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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Oct 16. 2016

오감을 발달시켜야 하는 이유

우치다 타츠루의 ‘동아시아의 평화와 교육’ 10

사회적으로 ‘세상은 원래 그래’라고 압박하고, 그걸 고스란히 받은 부모들은 ‘다른 거 신경도 쓰지 말고 공부나 해’라고 조바심을 내며, 교육을 할 수 있는 주체인 교사들은 ‘시키는 대로 하면 돼’라고 모두 다 합심하여 열정적으로 ‘평시의 가치관(여기의 가치관)’에 매몰된 아이를 만들어간다. 

이렇게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공범인 상황에서, 이와 같은 악순환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꽉 막혀 보이기만 한다. 과연 우치다쌤이라고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을 알고 계시기나 할까?               



▲ 우치다쌤 정답 좀 알려주세요~




불나방처럼 알기 쉬운 논리로 달려드는 사람들 

    

이미 앞에서부터 여러 얘기를 하면서 이야기 자체는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졌다. 누구든 한계나 문제점을 지적하긴 쉽지만, 대안이나 해법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그러다 보니 반짝이는 두 눈으로 우치다쌤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이런 난국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명안을 내려주십시오’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 명안을 기대하고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 두 눈 초롱초롱 "쌤 명안을 내려주십시오"



하지만 바로 지금처럼 현실에 대한 막막함을 느끼며 무언가를 알고 싶어 미칠 것 같은 이 순간이 중요한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어설프게 아는 지식으로 총동원해 봉합하려 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라는 책으로 심리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지위에 오르자 오히려 ‘ADHD’, ‘야스퍼거’와 같이 한 존재를 병증으로 낙인찍게 되었다고 주장했던 오자와 마키코小沢牧子 선생은 이런 문제점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부터』라는 책에서 “사람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에 둘러싸여서 초초함과 불만과 위화감으로 숨이 막히면 그 사태를 벗어나기 위하여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기 쉬운 논리로 감싸버리려고 한다. 그리고 그 논리에 안주하려고 한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방치하는 상황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기 쉬운 이야기에 곧바로 달려든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 넉넉한 미소의 호호 할머니, 오자와 마키코 선생님.



오자와 선생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나 또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내가 아는 지식들로 해석하기에 급급했다. 알 수 없는 상태로 남겨두긴 찝찝했고, 그걸 남겨둔다 해도 서서히 잊혀 질 것이기에, 어떻게든 빨리 정리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오자와 선생은 ‘알기 쉬운 논리로 감싸버리려고 한다. 그리고 그 논리에 안주하려고 한다’고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이건 단순히 문제를 최대한 빨리 정리하려는 마음 자체를 탓하는 게 아니라, 그때 단순한 방법으로 결론부터 내리고 보는 마음을 탓하는 거였다. ‘누구나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말처럼 문제는 명확해 보이는 듯하고, 그에 대한 해답도 단순해 보이는 듯하다. 잘 되면 내 탓이고 안 되면 남 탓이라고 배후로 지목되는 남을 찾는 건 매우 쉽기 때문이다. 



▲ 2007년 소고기 촛불집회 당시에도 '배후세력'을 찾기에 분주했다. 문제를 빨리 봉합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게 올바른 해답인지는, 매우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서야 겨우 알 수 있다. 일례로 세월호 사건이 났을 때, 정부는 문제의 원인을 ‘유병언의 부정’, ‘해양경찰의 부조리’, ‘세월호 선장의 무능(무책임)’이라 봤었고, 이번의 갤럭시노트7 폭발 사건의 경우, 삼성은 매우 신속하게 ‘배터리 문제’로 결론 내렸었다. 그 후 세월호는 해양경찰을 해체했고, 선장과 선원에 대해선 재판을 진행 중이며, 삼성은 몇 주간 시간을 두고 전량 교환 및 환불을 진행했다. 과연 이렇게 신속하게 ‘알기 쉬운 논리로 감싼’ 해법이 잘된 것인지는, 다시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결론을 내리지 말고문제에 머물라 

    

그러니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단순하고도 명료하게 ‘알기 쉬운 논리’로 쉽사리 풀어내려 하지 말고 버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래에 인용한 오자와 선생의 글에 귀를 기울여 보자.           



따라서 곤란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는 곧바로 결론을 내리지 말고, 문제가 자신 안에서 입체적으로 보일 때까지 계속 몰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지성의 폐활량을 늘리는 방법이다. 눈앞에 있는 양자택일, 혹은 이항대립에 계속 스스로를 노출하는 것, 대립을 앞에 두고 생각에 잠기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바깥’으로 나가는 것, 그것이 사고의 원형이다.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부터』, 오자와 마키코 저, 박동섭 역, 다시봄, 2015년, 259쪽 



▲ 다시 봐도 좋고, 처음 봐도 좋은 책이다.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문제가 발생하면 최대한 빨리 관계자를 문책하고, 사건을 처리하기만 급급했다. 하지만 그게 ‘언 발에 오줌 누기’식의 땜질처방이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한국인의 정서에 스며든 ‘빨리빨리’는 그렇게 문제 상황에서도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개인조차도 문제에 직면했을 때 차근차근 문제를 생각하고 바라보기보다 어떻게든 빨리 해결책을 강구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니 정답을 던져주는 강의들이 인기를 얻고, 점집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땜질처방을 해선 안 된다. 그러려면 마키코 선생이 얘기하듯 문제가 입체적으로 보일 때까지 이항대립에 스스로를 노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걸 마키코 선생은 ‘지성의 폐활량’이라 표현했고, 동섭쌤은 ‘지적 폐활량’이라 표현했는데, 폐활량을 극대화하여 답답한 상황, 찜찜한 상황 자체에 머물러야만 하는 것이다.                



