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섭의 ‘아마추어 사회학’ 8 - 알기 어려운 서설 ⑦
이전 후기에서 사람들이 ‘사회의 언어’를 쓰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면서도 오해가 생기고 그걸 다시 해석하려다 보니 많은 왜곡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여, 학자들은 ‘사회의 언어’를 말과 뜻이 일대일로 완벽하게 대응되어 오해의 소지가 없는 ‘과학의 언어’로 바꾸려 한다는 말을 했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불확실한 것, 미지의 것, 미묘한 것, 어중간한 것을 싫어하고 확실한 것, 알고 있는 것, 분명한 것, 논지가 세워진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삶이란 게 불확실하고 미묘하며 어중하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다. 매번 점심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뭘 먹을까?’라는 고민을 한다. 이때 의견을 물어보면 꼭 한 명쯤은 “아무 거나~”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때 주의 사람들은 우레같이 화를 내며 “제발 그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려 하지 말고, 니 생각을 말해”라고 말한다. 또한 예전에 어머니 생신 때 “어머니 뭐가 필요하세요?”라고 물으니, “뭐~ 필요한 거 없다. 그저 니가 건강하게 잘 살기만 하면 된다.”라고 답했다. 그때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 ‘어머니는 선물 같은 거 필요 없나봐’라고 생각하여 정말 아무 선물도 안 준다면, 그 후로 몇 날 며칠 싸한 눈칫밥을 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이처럼 우린 일상생활에서 생각이 잘 드러나지 않는 말을 쓰거나, ‘거시기’와 같이 문맥으로만 상황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 말을 쓰거나, 좋으면서도 싫다고 하는 청개구리 어법을 구사하기도 한다. 그러니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되기도 하여 수많은 오해가 생겨나는 것이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처럼, 수학처럼 하나의 분명한 답이 있는 것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왜 저리도 흐리멍덩한 표현을 써서 오해를 일으키지?’라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하며, ‘왜 사람이 일관성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지?’라고 비난한다. 그러니 그들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언어’를 버리고 ‘과학의 언어’만을 써서 완벽하게 의사소통이 되는 세상을 완벽한 세상이라 여기며, 그런 세상을 만들려 하는 것이다.
몇 달 전에 진규와 이야기를 할 때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었다. 진규는 “과학이 좀 더 발전하여 속마음을 완벽하게 알 수 있는 기계가 발명되면, 더 이상 서로 오해를 하거나 상처주거나 하진 않겠지”라는 말을 했었고, 나는 “기계가 아무리 발전된다 해도 내 속마음을 100% 완벽하게 알려주진 못할 거야. 그건 내 마음이란 게 하나의 고정된 상이 있는 게 아니라 들쭉날쭉 하니 말야”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있다. 진규는 ‘과학의 언어’만을 쓰는 세상을 바라고 있었고, 난 그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었다.
‘과학의 언어’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얘기는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1898~1956)가 인용한 내용을 통해서 좀 더 쉽게 알 수 있다.
조종사는 비둘기들이 나는 것을 보다가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다. 비둘기들이 잘못 날고 있는 것이었다.
공기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모든 비행 물체는 몸을 날아가는 방향으로 수평화, 유선형화해야 한다는 것이 비행의 제일 원칙이다.
그런데도 비둘기들은 몸체를 한껏 세우고 날개깃을 전진 방향으로 잔뜩 치켜세웠다가 뒤로 젖히며 날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공기의 저항을 흘려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고자 하는 동작과도 같았다. 말하자면 비둘기들은 지금 비행의 제일원칙을 무시하며 날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비행하는 순간 비둘기들이 불쌍해졌다. 이 원칙을 알지 못해 비둘기들은 그 조상들부터 얼마나 부질없는 수고를 해왔으며 하고 있는가.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이 사실을 비둘기들에게 알려주고 학습시킬 방도는 없는가. 어떻게 저 어리석은 비행의 방식에서 저들을 해방시킬 것인가.
비행기가 날게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론을 다듬었고 위험천만한 실험을 해야만 했다. 하늘 높이 뜬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땅으로 곤두박질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목숨을 내놓지 않으면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실험의 데이터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맘껏 누빌 수 있는 ‘인류의 꿈’이 실현되었다.
