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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Oct 26. 2016

심리학, 그 너머의 커뮤니케이션

박동섭의 ‘아마추어 사회학’ 5 - 알기 어려운 서설 ④

지금까지 커뮤니케이션은 ‘나의 생각과 느낌을 100% 전달하는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우린 불통의 사회에 살고 있고, 타인의 생각을 더 이상 궁금해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탄하곤 했던 것이다.                



▲  [라디오스타]이 최곤은 불통의 대명사였으나, 서서히 맘을 열고 소통하게 된다.




‘1%의 소통’, 누구나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치다쌤은 그런 상식에 돌멩이 하나를 던지며 균열을 내버린다. ‘원래 상대를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1%라도 이해하게 됐다면, 그 가능성을 믿고 서서히 나가면 된다’고 말함으로 우리가 여태껏 당연시 해왔던 생각은 상식이 아니라 편견이었음을, 가능성이 아니라 한계였음을 밝힌 것이다. 1%의 이해의 가능성이 희망이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된다.           



믿을 수 없겠지만, 난 지금 에도시대에 와있어. 수술을 하고 있으면, 살인자로 몰리는 세상에서, 만족스런 도구나 약도 없이, 수술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렸어. 아주 간단한 수술이야. 지금 세상이라면 실패할리 없을 거야. 하지만 그런 수술이 여기에선, 생사를 건 고투가 되어버려.

여태껏 수술을 성공하게 했던 건, 내 실력이 아니었던 거야. 지금까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약과 기술, 설비나 지식이 성공하게 했던 거야. 그런 것들을 잃어버린 난 아프지 않게 꿰매는 법 하나 모르는 돌팔이였던 거지. 14년이나 의사를 하면서도 그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어. 내가 이렇게나 보잘 것 없다는 것을 몰랐었어. 겸손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했지만 나 같은 돌팔이 의사가 할 수 있는 수술만을 해오고 있었다니... 돌이켜보면 꽤나 건방졌었다고 생각해.

넌.... 늘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어.

-‘진’ 1기, 1화     


     

진은 외과의사인데,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에도시대로 타임슬립을 하게 된다. 하지만 진이 이동한 그곳에선 사무라이들이 칼싸움을 하고 있었고 그 중 한 명은 중상을 입게 된다. 진은 의사이기에 그를 치료하러 그의 집으로 데리고 간다. 상처가 워낙에 깊었기에 수술을 하려고 하지만, 집안사람들은 ‘오페operation’란 단어를 알아듣지 못할 뿐더러, 얼핏 알아들었다 할지라도 그건 칼로 살을 자르는 일이기에 그를 살인자라고 여긴다. 여기서 일차 멘붕상태에 봉착한다. 가까스로 수술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수술도구들이 있을 리 만무하다. 여기서 이차 멘붕상태에 이른다. 어쩔 수 없이 집에 있는 여러 도구들을 소독하여 쓸 수밖에 없었다. 막상 수술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진이 하는 모든 말들이 그들에겐 외계인의 언어처럼 들릴 뿐이었다. 여기서 삼차 멘붕상태에 빠져버린다. “거즈를 20㎝ 정도로 잘라 달라”, “불에 도구들을 뜨겁게 데워 소독해 달라”는 말들은 전혀 해석조차 되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눈만 깜빡거리며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다.



▲  20센치라는 말을 못 알아들으니, 손으로 어느 정도인지를 알려주며 알려준다.



이렇게만 말하면 ‘소통은 완전히 불가능해’라는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은 멘붕상태에 빠져 아무 것도 하지 못했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았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며 1% 소통의 가능성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주 미미하지만 그래도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몸짓으로 가능성을 확장해가며, 수술이란 어렵고도 힘든 작업을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치다쌤이 말하는 ‘1% 가능성을 믿고 나아가면 된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들도 ‘내 맘과 같으려니’하는 생각으로 100%를 전달하려 하고 약간이라도 오해가 생기면 ‘내 맘을 몰라준다’며 화를 낼 것이 아니라, 1%라도 전달되면 그것으로 만족하며 서서히 넓혀나가기만 하면 된다.        



▲  처음엔 서로 오해했고, 이해할 수 없었지만 1%의 이해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단계까지 이르게 된다.



        

나를 캐어 들어가면 내가 있다?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면, 여기서 멈추지 말고 좀 더 ‘나의 생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밀고 들어갈 필요가 있다.

누구나 그렇지만, ‘내 생각’은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심리학은 ‘내 생각을 내가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표면화된 생각은 잘 알지만, 그 속엔 어마어마한 무의식의 생각들이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리학에선 기본적으로 “지금 너의 마음이 어떠니?”라고 자기 안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 작년 여름방학 연수로 교사 신뢰 서클이란 것을 했었다. 이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침잠하게 만들더라.



심리학은 기본적으로 ‘확고부동한 내가 있다’고 전제한다. 그러니 어떤 것에도 휩쓸리지 않는 ‘주체’가 있으며, ‘그 주체만의 오리지널한 생각이 있다’고 단정 지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존감의 여섯 기둥』이란 책에선 아예 “그 목표는 누가 선택했습니까? 당신입니까, 아니면 당신 안에 있는 ‘중요한 다른 사람’입니까? (83쪽)”라고 물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면으로 파고들면 나의 진심어린 생각이 드러나고 나만의 소리가 나오기보다, 사회화된 생각이 표출되고 타인의 소리가 나오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헛갈리게 되는 것이 ‘과연 어디까지가 나의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너의 생각일까?’하는 부분이다. 나누려 하면 할수록 더 깊은 늪에 빠져드는 느낌이다.                



