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섭의 ‘아마추어 사회학’ 2 - 알기 어려운 서설 ①
카페 헤세이티에서 ‘야매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신년회가 열렸고, 그 자리에서 황경민 시인이 “올 한 해 ‘야매’의 향이 널리 진동할 수 있도록 야매하자!”고 외침으로 ‘야매’의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말에 공명하듯 동섭쌤이 ‘아마추어의, 아마추어를 위한, 아마추어에 의한 사회학’이란 화끈하고도 섹시한 강의를 개설하여 ‘야매’의 반란은 본격화되었다.
반란反亂이라는 단어를 보고 거북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자연스레 반정부 활동으로 규정짓고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것으로 생각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여기서 말하는 반란은 ‘역성혁명易姓革命’ 따위의 위를 향한, 그래서 모든 가치관과 체계는 그대로이되 지배층만 뒤바뀌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돈도 실력이야’, ‘꼬우면 성공해’, ‘나만 잘 되면 돼’와 같이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는 ‘당연의 세계’에 배짱과 열정으로 당당히 서서, 한껏 웃어재끼고 경쾌하게 돌파하는 것을 말한다. 그럴수록 ‘당연의 세계’는 서서히 균열이 가게 된다. 아래에 인용한 글은 ‘반란’이란 단어가 무겁고 칙칙한 이미지가 아닌, 유쾌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반란의 뜻은 다양하다. 지나치게 살벌한 짓은 그다지 재미가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우리는 다른 일을 벌여보자. 그럼, 무슨 일을 할까? 그렇다. 거리로 뛰쳐나가 노세~ 노세~ 하는 거다! 역 앞에서 마음대로 떠들어도 좋고 데모나 선거운동을 벌여도 좋다. 양심에 뿔이 난 놈들한테 “이놈들, 당장 우주를 떠나라!” 하고 요구하면서 실컷 떠드는 것이다.
-『가난뱅이의 역습』, 마쓰모토 하지메, 이루, 2009년, 108쪽
반란은 무겁지 않고 가벼우며, 잔뜩 찌푸려지지 않고 웃음이 가득하다. 그래서 하나의 길만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나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 하는 활동들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어떤 아이디어로 어떤 행동을 하겠다고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운 후에 실행하는 게 아니라, 어느 곳에서 어떤 생각이 갑자기 튀어나와 어떤 행동으로 이어질지 그 누구도 모른다. 단지 ‘갑자기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정도의 생각만 있다 보니, 그걸 하는 과정 속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건 또 다른 변곡선을 그리며 다른 활동으로 이어진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포레스트야말로 ‘반란적인 삶을 사는 대명사’라 표현할 수 있다. 그는 한 번도 어떤 계획이나 거창한 명분에 의해 활동을 한 적이 없다. 그저 하고 싶기에 할 뿐이다. 한 번은 그냥 무작정 달리고 싶어서 미국 전역을 달렸다. 그런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의 곁에 하나 둘 모여 든다. 그 사람들은 ‘포레스트가 이렇게 달리는 데엔 엄청난 이유가 있을 거야’라고 기대를 하며 오체투지를 하듯 경건한 마음으로 함께 달린다. 그렇게 3년 2개월을 달리던 포레스트는 갑자기 달리기를 멈춘다. 함께 달리던 사람들은 ‘선각자(?)가 하던 일을 갑자기 멈췄으니, 깨달은 바를 하교下敎해주겠지’라고 기대하며,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바라본다. 그때 포레스트는 내뱉은 말은 명언 중 명언이라 할 수 있다.
“난 많이 지쳤어요. 이제 집에 가야겠어요.”