그러니 비행기 하나를 띄우기 위해 그때까지 쌓인 데이터는 어마어마했다. 그건 과학적인 이론임과 동시에 이미 현실에서 증명해보인 진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조종사는 “공기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모든 비행 물체는 몸을 날아가는 방향으로 수평화, 유선형화해야 한다는 것이 비행의 제일 원칙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말은 비행의 원리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다 인정하고 있는 내용이기에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조종사가 그런 원리를 맹신한 나머지 이미 잘 날고 있는 새들에게도 적용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그가 하늘에서 본 비둘기는 지금껏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해왔고,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해왔던 비행의 원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공기의 저항을 받으며 힘겹게 날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부질없는 수고를 해왔’다고 안타까워하며, ‘비둘기들에게 알려주고 학습시’켜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여기까지 듣고 보면 조종사의 생각이 ‘묵자墨子(BC 480~390)의 ‘겸애설兼愛說’을 뺨칠 정도로 동물까지도 두루두루 사랑하고 있구나‘라고 느껴질 법도 하다.
하지만 과학이란 잣대, 효율이란 잣대, 분명함이란 잣대는 그걸 사용하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 막상 그 잣대에 들어가야만 하는 존재에겐 폭력일 수밖에 없다. 우린 이미 4대강 공사로 그 폭력성을 두 눈으로 목격하지 않았던가. 4대강 공사는 보를 설치하여 저수량을 늘림으로 하천생태계를 복원한다는 게 그 목적이었다. 어찌 보면 조종사가 여태껏 잘 날라 다니고 있던 비둘기를 보며 ‘학습’, ‘해방’이란 원대한 포부를 품었던 것처럼, 전문가들도 강을 보면서 ‘살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막상 22조를 쏟아 부으며 마무리 지은 공사의 결과는 어땠는가? 매년 여름마다 무상으로 맘껏 제공되는 녹조라떼에 얼굴을 찌푸려야 했고, 그에 따라 사대강이 점차 썩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처럼 조종사도 비둘기를 데려다가 자신이 아는 비행의 상식에 맞게 고쳐주려 노력했다면, 아예 비둘기가 원래 타고난 본능마저 잃어버리고 날지 못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이런 예는 『맹자』라는 책에도 나온다. 인간의 마음으로 자연을 대할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그리고 그게 얼마나 근시안적인 생각인지를 알려준다.
송나라 사람 중에 밭에 싹이 잘 자라지 않는 것을 근심하여, (싹이 잘 자라도록) 싹을 뽑아낸 사람이 있었다. (그는) 피곤에 절은 채로 돌아와 “오늘 매우 힘들었어. 내가 싹이 잘 자라도록 도와주고 왔거든”이라 말했다. 그러자 그 아들이 달려가 밭에 가서 싹을 보니, 싹은 모두 말라 있었다.
宋人有閔其苗之不長而揠之者, 芒芒然歸. 謂其人曰: 今日病矣, 予助苗長矣. 其子趨而往視之, 苗則槁矣. 「公孫丑章句上」 2
위 원문에서 ‘알묘조장揠苗助長’이란 사자성어가 나왔고, 우리가 자주 쓰는 ‘조장(안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끈다)’이란 단어가 나왔다. 싹은 때가 되면 땅을 뚫고 나오며 시간이 지나야만 자랄 수 있다. 그런데 너무 천천히 자란다고 안타까워한 나머지 인간의 마음으로 돕게 되면 오히려 싹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파괴하고 마는 것이다.
언젠가 선배에게 파가 자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파가 조금 컸는데도 여전히 누워 있었기에, “저걸 세워줘야 하지 않아요?”라고 물으니, 선배는 “시간이 서서히 지나면서 햇볕을 받다보면 어느 순간 저절로 몸을 일으키거든. 그러니 세워주지 않아도 돼”라고 말을 해줬다. 그래서 나중에 선배가 보내준 사진을 보니 정말로 파가 서서히 몸을 세우고 있는 모습이었고, 꽤나 감동적이었다.
