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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Oct 10. 2016

우치다 타츠루에게 한 발 내딛기

 우치다 타츠루의 ‘동아시아의 평화와 교육’ 3

어쩌면 우치다쌤의 2012년도 강연2014년도 강연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찾아온 기회라 할 수 있다. 단재학교에 있었기 때문에 동섭쌤을 알게 됐고, 그 당시 동섭쌤이 심취해 있던 우치다란 사람을 알게 됐으며, 민들레에서 연거푸 우치다쌤의 책을 두 권이나 출간하면서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게 됐다.                



▲ 2011년 11월에 동섭쌤에게 들었던 첫 강연으로 알게 됐다.




배우려는 자가 한 발 내딛기를 해야만 비로소 배울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위 환경이 그랬다는 것이지, 내가 알아서 우치다쌤이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찾으러 다녔다거나, 배우는 자의 자세로 “모르는 게 있습니다. 잘 못하는 게 있습니다. 그러니 가르쳐주십시오”라고 하진 않았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그때까지도 반신반의하면서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난리법석이야?’라는 의구심 가득한 시선으로 넌지시 지켜보고 있었다. 



▲ [에반게리온]의 AT필드는 경계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경계심을 세울 떄 변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동섭쌤은 언젠가 “가르치는 쪽이 ‘배우지 않을련?’하고 먼저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야 한다. 그건 아주 중요하고 필요한 행위이다. 그런데 “그러면 나는 당신의 제자가 되어서 당신으로부터 배우겠습니다”는 배우는 쪽이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서 사제관계가 성립되려고 한다고 치자. 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가르치는 쪽은 경계선의 이쪽에 서서 지그시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마지막 한 걸음이 남은 상황에서는 학생이 자기책임으로 그리고 자기결정으로 경계선을 넘어서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가르치는 사람의 열정만큼이나 배우려는 사람의 결정과 행동이 뒤따라야 배움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걸 ‘한 발 내딛기’로 표현했다.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땐 ‘지극히 당연한 얘기 아니야?’라는 생각을 했었다. 당연히 가르치는 사람의 열정으로만 끌고 가는 건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하는 얘기로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순 있어도, 물을 먹일 순 없다”라는 말이 그와 같은 말이니 말이다.               



▲ [죽은 시인의 사회]의 녹스를 보면 한 발 내딛기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사랑이든 열정이든, 결국 자신이 선택하고 내딛어야 한다.




두 번의 강연에서 난 한 발 내딛기를 하지 않았다 

    

위의 말은 매우 지당한 말이지만, 현실에선 지극히 이상적인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학교는 원해서 가는 곳이기 보다, 가야 하니 가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전혀 원하지 않고, 할 마음이 없음에도 해야 할 것들 투성이다. 그때 교사가 지그시 기다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만은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어떻게든 하게 만들어야 하고, 그걸 하는 과정 속에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 학생도 하기 싫지만 해야 하니 힘들고, 교사도 무작정 시켜야 하니 힘들다.



그나마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대안학교라서 정해진 커리큘럼이 없고 시험제도도 없기에 기다리는 게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기다리는 건 ‘무책임, 무관심’으로 여겨질 수 있기에 한계가 있다. 그래서 우리끼린 “서머힐에선 아이가 수업에 참여하고 싶을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주는 걸 ‘대단히 교육적인 모습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막상 대안학교에서 아이가 그렇게 할 때까지 기다린다고 하면 ‘너무 무관심하다’고 불만을 표시한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처럼 학교에서 막상 동섭쌤이 말한 배움의 과정을 실천할 때엔 여러 문제들에 부딪히게 된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무언가 배우려는 사람에게 있어선 동섭쌤의 말이 백퍼센트 맞다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선생이 있어도 배우려는 사람이 마지막 한 걸음을 떼어 경계선을 넘어서 들어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바로 두 번의 강연을 들을 때의 내 마음이 그랬던 것이고, 의구심에 가득 찬 마음으로 그 마지막 걸음을 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 국토종단을 할 때야말로 한 걸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강연장에서 배우기 노검파일로 배우기 

    

두 번의 강연 이후로 우치다쌤을 직접 뵐 기회는 없었다. 2015년 1월에 교사들이 모여 일본에 직접 가서 우치다쌤을 뵐 거라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영영 기회가 없을 것만 같았는데, 통역을 맡아 두 번이나 교사단을 이끌고 일본에 다녀온 동섭쌤이 노검파일을 보내준 것이다. 





녹음파일을 들으며 공부를 하는 건 대학생 이후 처음이었다. 대학생 때는 경서는 물론이고, 여러 원문들을 교수님이 읽어주고 해석해주면 그걸 녹음파일로 만들어, 개인 공부할 때 참고하곤 했었다. 하지만 아예 강연 전체를 녹음하여 그걸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며 이해해야 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엔 일반적으로 강연을 듣듯 중요한 내용을 정리하는 정도로만 하려 했는데, 그러기엔 너무도 많은 내용을 놓치게 되더라. 하는 수없이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강연 내용을 모두 녹취하고 그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니 2시간 강연을 모두 자세히 들어야만 했고, 그걸 중간 중간 멈추고 모두 타이핑을 쳐야만 했다. 그랬더니 녹취록을 만드는데 4시간 정도가 걸리더라. 



