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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Oct 18. 2016

‘아마추어 사회학’으로 야매하자

박동섭의 ‘아마추어 사회학’ 1 - 여는 글

올해 4월 18일부터 5월 16일까지 5강으로 진행된 ‘트위스트 교육학’에 많은 기대를 했었다. 오랜만에 듣는 동섭쌤의 연속 강의이니만치, 즐겁게 배울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탓이다. 그런데 막상 들어보니, 처음의 기대와는 많은 부분이 달라 충격에 빠졌다.                



▲ 트위스트 교육학 첫 강의 시간의 모습. 기대와는 달라 깜짝 놀랐다.




트위스트 교육학을 들으며 트위스트 추길 바라다

     

트위스트 교육학을 듣기 전만 해도 호기롭게 “어떤 관념이나 아는 것 없이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트위스트를 추듯, 와서 맘껏 어우러져 볼 생각이다. 아마도 이번 강의를 듣고 남기는 기록들은 강의 내용과 내가 어떤 동작으로 트위스트를 췄는지에 대한 것일 거다.”라고 기대를 했었다. 



▲ 맘껏 강의와 어울러져 춤출 수 있기를 바라며, 의기양양하게 강의를 들으러 왔다.



이런 생각을 하기까진 ‘지식은 획득 가능하다’, ‘지식의 양이 늘어날수록 우월해진다’는 가장 일반적인 생각이 뒤집어지는 계기가 있었다. 동섭쌤에게 처음 들었던 비고츠키 강의에선 ‘학습=획득’으로 보던 관점을 거부하고 ‘학습=활동’으로 보는 관점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중증장애인 마리가 눈짓과 표정으로 여러 사람들을 진두지휘하여 요리를 만들어 낸다. 과연 이런 상황을 보면서 마리가 학습을 했다고 볼 수 있는지, 없는지가 관건이었는데, 적어도 그 당시 나에겐 엄청나게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이럴 때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런 상황을 마리가 요리했다고 친다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요리사겠네’라고 비꼴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곰곰이 음미해보면 그건 공부의 개념 자체를 바꾼 것이자, 지식을 많이 암기하면 할수록 똑똑해진다는 관념 자체를 허물어 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 학습을 사진으로 표현하면 이런 모양새일 거다. 그런데 실상 학습은 완전히 다른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던 관념들이 무너지고 나니 묘한 해방감이 들었지만, 그 반면에 ‘나는 누구, 여긴 어디?’와 같은 혼란이 찾아왔고, ‘그렇다면 안다는 건 뭘까?’하는 혼돈이 찾아왔다. 그러니 지금껏 하나라도 더 알고자 아등바등했던 일,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숨기려 했던 일들이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런 과정들이 있었기 때문에 트위스트 교육학은 열심히 배우겠다는 각오가 아니라, 한껏 그 순간에 어우러져 빠져보자는 각오로 임했던 것이다.                



▲ 아주 맘을 징허게 먹고 왔수다. 과연 어떨까요?




트위스트를 추려다 트위스터에 휩쓸리다 

    

첫 시작은 좋았던 것 같다. 강의를 듣고 후기를 쓸 땐 아주 술술 풀려나갔기 때문이다. 그쯤 되니 ‘이제 제법 트위스트를 잘 추게 되었나 보다’라는 자만심까지 들 정도였다. 



▲ 1강을 듣고 4편의 후기를 쓸 때만해도 '제법 후기도 쓸만 하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뽀록이 나고야 말았다. 누구나 긴 시간동안 자신을 감추는 건 어렵지만, 한순간 착한 사람인 척, 괜찮은 사람인 척하기는 쉬운 것처럼, 그건 어디까지나 한순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였다. 그러다 보니 강의를 들으면 들을수록 몸이 가벼워지고 맘이 즐거워져서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聞一知十)’ 경지에 이르기보다, ‘열을 들어도 하나만 생각나는(聞十知一)’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나름 즐기자고 했으면서도 전혀 즐기지 못했고, 나름 가벼워지자고 했으면서도 자의식에 꽁꽁 감싸여져 무겁기만 했다. 



▲ 강의를 듣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 왜 이리 잔뜩 무거워진 걸까?