▲ 아이들과 학교에서 생활할 때, 여행을 할 때 가장 많이 '지적 폐활량'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다.




우치다 타츠루의 강연은 난해하다?  

   

오자와 선생이 ‘문제가 자신 안에서 입체적으로 보일 때까지 계속 몰입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우치다쌤도 두 눈 반짝이며 명안을 주십사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꺾어버린 채 강연을 이어갔다. 

보통 이런 강연의 경우 ‘~~하라’, ‘~~하지 마라’와 같은 간명하면서도 알아듣기 쉬운 어조의 문장들이 난무하여 사람들의 흥분을 불러일으켜 ‘역시 우치다에게 가면 궁금하던 게 풀리고, 체증이 꺼지는 시원함이 있다’는 평을 들으려 한다. 그런데 도무지 우치다쌤은 그럴 맘이 없어 보인다. 우리에게 삶에서 우러난 간단명료한 이야기를 해주기보다 자신이 일상에서 겪은 일화를 담담한 어조로 얘기해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기개발서류의 언명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라면 ‘우치다 타츠루 별 거 없네’라고 실망하거나, ‘말인지 막걸린지 도무지 모르겠네’라고 아리송해 할지도 모른다. 



▲ 우치다 타츠루 쌤의 강연은 어렵기도 하고 뭔 소린지 모르겠기도 하다. 과연 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런 우치다쌤의 말이 좋다. ‘말이 말을 만드는 강연’이 아닌, ‘삶에 앎이 영향을 끼쳐 활기가 넘치고, 앎에 삶이 반영되어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강연’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치다쌤은 여러 강연을 통해 무도가적인 기질을 이야기해줬었다. 그에게 공부는 ‘쿵푸工夫’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기에 단순히 일점이라도 더 맞기 위해 암기를 해야 하고, 하나라도 더 이해하기 위해 머리만 굴리는 일반적인 공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에게 공부란 삶을 열어가는 방법이고,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방법이며, 세상과 불화하지 않는 방법이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강연에선 삶과 앎의 일치를 이루려 노력하는 철학자적인 면모를 맘껏 볼 수 있다.                



▲ 우치다쌤은 무도인이자 학자다. 그러니 그의 강연엔 무도가적인 기질이 넘쳐난다.




오감을 퇴화시키는 교육이 아닌 발달시키는 교육 

    

그래서 우치다쌤은 명안을 주기보다 편안하게 합기도장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해줬다. 

일본에도 우리나라의 ‘수건돌리기’ 같은 게임이 있나 보다. 방법도 간단하고 어디서든 수건만 있으면 할 수 있기에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게임인데, 이 게임에 대해 우치다쌤은 “이 게임은 아이들의 미세한 지각을 발달시키기 위해 고안된 게임입니다”라고 알려준다. 그건 저번 후기에서 얘기했다시피 교육의 원래 가치인 ‘위기가 접근해 올 때 위기상황임을 파악하는 능력을 키워주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수건돌리기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다. 오감을 발달시키는 아주 좋은 게임이다.



원시사회엔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모두에게 있었다. 그래야 맹수로부터 부족을 지켜내고 인류가 생존하며 번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도로 문명화 되어갈수록, 기계화 되어갈수록 인간은 가장 기본적인 능력들을 퇴화시켰다. 

현실이 이러하니 자연스럽게 학교에서도 더 이상 ‘비상시의 가치관’이 아닌 ‘평상시의 가치관’만을 가르치게 되었고, 위기를 빨리 알아채는 아이들은 오히려 그 민감함 때문에 ‘예민하다’는 평을 들으며 배척당하고 그만큼 나쁜 성적을 받게 되었다. 이때 좋은 성적을 거두고 사회 요직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민감한 능력을 철저히 퇴화시킨 아이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사회에 이상 징후가 보이고, 위기 상황에 빠지게 되더라도 그들은 아무런 낌새도 알아채지 못하며,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 학교는 어찌 보면 '공부에 방해되니 오감을 둔하게 하라'고 외치는 곳인지도 모른다. 참는 것, 인내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치니 말이다.



이런 상황이기에 우치다쌤은 여기의 가치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으로 ‘오감을 발달시켜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민감한 감각들을 퇴화시키지 말고, 그걸 오히려 적극적으로 발달시켜 위험을 감지고 그에 대해 신속히 대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감을 발달시킬 때 ‘여기의 가치관’에 갇히지 않게 됨은 물론이고, 배움의 자세까지 갖추게 된단다. 왜 오감을 발달시키는 것이 배움의 자세를 갖추는 것에 영향을 미치는지는 다음 후기에서 알아보도록 하자. 



▲ 우치다쌤은 오감을 활짝 열 수 있는 교육환경을 중요시했다. 우치다쌤이 근무했던 고베여학원대학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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