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섭의 ‘아마추어 사회학’ 4 - 알기 어려운 서설 ③
차장님의 강의 소개가 끝나자 동섭쌤은 드디어 정면을 응시하고 섰다. 어찌 보면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떨리는 순간이자, 모든 가능성이 어리는 순간이라 말할 수 있다.
4월에 진행되었던 트위스트 교육학 당시에는 ‘박동섭은 누구인가?’라는 내용으로 강의의 문을 활짝 열었다. 대부분 자기소개를 할 때 이름, 나이, 직업, 학력 따위의 간단한 정보만을 알려준다. 그 정보들이 나란 사람에 대해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정보들은 매우 지엽적이며 단편적이어서, 나에 대해 알려주는 건 거의 없다고 보아도 된다. 이게 미심쩍다면, ‘건빵, 단재학교, 영화, 동섭빠, 전주’와 같은 정보들만 보고 나에 대해 무엇을 알게 됐는지 말해주길 바란다. 아마도 ‘이건 뭥미?’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자기를 소개할 때 던져주는 정보들은 실질은 감춘 채 곁다리만 전해주는, 그래서 소개는 들었지만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무의미한 것들뿐이다.
동섭쌤도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일반적인 소개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시작부터 이타미 주조라는 사람이 잡지사와 했던 인터뷰를 소개했고, 그걸 패러디하여 자기소개로 이어갔다. 그러니 이런 식의 동섭쌤의 소개를 들은 사람 중, 동섭쌤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여느 강사와는 달리 매우 독특한 사람이구만’이라 느꼈을 것이고, 이미 동섭쌤을 알던 사람이라면 ‘역시 박동섭!’이란 탄성이 절로 나왔을 것이다.
어찌 보면 강의의 시작부터 자기소개를 했다는 점에선 판에 박힌 듯했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매우 파격적이라고도 평할 수 있다. 일반적인 자기소개와는 달랐기 때문이며 “몰상식과 부조리에 저항하고 대들고 그리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태도로 글을 쓰고 대학에서 강의하고 지금까지 밥을 먹어왔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그런 태도로 쓰고 싶은 것을 쓰고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함으로 강의의 성격까지 한 방에 전달해줬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아이들 말로 하면 ‘꿀잼!’이다.
트위스트 교육학의 첫 시작이 그처럼 인상 깊었다면, 이번에도 그에 뒤지지 않을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과연 그건 뭘까?
나는 은근히 ‘아마추어 사회학’이란 이름을 짓게 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줄 거라 기대했다. 이전 후기에서 썼다시피 ‘아마추어’란 이름에서 ‘야매의 향’이 몹시 진동하고 있었기에, 그 연관성에 대해 말해주며, 이 강의가 지향하는 바를 알려주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동섭쌤은 그에 대해선 어떤 얘기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원래 동섭쌤의 스타일은 강의 제목이나 강의 내용을 ‘강의계획서’에 맞추듯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그에 맞춰 강의하는 스타일이기보다, 발작적으로 떠오른 것을 존중하며 청중의 반응에 따라 주고받듯 진행하는 스타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동섭쌤의 페이스북을 보다보면 ‘발작적’이란 단어를 매우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니 조선시대처럼 호를 굳이 짓는다면, ‘발작 박동섭’이라 지어도 될 정도다.
이렇게만 말하면 전혀 준비도 하지 않고, 그저 시간을 때우듯 허술하게 강의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전혀 그런 내용은 아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데엔 ‘강의계획서에 따라 교육을 하는 것이야말로 반교육적이다’는 성찰이 밑바탕에 깔려 있으며, ‘아하!’하고 발작적으로 내용이야말로 상아탑의 권위의식이나 비현실감이 아닌 현장에 뿌리내리고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삶이란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니 준비되어 있되 거기에 매이지 않도록 즉흥적이려 하며, 고민하였으되 진지함에 압사당하지 않도록 발작적이려 하는 것이다.
첫 시작도 발작적이었을까? 아니면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전혀 예측도 하지 못했지만, ‘커뮤니케이션’을 키워드로 꺼내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트위스트 교육학에 비하면 워밍업 없이 바로 본론에 들어가는 느낌이다.
동섭쌤은 “일반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이란 나의 생각과 느낌을 100% 전달하는 것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관을 연상하며 들어간 것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을 이상적이라 여기죠.”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맞다! 최근에 가장 유행하는 책들에 빠지지 않고 들어있는 내용은 ‘소통’에 대한 것이고, ‘제대로 된 소통을 위해선 경청해야 한다’며 『경청』이란 책도 엄청나게 팔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각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반대로 생각하면, 소통이 제대로 안 되고, 경청이 제대로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대 간에 갈등이 조장되고, 지역 간에 차별이 정당화되며, 계층 간에 위화감이 당연시되어, 말도 전혀 통하지 않고 심지어는 왕래조차도 거의 없다. 이런 상황이기에 사람들은 소통에 관련된 책이라도 읽으며 이런 현실에 돌파구를 마련하려 하거나, 어떤 대리만족 같은 거라도 느끼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여러 소통에 관련된 책을 읽고, ‘비폭력 대화’와 같은 프로그램을 들으며 여러 방면으로 소통해보려 노력하긴 하지만, 여러 부분에서 한계에 부딪힌다. 그러다 보면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꽉 막혀 있는 상대방이 문제야’라며, 상대방만 탓하게 된 것이다.
