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섭의 ‘아마추어 사회학’ 7 - 알기 어려운 서설 ⑥
I'm back, 드디어 돌아왔다. ‘아마추어 사회학’ 1강 후기를 마무리 지어야 함에도 한참이나 헤매다가 이제야 돌아왔다. ‘아마추어 사회학’ 1강은 10월 18일에 있었으니 거의 한 달 만에 다시 쓰게 되는 것이고, 마지막 후기는 10월 29일에 썼으니 20일 만에 그 흐름을 이어보려는 것이다.
갑자기 ‘아마추어 사회학’ 후기를 멈추게 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브런치북 프로젝트’에 떨어지게 되면서 그 여파로 도저히 글이 써지질 않았다. 아무래도 올핸 예년보다 더 많은 글을 썼고 그것으로 나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인지도가 있지는 않으니 쉽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결과가 나왔지만,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꼭 그 느낌은 예전 티비에서나 보던 대학 합격자 명단을 꼼꼼히 따라 내려가 보지만 어디에도 자기 이름이 없어 낙담에 빠진 어느 수험생의 기분이었달까. 수능 세대이기에 그 기분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몇 번이고 훑으며 자기 이름을 찾아보는 심정이 이해가 될 정도로, 나도 몇 번이고 훑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나니 갑자기 모든 게 허무해져서 아무 것도 하기 싫었고, 글도 더 이상 써지질 않았다.
둘째는 글을 올리고 난 후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할 때, ‘뭐 하러 이런 고생을 하지?’라는 생각이 든다는 거다. 글을 한 편 쓰려면 여행기는 반나절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하지만, 강의 후기는 하루 정도의 시간이 들어간다. 때에 따라서는 잘 써지지 않아 몇 날 며칠을 끙끙 앓기도 한다. 그렇게 힘들게 써서 공유를 할 때엔,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봐주겠지’하는 기대가 어리게 마련이다. 내가 좋아서 쓴 글이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반응이, 누군가의 호응이 나를 춤추게 하니 말이다. 그런데 몇 분이 지나도록 몇 시간이 흐르도록 별다른 반응조차 없으면, ‘내가 이러려고 글을 썼나?’하는 자괴감에 빠져들 수밖에 없고, 의욕은 다 타버린 재처럼 사그라지고 만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한참동안 ‘아마추어 사회학’ 후기는 쓸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편하게 쓸 수 있는 서울숲 트래킹 후기나 영화 제작기, 스마트폰 바꾼 이야기 등을 쓰며 잠시 숨고르기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다시 살펴봐야 할 것은 ‘왜 글을 쓰는가?’하는 점이다.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글(우물을 찾는 마음으로 쓴다, 살기 위해 쓴다, 현실을 살아낸 발자취를 담기 위해 쓴다)에서 밝힌 적이 있으니, 여기서는 ‘아마추어 사회학 후기를 왜 쓰려 하는가?’를 중점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저번 후기의 말미에서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언어는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란 생각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라고 쓰며 여태껏 당연히 받아들였던 ‘언어=의사소통’이 아님을 명확히 밝혔다. 어찌 보면 그 말엔 글을 쓰면서 잃어버렸던 본심이 이미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나 또한 ‘글=내가 의도한 바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한 것’으로 한정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최대한 나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영화의 대사나 고전의 내용을 인용하기도 하고, 일상의 예화를 가져오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 생각을 먼저 전하려다 보니, 상대방을 과소평가하게 되어 글이 지지부진하게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건 좋게 말해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밑바탕엔 ‘내 말만 일방적으로 들어’하는 심리가 깔려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내 글을 읽으며 내 이야기만 주구장창 들어야 하니,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더욱이 그런 식으로 글을 쓰면 다른 생각들이 들어설 공간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과 말이 부딪히며 조금씩 위치가 이동해가는, 그래서 제삼자가 등장하는 역동성은 깔끔히 제거된다. 이건 이를 테면 박제된 동물처럼 모양은 제대로 갖췄으되 생기는 잃어버린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언어≠의사소통’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정작 ‘글=소통’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니, 스스로 아이러니의 늪에 빠져 허우적댔던 거라 할 수 있다.