이미 오랜 시간동안 이렇게 살아왔으니, 맘먹었다고 해서, 무언가 느꼈다고 해서 쉽게 바뀔 리는 없었다. 그래서 아마도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본성은 태어날 당시엔 별로 차이가 없지만, 살아가면서 달라지기 시작한다(性相近也, 習相遠也. 「陽貨」2).”고 한 것이지 않을까. 구김이 전혀 없던 옷도 입고 생활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주름이 생긴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그 때 생기는 주름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사실이다. 모두다 생활방식이 다르고, 활동 반경이 다르다 보니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일을 할지라도 다른 주름이 잡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주름은 ‘나만의 무늬’라 표현할 수 있고, 그걸 ‘인문人文’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래서 ‘트위스트 교육학’은 아예 정형화된 방식으로 격식 있는 춤을 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런 것을 신경도 쓰지 않고 자유롭게 춤사위를 펼친 것도 아닌, 어설프게 흉내만 내다 끝나고 말았다.                



▲ 정도전은 '인간의 무늬'에 대해 외쳤었다. 그만큼 나도 깊게 인간의 무늬가 드리워져 있었나 보다.




트위스터에 휩쓸린 그대실망마라  

   

그 후로 5개월이 흘렀고, 이번엔 ‘아마추어 교육학’이란 제목의 강의가 개설되었다. 이 강의의 제목을 듣는 순간, ‘아마추어’란 단어에 확 꽂혔다. 

우리 사회는 전문가를 양성하려 하고, 경쟁력 있는 인재를 육성하려 하며, 그런 사람들만이 방송에 나와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니 무의식중에 ‘전문가 숭상주의’에 너나 할 것 없이 빠져서 좋은 학벌을 가지려 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 하며,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려고만 한다. 이런 세상에서 ‘아마추어’를 외쳐봐야, ‘역시 가지지 못한 것들이 자기위안을 한다니까’라는 비아냥을 듣기 십상이다. 



▲  세상이 정의하는 프로와 아마추어는 이렇다. 그리고 우리도 이 도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현실은 이러한데도 일반적인 흐름과 반대 길로 유유히 걸어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카페 헤세이티를 운영하는 황경민 시인은 자신을 ‘야매 싱어송라이터’라고 소개하며 야매를 널리 전파하기 시작했고, 그런 흐름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한 둘 모이더니 급기야 강좌를 열기에 이르렀다. 이름하야 ‘야매란 무엇인가?’라는 아주 발칙하고도 상상력이 강물같이 흘러넘치는 제목의 강좌를 말이다. 그러면서 아주 당당하고도 힘 있게 “아무쪼록 올 한 해 ‘야매’의 향이 널리 진동할 수 있도록 야매하자!”고 외쳤다. 



▲ 야매 싱어송라이터 황경민 시인. 시인의 야매를 위한 합창이 시작되었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물줄기는 돌을 만나면 돌을 에워싸며 지나가고 구덩이를 만나면 구덩이를 채우고 흘러갔다. 이게 어떤 흐름을 낳을지, 그리고 어떤 인연으로 이어질지, 어떤 결말을 낳을지 모르는 채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런 흐름을 받은 사람 중 하나인 준규쌤은 “야매의 세계가 없는 A급 세계, 똘똘한 세계, 정상의 세계라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다. 낙후시키자. 야매가 ‘A급 세계, 똘똘한 세계, 정상의 세계’를 낙후시키지 않고는 모두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야매가 더 뭉치고 야매가 더 많아져야 한다. 야매만이 희망이다. 야매여! 영원하라!!!”라고 ‘야매 예찬론자’가 되어 외치기 시작했고, 동섭쌤은 ‘아마추어 사회학’이란 신식(?) 학문을 주창하기 시작했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는 모르지만, 자신만의 감성으로 자신만의 특기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건 정신의 승리라 매도할 것이 아니라, 유쾌한 반란이며 흥겨운 발걸음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이곳 어디에도 우울증이나 부러움, 부끄러움 따위의 감정이 들어설 공간은 없다. 그저 이 순간 함께 즐기며, 누릴 뿐이니 말이다.                