세상에 3년 2개월을 달렸는데도, 그런 엄청난 행동에 어떤 목적의식이 없었다는 사실이 놀랍기까지 하다. 이처럼 무계획성 속의 계획성, 카오스 속의 코스모스가 바로 야매의 키워드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짐짓 경쾌한 발걸음으로 유쾌한 마음가짐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가면 된다. 동섭쌤은 “지금 세상은 무언가를 잘 알기 때문에 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학에선 강의계획서 같은 것을 요구하는 거죠.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수업을 하기도 전에 ‘~~한 과정을 거치면 ~~게 된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시작되는 것이기에, 반수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잘은 모르지만, 이게 끌리니까 해볼래’라는 직감 같은 거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야매의 키워드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야매의 반란이 시작되었지만 아무리 ‘야매’에 대해 깊게 생각해봤고 절실한 마음이 있다 할지라도, 자칫 한 눈 파는 순간, ‘당연의 세계’에 쉽게 포섭당하고 만다. 그만큼 ‘당연의 세계’는 어느 곳에든, 누구에게든, 어떤 상황에서든 자리하고 있어, 방심하는 찰라 도적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런 예들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변절한 무수한 386세대(강철 김영환, 김문수)나, 반독재운동에 헌신하다 그 딸이 대통령에 출마하자 지지선언을 한 김지하 시인의 예를 통해 쉽게 볼 수 있다. 그래서 동섭쌤은 비고츠키 강의 당시에 “어떤 사실을 알았다는 것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긴장감을 유지하고 살아야 합니다.”라는 말을 했던 것이다.
이런 내용을 다룬 영화가 바로 『설국열차』다. 꼬리칸에 타고 있는 커티스와 몇몇 동료들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학대와 인권유린을 몸소 겪으며 ‘이 사회는 잘못됐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그걸 바꾸기 위해 앞으로 나간다. 치열한 싸움으로 많은 동료를 잃고 나서야 커티스는 엔진칸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절대악이라 생각했던 윌 포트는 아주 태연하게 맞아준다. 그러면서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운을 뗀 후에, “저 다리 건너, 구역과 구역들이 언제나 있어 왔고, 또 그대로 있을 것이네. 이 모든 게 무얼 위해선가? 이 기차일세. 지금 이 순간에 사람 수가 딱 적당하고, 모두 제 위치에 있지. 이 모두는 무얼 위해서인가? 인류를 위해서일세. 이 기차가 곧 세계이고 우리가 곧 인류인 게지. 그리고 지금 자네에겐 이 인류를 지도할 신성한 의무가 있네. 자네가 없으면, 인류는 멸종할 걸세. 지도자 없이 인류가 어떻게 되는지는 이미 봤잖은가, 서로를 삼켜댈 뿐이지.”라는 말로 ‘당연의 세계로 들어가는 초대장’을 내민다.
영화를 보던 모든 사람들이 이 장면에서 함께 놀랐다. 꼬리칸에서 엔진칸으로 돌진할 명분은 충분했고, ‘이 사회를 바꾸자’는 생각도 확실했지만, 그때 마주하는 건 ‘이 사회는 여태껏 이렇게 흘러왔고 앞으로도 이렇게 흘러갈 것이다’라는 회의감 내지는 현실감이니 말이다. 이 순간 커티스는 ‘맞아! 이 세계가 아무리 부조리하고 뭔가 이상하다 해도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거 아니겠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누구 할 것 없이 부조리한 사회를 보고 화가 난 나머지 바꾸려하지만 그런 경우 십중팔구 다시 ‘당연의 세계’로 포섭된다. 웃음을 상실하여 음울함만 가득해서는, 경쾌하게 리듬을 타지 못하고 군인의 제식처럼 경직되어 무겁기만 해서는 끌고 나갈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암살』이란 영화에서 속사포는 “항일운동 욱하는 마음에 3~4년 갑디다”라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이때 더 문제가 되는 건 다시 ‘당연의 세계’에 파묻히는 순간 ‘세상은 원래 그러니, 애 쓰지 마’라고 말하는 전형적인 꼰대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연의 세계’는 너무도 익숙하여 당연하게 보이는 것일 뿐, 다른 관점에서 보면 결코 당연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동섭쌤은 “물에 사는 물고기는 자신이 물이 산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조감적 시좌를 확보해야만 내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떤 관습에 빠져 있는지 알게 되는 거죠”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 조감적 시좌를 확보하면, 윌 포트가 커티스에게 했던 말도 매우 이상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 수가 적당하다’며 사람 수를 때에 따라 늘리거나 줄이는 걸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사람 수가 많다며 자신을 죽이려 할 때, 가만히 있을 것인가? ‘사람에겐 정해진 위치가 있다’며 핍박하는 걸 정당화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신이 꼬리칸에 있을지라도, 그 체제를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인가? 