠 채 진입하니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하는 심정으로 쳐다본다. 누가 보면 이곳에서 범죄가 발생해서 그걸 해결하러 온 줄 알겠다.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이장님이 나오셨고 인사를 했다. 나이가 많으실 줄 알았는데 젊으시던 걸. 가볍게 인사를 하고 마을회관으로 왔고 짐을 풀었다. 

밥을 먹었냐고 물으셔서 먹지 않았다고 말하니, 따라 오란다. 마을회관 옆에 있는 이장님 댁으로 들어갔다. 낯선 사람이 갑자기 들어온 것이니 이런 경우 경계하는 눈초리로 ‘이게 무슨 상황이냐?’며 쳐다볼 텐데, 여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친한 사람이 왔다는 듯이 편안하게 대해줬으며 바로 저녁을 차려주셨기 때문이다. 거기서 밥을 먹으며 이장님의 장모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일 고추를 심는 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가족들이 모여서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장님 가족 속에 끼어 전혀 어색해할 필요도 없이 섞여 들어갔다. 

이것이야말로 늘 바라던 도보여행의 모습이다. 걸으며 민가에 들어가 사람들과 섞여 지역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사람 사는 이야기도 듣는 것이다. 거기다가 막상 여행을 하다 보니, 한 가지 더 추가되었다. 저번 양화감리교회에서의 일 때문에, 여행이 늦어지더라도 다른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땐 결혼식에 함께 가자고 사모님의 말을 거절했고, 두고두고 후회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주어진다면 그걸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장님 댁에서 한참이나 재밌게 놀다가 10시가 좀 넘어서야 마을회관으로 돌아왔다. 아~ 이 행복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어떤 날보다 오늘은 힘들었지만 그래서 더욱 행복한 순간이었다.      


(과자 2.000원, 감자탕 5.000원, 찐빵 2.000원 / 총합 9.000원)



▲ 아까는 그냥 지나갔던 곳이지만, 저녁에 다시 찾아가니 전혀 다른 곳이 되어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라진 초평저수지를 찾아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