▲ 윤진쌤과 우치다쌤. 과연 한국의 선생님들은 우치다쌤에게 어떤 말을 듣고 싶어서 찾아간 걸까?



이렇게 정리를 해보니, 현장에서 강연을 직접 들을 때와 녹음파일로 강연을 들을 때의 장단점이 명확해졌다. 현장에서 들으면 언어 이외의 비언어적인 메시지까지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니 우치다쌤의 강연 내용에 따라 현장의 분위기가 어떤지,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또한 단점이 되기도 한다. 강연 내용 이외의 것에도 신경 쓰게 되니 강연 내용엔 소홀해지게 된다. 또한 현장에선 말이 금방금방 흘러지나가니, 이해되지 않던 말, 뭔가 아리송했던 말이 있을 지라도, 넘어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녹음파일로 들으면 비언어적인 부분들은 말끔히 사라지고 언어적인 부분만 도드라져 보여 내용을 파악하기 쉬워진다. 거기에 순간적으로 지나가서 이해가 되지 않던 말이라도, 몇 번이고 다시 들을 수 있으니 훨씬 이해하기가 쉬웠다. 하지만 그만큼 시간이 많이 걸리고, 진이 다 빠진다는 건 단점이라 할 수 있다.                



▲ 현장에 없었지만, 그래도 녹음파일로 들으니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




녹취록을 작성하며마침내 한 발 내딛기를 하다

     

한 강연은 청중들이 질문을 하면 우치다쌤이 답변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다른 강연은 ‘교실에서 수업이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에 대한 강연으로 진행되었다. 

막상 녹취록을 만들긴 했는데, ‘이걸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문제점이 있었다. 원래 같으면 강연 후기를 쓰는 게 제일 좋지만, 아무래도 아직까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니 강연내용을 움켜잡고 ‘이걸 어떡하지?’라는 고뇌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고민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녹취한 내용을 보기 좋게 편집만 하여 공유하기로 했다. 그게 그나마 우치다쌤의 말을 원래 의미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기도 했고,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는 것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런 식으로 내용을 정리하다 보니 한결 우치다쌤의 생각을 알기가 쉬워졌다. 역시 우치다쌤이 늘 얘기하듯이, ‘교육은 시간을 배제하면 성립할 수 없다’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몰이해의 시간을 버텨내고, 알고자 하는 마음을 유지하다보면, 그만큼 알게 되고, 보이게 되는 부분이 많아진다. 역시나 유한준의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말이 얼마나 위대한 말인지를 알게 된 순간이었고 ‘자기결정으로 경계선을 넘어서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의 의미를 확인하게 된 순간이었다.                



▲ 두 편의 녹취록을 편집하며, 우치다쌤의 경계선 안으로 한 발 내딛을 수 있었다.




건빵마침내 우치다 타츠루의 강연 후기를 쓰게 되다

     

2015년 초에 있었던 강연에 이어 10월엔 전주와 제주에서 강연이 있다. 전주교대는 고향집에서 15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기에 생각 같아선 직접 가서 듣고 싶었지만, 몸은 서울에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  내 고향 전주에서 강연을 하는데도 가지 못하는 이 기분이란



이번에도 동섭쌤은 녹음파일을 보내줘서 저번과 마찬가지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저번과 같이 녹취록을 만들고 그걸 편집해서 올리기만 해도 되지만, 이번에는 맘을 단단히 먹고 강연후기를 쓰고 싶었다. 이렇게 맘먹게 된 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이젠 우치다쌤의 이야기를 잘 풀어낼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있었다. 4번 강연을 들었고, 3번 강연 정리글을 남겼으며, 우치다쌤이 쓴 여러 권의 책을 읽었으니 어느 정도는 풀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둘째, 내 자신이 부족해도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을 쓰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예전엔 ‘어디 나 따위가~’라는 생각으로 함부로 후기를 쓸 수도, 어떻게 후기를 써야 하는지도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젠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나의 관점으로 우치다를 풀어내고 지금 이 순간에 드는 생각들을 덧붙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기엔 오롯이 건빵이 생각하는 우치다의 모습이 가감 없이 담기게 된다. 

그럼 길고도 지루했던 우치다쌤과의 인연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 짓고, 이제 본격적으로 ‘동아시아의 평화와 교육’이란 제목의 강연에 대한 강연 후기를 시작하도록 하겠다. 처음 쓰는 후기이니 만큼 ‘무자게’ 떨린다. 



▲  건빵이 처음으로 쓰는 우치다 타츠루의 강연 후기. 이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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