소통을 하려 하지만 오히려 소통이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 동섭쌤은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지 않는 이유는 나의 문제나, 상대방의 문제이기 이전에 ‘커뮤니케이션은 나의 생각과 느낌을 100% 전달하는 것’이란 생각이 문제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이상 커뮤니케이션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고, 늘 한계에 부딪힐 것입니다.”라고 일반적인 생각과는 아주 다른 이야기를 해준다. 이 말이 강의실에 울려 퍼지는 순간, 이 말을 듣고 있던 모든 이의 머릿속엔 ‘물음표’가 띠용하는 효과음과 함께 튀어 올랐을 것이다. 거기엔 ‘저건 도대체 무슨 말이지?’하는 의심의 눈초리와 ‘저렇게 말한 데엔 무언가 있겠지’하는 기대가 교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과 느낌을 100%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동섭쌤은 아주 재밌는 예를 들어줬다.
‘① 지금 나는 외계인과 함께 있다. ② 그 외계인은 한국의 사정이나 상황은 하나도 모른다. ③그러나 그 외계인은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다. ④ 아래의 상황을 그 외계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려 한다’고 조건을 설정해줬다. 과연 아래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에듀니티 강의실에 초등학교 교사, 특수학교 교사, 중학교 교사, 대안학교 교사, 출판사 직원과 같이 여러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은 김밥으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강의를 듣기 위해 의자에 앉았다. 강사인 박동섭 선생은 컴퓨터의 파워포인트를 켜고 강의를 시작했는데, 5분 정도 지나자 지각한 한 수강생이 허겁지겁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빈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이 상황을 한국인에게 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저 이 글을 그대로 보여줘도 어렵지 않게 위의 상황을 그려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외계인이라면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그에겐 ‘교원제도에 대한 지식’, ‘김밥이 왜 간단한 저녁인지에 대한 이해’, ‘5분이란 시간관념’, ‘의자와 책상이란 사물에 대한 이해’와 같은 것들이 모두 다 낯설기 때문이다. 그러니 위의 상황을 설명해주기 위해서는 정말 하나하나의 개념부터 설명해야 하며, 그러다 보면 또 모르는 단어들이 나와 그 단어에 대해 다시 설명해야 하는 무한한 설명의 순환에 빠져 버리고 만다. 그러니 만약 끝까지 알려줬다고 해서 외계인이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알게 될 거라 보장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러기 전에 그 외계인은 화를 내며 ‘나~ 안 해!’라고 도망갈지도 모른다.
이처럼 커뮤니케이션이란 기나긴 착각과 오해, 그리고 아주 잠깐의 이해 사이를 넘나들며 이루어지는 아주 신비한 체험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소통이란 존재 자체를 걸고서 하는 위험한 모험이라 표현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동섭쌤은 우치다 타츠루(올해 세종과 춘천, 현천고에서 강연을 했는데 현천고에서 이 이야기를 했다고 함) 선생이 말한 커뮤니케이션의 정의를 인용하며 “저 사람과 나는 원래 99%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겨우 1% 이해의 가능성만이 있을 뿐이기에, 그걸 단서로 삼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도록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조금 밖에 이해를 못했다고 화를 내거나 상대방이 꽉꽉 막혔다고 비난할 게 아니라, 오히려 만족하면 된다”고 말해줬다.
우치다쌤의 말은 어찌 보면 여태껏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며, 여태껏 우린 잘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었으면서도 한 없이 서로를 저주하고 불만족스러워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러고 보니 동섭쌤이 ‘아마추어 사회학’의 시작과 함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건 ‘이 강의 또한, 또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이기에 우린 1%를 이해하게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룻강아지라고 비웃듯’ 동섭쌤의 커뮤니케이션 이야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에 대한 이야기도 꽤 흥미진진하고 긴 이야기가 필요하기에, 다음 후기에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서 하도록 하겠다.
목차
트위스트 교육학을 들으며 트위스트 추길 바라다
트위스트를 추려다 트위스터에 휩쓸리다
트위스터에 휩쓸린 그대, 실망마라
훌훌 털어 버리고 야매가 되자
반란, 유쾌하고도 찬란한 이름이여
야매가 웃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다시 꼰대가 된다
유쾌한 야매가 되는 길로 함께 가자
빠르지 않게, 욕심내지 않게
아마추어 사회학을 들어야 하는 두 가지 이유
4개월 만에 다시 에듀니티로 향하는 발걸음
박동섭의 자기소개엔 특별한 게 있다?
‘발작적으로 제목이 떠올랐다’의 의미
소통이 중시되는 세상에, 오히려 소통이 안 되다
소통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일이다
우린 이미 소통을 하고 있다
‘1%의 소통’, 누구나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나를 캐어 들어가면 내가 있다?
나를 캐어 들어가면 내가 없다
커뮤니케이션은 ‘1%의 가능성’에 몸을 맡기는 것
‘사회의 언어’를 ‘과학의 언어’로 바꾸기
커뮤니케이션에서 ‘과학의 언어’가 불가능한 이유
‘내 생각’은 이야기가 시작되면 사라진다
언어는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