글이란 단순히 내 생각을 100% 전달하기 위해 쓰는 거라 할 순 없다. 책이든 글이든 반완성품이어서 글을 쓰는 사람만이 한 가지 해석만 하도록 강요할 수 없고, 그걸 읽는 사람들이 각자의 상황과 이해도에 맞춰 재해석하게 된다. 그러니 100% 전달하려는 자만심은 버리고, 강의 내용이 어떻게 내 안에 들어와 나의 언어로 탈바꿈하며 재해석되었는지 드러내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3월에 있었던 트위스트 교육학 강의에서 동섭쌤이 “책이란 기존의 독자들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독자를 창조해내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죠. 수요가 있기 때문에 가르쳐야 할 것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고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가르치는 행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은 곧 사람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해줬으면 하는 이야기를 찾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과연 내 안엔 어떤 웅성거림이 있는가?’라고 할 수 있다. 그 웅성거림은 결코 하나의 언어로, 하나의 행태로 드러나진 않지만, 그 들끓음 자체를 들여다보고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작년만 해도 강의를 듣고 후기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나는 ‘감히 내 깜냥에 어떻게 쓸 수 있겠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도리어 강의 내용을 담게 되면 오히려 원의를 왜곡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뭔가를 남기고 싶고 쓰고 싶긴 했어도 감히 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막상 쓰려고도 해봤지만 어디서 시작하고 어떻게 말을 풀어나가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뭔가 멋들어지게 쓰고 싶고 일목요연하게 짜임새를 갖추며 쓰고 싶지만, 실력이 따라주질 않다 보니,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마음을 고이 접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 보니, 결국 남는 건 하나도 없더라. 분명히 여러 강의를 들었고,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는 있지만, 기록해놓지 않으니 사르르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쯤 되니 ‘이럴 바에야 그냥 강의 녹취록이라도 만들어둘 것을’하는 후회가 밀려오더라. 그래서 작년부턴 용기를 내어 강의 후기를 남기게 되었고, 그게 올해까지도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제 강의 후기는 쓸 수 있게 되었으니,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100% 강의 내용을 그대로 전달해야지’라는 생각을 버려야만 한다. 강의 내용에 충실하되 그게 내 안에 들어와 어떤 울림으로 이어졌고 어떤 스침을 빚어냈는지 서술해나가기만 하면 된다.
맞다, 내가 글을 쓰려고 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현재의 나에 좀 더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분명 ‘브런치북 프로젝트’에 떨어진 건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그걸 계기로 글에 대해 다시 한 번 정리할 수 있게 되었으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 덕에 좀 더 가볍게 내 안의 울림을 담아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참여정부 때 등록금이 가장 많이 올랐어요”라고 말했고, 이에 문재인 후보가 “그럼 이명박 정부 때 왜 반값등록금 안 했습니까?”라고 묻자, 박 후보는 “제가 대통령 됐으면 했어요. 대통령 되면 할 거예요”라고 답했다. 그리고 한참 설전이 오간 후에 문 후보가 “과학기술이 이렇게 추락하는 동안 박 후보님은 뭐하셨습니까?”라고 묻자, 박 후보는 “그래서 대통령 되려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라고 답했다. 여당의 대표로 있었으면서도 정부의 잘못에 대해선 일말의 책임도 느끼지 않고 ‘그건 정부의 잘못이지 나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고, 자신이 모든 것을 하기 위해서 대통령이 되려 한다고 외쳤던 것이다. 매우 무책임한 발언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하는 발언이라 할 수 있다.
충분히 그 당시에도 여당 대표의 자격으로, 국회의원의 자격으로 할 수 있었으면서도 전혀 하지 않다가, 대통령이 된 후에야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매우 야비하니 말이다. 결국 그녀가 대통령이 된 지금도 그 때의 호언장담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모든 공약을 파기하기에 이르렀으니 ‘대국민 사기 발언’이라 해야 맞다.
이처럼 지금 당장하지 못하는 일을 나중에 한다고 말하는 건, ‘거짓부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나중이 아닌 지금 해야 하며, 뭔가가 된 후가 아닌 당장 해야 한다. 그래서 한비야씨는 『중국견문록』에서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가? 그렇다면 가지러 가자. 내일 말고 바로 오늘, 지금 떠나자. 한꺼번에 많이는 말고 한 번에 한 발짝씩만 가자. 남의 날개를 타고 날아가거나, 남의 등에 업혀 편히 가는 요행수는 바라지도 말자. 세상에 공짜란 없다지 않은가.”라고 똑부러지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 이젠 한비야씨의 말마따나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그리고 삶을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 그래서 내가 지금 글을 쓰려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라고 외치며, 열심히 쓰면 된다.
목차
트위스트 교육학을 들으며 트위스트 추길 바라다
트위스트를 추려다 트위스터에 휩쓸리다
트위스터에 휩쓸린 그대, 실망마라
훌훌 털어 버리고 야매가 되자
반란, 유쾌하고도 찬란한 이름이여
야매가 웃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다시 꼰대가 된다
유쾌한 야매가 되는 길로 함께 가자
빠르지 않게, 욕심내지 않게
아마추어 사회학을 들어야 하는 두 가지 이유
4개월 만에 다시 에듀니티로 향하는 발걸음
박동섭의 자기소개엔 특별한 게 있다?
‘발작적으로 제목이 떠올랐다’의 의미
소통이 중시되는 세상에, 오히려 소통이 안 되다
소통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일이다
우린 이미 소통을 하고 있다
‘1%의 소통’, 누구나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나를 캐어 들어가면 내가 있다?
나를 캐어 들어가면 내가 없다
커뮤니케이션은 ‘1%의 가능성’에 몸을 맡기는 것
‘사회의 언어’를 ‘과학의 언어’로 바꾸기
커뮤니케이션에서 ‘과학의 언어’가 불가능한 이유
‘내 생각’은 이야기가 시작되면 사라진다
언어는 행위다
내가 이러려고 글을 썼나?
내 생각을 말하기도 벅찼다
글이란 내 안의 들끓음을 묘사하는 것
부담스럽지 않게, 진솔하게 쓰면 된다
그래서 내가 글을 쓰려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