▲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구덩이도 채우고 돌을 에워싸며 흘러간다.




훌훌 털어 버리고 야매가 되자

     

그렇기 때문에 ‘아마추어 사회학’을 들을 땐 편안한 마음으로 참여하면 된다. 지식을 꽉꽉 채워 전문가가 되려 할 것이 아니라 하나라도 더 버려 아마추어가 되도록, 자의식에 갇혀 완벽한 상으로 전문가가 되려 할 것이 아니라 완벽한 상을 지우고 여러 상을 찾아 적재적소에서 상을 바꿀 수 있는 아마추어가 되도록 하면 된다. 



▲ 상을 지워야 한다. 새로운 탈을 쓰면 그 탈의 주인이 되고, 또 다른 탈을 쓰면 또 다른 주인이 된다. 들뢰즈가 말한 '-되기'다.



마지막으로 동섭쌤이 ‘아마추어 사회학’이란 제목의 강의를 통해 하고 싶던 게 무언지, 그의 글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자.           



내가 이번 강의에서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앎과 삶을 가두고 옥죄고 있는 ‘이데올로기’라는 ‘창살의 틈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정교한 어법을 사용하는 사람은 그의 본체를 가두고 있는 감옥의 철장 문 바깥에 언어만을 탈출시키는 곡예를 연출할 수 있다. 그리고 바깥에 나간 ‘말’만이 문을 바깥에서 열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사고의 힘 보다 말의 힘이다’는 언명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이것이다.

-박동섭, FACEBOOK, 2016년 1월 16일



▲ '야매'의 향이 널리 진동하도록 야매하자!라고 외치니, 동섭쌤이 '아마추어 사회학' 강의를 개설한다. 이게 바로 공명이다.


          

이 글을 읽고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지금껏 당연하다고 느꼈던 모든 것, ‘나는 원래 ~~해’라고 고정관념으로 가지고 있던 것, ‘너는 ~~~해야 해’라고 사회와 어른이 덮어씌워둔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신나게 탈주하면 된다. 그건 어디까지나 ‘너 잘 되라’는 말로 포장되어 있고, ‘전문가가 되어야 해’라는 말로 귀를 솔깃하게 할지라도, 경쾌한 동작으로 리듬을 탈 수만 있다면 삶은 그 자체로 축복이 될 것이다. 그러니 아마추어인 그대, 야매인 그대, 팔푼이인 그대, 이상한 사람인 그대여, 이 순간 그저 강의에 흠뻑 빠져보라.


▲ 아마추어 사회학을 들으며, 야매의 길로 고고씽!





목차     


1. ‘아마추어 사회학으로 야매하자

트위스트 교육학을 들으며 트위스트 추길 바라다

트위스트를 추려다 트위스터에 휩쓸리다

트위스터에 휩쓸린 그대, 실망마라

훌훌 털어 버리고 야매가 되자          


2. 아마추어의 사회학과 설국열차

반란, 유쾌하고도 찬란한 이름이여

야매가 웃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다시 꼰대가 된다

유쾌한 야매가 되는 길로 함께 가자     


3. 어머아마추어 사회학이건 꼭들어야 해~

빠르지 않게, 욕심내지 않게

아마추어 사회학을 들어야 하는 두 가지 이유

4개월 만에 다시 에듀니티로 향하는 발걸음     


4. 누구나 소통하며 살고 있다

박동섭의 자기소개엔 특별한 게 있다?

‘발작적으로 제목이 떠올랐다’의 의미

소통이 중시되는 세상에, 오히려 소통이 안 되다

소통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일이다

우린 이미 소통을 하고 있다     


5. 심리학그 너머의 커뮤니케이션

‘1%의 소통’, 누구나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나를 캐어 들어가면 내가 있다?

나를 캐어 들어가면 내가 없다 

커뮤니케이션은 ‘1%의 가능성’에 몸을 맡기는 것     


6. 언어는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사회의 언어’를 ‘과학의 언어’로 바꾸기

커뮤니케이션에서 ‘과학의 언어’가 불가능한 이유

‘내 생각’은 이야기가 시작되면 사라진다

언어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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