이미 우리는 과학적인 잣대를 대기 전부터, 효율이란 잣대를 대기 전부터, 성장이란 잣대를 대기 전부터, 과학의 언어라는 잣대를 대기 전부터 잘 살아오고 있었다. 그래서 비둘기는 바람을 가르며 아주 편안하게 날아다녔고, 사대강은 굽이치며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아주 넉넉히 흘러갔으며, 싹은 느릴지라도 천천히 커갔고, 사람들은 오해가 있는 말일지라도 자연스럽게 나누며 오해도 하고 그 오해를 풀기도 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당연히 여기엔 과학이나 이론, 진리라는 게 들어설 여지가 없이 일상 속에서, 삶 속에서 무르익으며 유지되어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분명함이란, 과학이란, 하나의 방법이란 폭력을 행사할 것이 아니라, 삶 그대로를 보고 느끼려 노력해야만 한다. 생활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아닌 생활을 묘사하려는 노력이며, 계몽하려는 노력이 아닌 패턴을 보려는 노력으로 말이다.
우리의 인간스러움과 그 일상은 전권을 쥔 정답(眞理)에서도, 산산이 부서지는 오답(無理) 속에서도 찾을 수 없다. 넓은 터와 긴 시간의 지평에서 넉넉히 드러나는 일리들과 그 운용의 묘에서 인간됨의 모습은 제자리를 찾아간다.
빙휴먼의 인간학은 복잡다단한 삶의 구성에 정직하려는 복잡성의 철학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복잡성을 드러내는 노고가 무책임한 애매성의 옹호로 비쳐져서는 곤란하다. 복잡성의 현실과 빙휴먼의 현실이 서로 만나는 방식은 늘 일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삶의 일상을 통해서 경험하는 현실은 이로정연理路整然한 코스모스kosmos도 아니고 앞뒤의 분별이 서지 않는 카오스khaos도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터와 역사의 구체성을 좇아 이치를 세우는 일리의 세계(패턴의 세계)인 것이다
-『컨텍스트로 패턴으로』, 김영민 저, 문학과 지성사, 1997년, 150쪽
김명민 선생의 말을 읽어보면 ‘우리가 왜 아마추어 사회학을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우린 ‘각자의 터와 역사의 구체성을 좇아 이치를 세우는’ 법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 아마추어 사회학의 길을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강의가 모두 끝났을 때 나에게 어떤 변화가 올지, 그리고 어떤 시각이 열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하품 수련의 역설에서 나온 말처럼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지만 그냥 끌리네’라는 심정으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이로써 ‘알기 어려운 서설’이란 전혀 알 수 없던 제목으로 포문을 활짝 연 첫 번째 강의의 후기는 끝났다. 중간에 헤매면서 흐름이 끊겨 좌충우돌했지만, 그 또한 ‘복잡다단한 삶’의 한 양상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나의 의식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 것이고, 이 후기 어딘 가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게 뭔지 역추적을 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물들고 물들이며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1강의 후기를 읽어준 분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곧 다음 후기에서 뵐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목차
트위스트 교육학을 들으며 트위스트 추길 바라다
트위스트를 추려다 트위스터에 휩쓸리다
트위스터에 휩쓸린 그대, 실망마라
훌훌 털어 버리고 야매가 되자
반란, 유쾌하고도 찬란한 이름이여
야매가 웃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다시 꼰대가 된다
유쾌한 야매가 되는 길로 함께 가자
빠르지 않게, 욕심내지 않게
아마추어 사회학을 들어야 하는 두 가지 이유
4개월 만에 다시 에듀니티로 향하는 발걸음
박동섭의 자기소개엔 특별한 게 있다?
‘발작적으로 제목이 떠올랐다’의 의미
소통이 중시되는 세상에, 오히려 소통이 안 되다
소통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일이다
우린 이미 소통을 하고 있다
‘1%의 소통’, 누구나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나를 캐어 들어가면 내가 있다?
나를 캐어 들어가면 내가 없다
커뮤니케이션은 ‘1%의 가능성’에 몸을 맡기는 것
‘사회의 언어’를 ‘과학의 언어’로 바꾸기
커뮤니케이션에서 ‘과학의 언어’가 불가능한 이유
‘내 생각’은 이야기가 시작되면 사라진다
언어는 행위다
내가 이러려고 글을 썼나?
내 생각을 말하기도 벅찼다
글이란 내 안의 들끓음을 묘사하는 것
부담스럽지 않게, 진솔하게 쓰면 된다
그래서 내가 글을 쓰려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사람들이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이유
분명한 세상을 만들겠다
분명함이란, 과학이란 이름의 폭력
있는 모습 그대로 묘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