결국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정할 수 있고 맘껏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걸 듣고 있는 커티스조차 ‘꼬리칸에서 느낀 부조리와 폭력’은 어느새 잊어버리고 윌 포트에 동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이런 상황에 대해 진중권은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보수성은 이론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 이론의 반성 없이 습관으로 존재한다.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는데도 그저 익숙하기 때문에 집요하게 존속하는 폭력들이 있다. 그것을 없애려면 우리 주위의 익숙한 모든 것들을 한 번쯤 낯설게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인의 신체는 고통 받고 있다. 하지만 고통도 익숙해지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법. 적어도 한 번쯤 낯설게 보기를 통해 한국인의 신체가 어떤 고통을 당하는지 느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호모 코레아니쿠스』, 진중권, 웅진지식하우스, 2007년, 14쪽
너무도 당연시 되어 더 이상 어떤 비판이나 낯설게 보기조차 불가능해진 것에 대해, 우린 ‘원래 그래’라고 퉁칠 것이 아니라 ‘너무 익숙하고 당연하니 바로 그게 문제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너무도 익숙해서 고통스럽다고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알게 되고, 그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옥죄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이미 윌 포트의 말에 끌린 커티스는 역성혁명처럼 그 자리를 이어받으려 한다. 하지만 이때 요나가 커티스에게 기차가 계속 달릴 수 있는 비밀을 폭로한다. 엔진의 힘만으로 달리는 게 아니라, 좁디좁은 엔진 속에서 채 10살도 되지 않는 아이가 엔진에 기름칠을 해야만 겨우 달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걸 보자 커티스는 자신이 ‘당연의 세계’에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고, 요나에게 성냥을 건네주며 ‘당연의 세계’를 깨부수도록 돕는다.
야매가 되려 했지만, 끊임없이 ‘당연의 세계’가 들러붙어 한쪽 방향으로 나를 몰아세우고 다시 끌어가려 한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낯설게 볼 수 있는 용기’다. 낯설게 보려면 조감적 시좌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마추어의 사회학’이 그걸 도와준다. 4번의 강의로 진행될 ‘아마추어 사회학’엔 과연 어떤 이야기가 흘러넘치고, 이 강의를 모두 듣게 되었을 땐 어떤 조감적인 시좌를 갖게 될까? 아서라, 원래 모든 배움이 ‘모름’이란 사실에서부터 출발하는데, 이 강의는 애초에 ‘아마추어’가 되는 목표이니 그저 신나게 알아가기만 해도 된다. ‘아마추어 사회학’을 들으며 야매가 되는 방법에 대한 힌트나 찾아볼거나.
목차
트위스트 교육학을 들으며 트위스트 추길 바라다
트위스트를 추려다 트위스터에 휩쓸리다
트위스터에 휩쓸린 그대, 실망마라
훌훌 털어 버리고 야매가 되자
반란, 유쾌하고도 찬란한 이름이여
야매가 웃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다시 꼰대가 된다
유쾌한 야매가 되는 길로 함께 가자
빠르지 않게, 욕심내지 않게
아마추어 사회학을 들어야 하는 두 가지 이유
4개월 만에 다시 에듀니티로 향하는 발걸음
박동섭의 자기소개엔 특별한 게 있다?
‘발작적으로 제목이 떠올랐다’의 의미
소통이 중시되는 세상에, 오히려 소통이 안 되다
소통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일이다
우린 이미 소통을 하고 있다
‘1%의 소통’, 누구나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나를 캐어 들어가면 내가 있다?
나를 캐어 들어가면 내가 없다
커뮤니케이션은 ‘1%의 가능성’에 몸을 맡기는 것
‘사회의 언어’를 ‘과학의 언어’로 바꾸기
커뮤니케이션에서 ‘과학의 언어’가 불가능한 이유
‘내 생각’은 이야기가 시작되면 사라진다
언어는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