▲ 이 책엔 자신감은 결국 자신이 얼마나 자기에 대해 잘 알고 잘 분석하냐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게 무척이나 황당했다.




나를 캐어 들어가면 내가 없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우린 왜 생각에 대해, 말에 대해 나의 것과 너의 것을 나누고 쪼개려 하는 걸까? 그건 심리주의가 사회의 중심 학문이 되면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너무도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린 굳이 심리학을 배우지 않았어도, 누구나 심리주의자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우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심리주의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며, 관계를 이해한다.



그렇기에 때문에 우린 가장 먼저 심리주의가 남긴 해독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당연함에 갇혀 보이지 않던 좀 더 다양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와 같이 철옹성처럼 견고하게 쌓여 있던 심리주의란 성벽에 균열을 낸 사람들로는 바흐친Bakhtin(1895~1975), 비고츠키Vygotsky(1896~1934), 우치다 타츠루內田樹(1950~), 오자와 마키코小沢牧子, 이왕주 등이 있지만, 여기서는 바흐친의 말을 통해 심리주의 너머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말 속의 말word in language’은 반은 타자의 말이다. 이것이 ‘자신’의 말이 되는 것은 화자가 그 말 속에 자신의 ‘지향’과 ‘억양’을 심어 말을 지배하고, 말을 자신의 의미와 표현의 지향성에 흡수할 때다. 이 수탈appropriation의 순간까지 말은 중성적이고 비인격적인 말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왜냐하면 화자는 언어를 사전에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자의 혀 위에, 타자의 맥락 안에서, 타자의 지향에 봉사해서 존재한다. 즉, 언어는 필연적으로 타자의 것에서 빼앗아 와서 자기의 것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Bakhtin, 1981: 293-294  


        

심리주의자는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통해 나와 너를 끊임없이 나누고 오리지널한 자아만을 추구하려 할 때, 반심리주의자는 자신의 말이나 생각은 어쩔 수 없이 타자의 것이기에 나눌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러니 오리지널한 나라는 것도, 나만의 말이란 것도 있지 않다. 그저 남의 말을 가져와서 나의 말처럼 쓰고 있을 뿐이다.      



▲ 심리주의자들은 '주체'를 얘기할 때, 우치다쌤은 '낡은 목조건물이 나'라는 탁월한 비유를 들어줬다.



          

커뮤니케이션은 ‘1%의 가능성에 몸을 맡기는 것

     

그러니 애초에 나의 생각을 100% 전달한다는 말은 ‘흠칫뿡’ 같은 말이다. 애초에 나라는 것 자체가 없으니, 나의 생각을 전달한다는 말은 거짓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저 타인의 생각을 나만의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이고, 그걸 전달받는 사람 또한 ‘타자의 혀 위에, 타자의 맥락 안에서, 타자의 지향에 봉사’하며 자기 것으로 하는 과정을 거칠 뿐이다. 그런 과정들을 거치기에 1%라도 이해하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동섭쌤이 강의를 시작하면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도 100%를 이해해야 한다고 부담 갖지 말고, 그저 강의의 맥락 안에서, 강의의 지향에 몸을 맡기고 1%라도 자기 것으로 하면 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러니 우리는 ‘아마추어 사회학’을 들으며 어떤 내용들을 지배할 것인지, 어떤 내용들을 자기의 의미와 표현의 지향성에 흡수할 것인지 고민하기만 하면 된다. ‘1%의 가능성’ 그것만 믿고, 재밌게 커뮤니케이션을 하면 된다.  



▲  소통이란 원래 그런 것이란 걸 안다면, 잘 안 되기 때문에 하고 싶어지고, 잘 모르기 때문에 배운다는 맥락도 이해가 될 거다.





목차     


1. ‘아마추어 사회학으로 야매하자

트위스트 교육학을 들으며 트위스트 추길 바라다

트위스트를 추려다 트위스터에 휩쓸리다

트위스터에 휩쓸린 그대, 실망마라

훌훌 털어 버리고 야매가 되자          


2. 아마추어의 사회학과 설국열차

반란, 유쾌하고도 찬란한 이름이여

야매가 웃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다시 꼰대가 된다

유쾌한 야매가 되는 길로 함께 가자     


3. 어머아마추어 사회학이건 꼭들어야 해~

빠르지 않게, 욕심내지 않게

아마추어 사회학을 들어야 하는 두 가지 이유

4개월 만에 다시 에듀니티로 향하는 발걸음     


4. 누구나 소통하며 살고 있다

박동섭의 자기소개엔 특별한 게 있다?

‘발작적으로 제목이 떠올랐다’의 의미

소통이 중시되는 세상에, 오히려 소통이 안 되다

소통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일이다

우린 이미 소통을 하고 있다     


5. 심리학그 너머의 커뮤니케이션

‘1%의 소통’, 누구나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나를 캐어 들어가면 내가 있다?

나를 캐어 들어가면 내가 없다 

커뮤니케이션은 ‘1%의 가능성’에 몸을 맡기는 것     


6. 언어는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사회의 언어’를 ‘과학의 언어’로 바꾸기

커뮤니케이션에서 ‘과학의 언어’가 불가능한 이유

‘내 생각’은 이야기가 시작되면 사라진다

언어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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