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타츠루의 ‘동아시아의 평화와 교육’ 12
우치다 쌤은 ‘오감을 활짝 열 수 있는 교육환경이 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야만 막상 위기상황이 왔을 때 최대한 빨리 감지할 수 있으며, 여러 사람들과 함께 ‘키메라적 신체’를 구성하여 위기를 신속하게 수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이 강연을 할 때마다 아이들이 신체감각에 민감해지도록 “춥네. 보일러를 좀 돌려볼까?”와 같은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신체 감각이 살아나야만 비로소 맘이 열릴 수 있으니 말이다.
오감이 살아나 마음이 열렸다면, 다음 단계는 몸의 긴장을 풀고 몸을 개방하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는 각종 운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수영을 처음 배울 때 물이 무섭기도 하고, 내 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무작정 힘껏 발차기만 했었다. 그러니 몸엔 힘이 잔뜩 들어가 무거워져서 차츰 물속에 가라앉았던 것이다. 몸을 개방하지 않으니 긴장상태가 되고, 그만큼 굳어져 외부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탈 수 없었다.
그런데 여러 날 수영을 배우다 보면 어느 순간엔 몸에서 힘을 빼고 편안하게 뜰 수 있는 때가 온다. 그때는 힘껏 발차기를 하지 않아도 몸은 원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며, 물이 어느 곳보다도 편하게 느껴지게 된다. 몸을 아예 물에 맡기지만, 몸은 가라앉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몸을 개방한다는 건 무겁게 짓누르는 자의식(물이 무섭다, 뜨긴 할까?)을 벗어던지고, 긴장을 풀고 그 환경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이때 우치다쌤은 “역설적이게도 살아남는 힘이 강한 아이일수록 수업 받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라는 얘기를 해줬다. 지금까진 학교수업을 잘 받는 학생이야말로 적응력이 좋은 아이이고, 살아남는 힘이 강한 아이라는 통설이 있었는데, 그걸 뒤집어버린 것이다. 누구에게 묻더라도 ‘학교 수업에 흐트러짐 없이 참여하는 아이=적응력이 좋은 아이=사회를 잘 이끌어갈 수 있는 아이’라 대답할 테지만, 우치다쌤은 ‘학교 수업에 흐트러짐 없이 참여하는 아이=오감이 무뎌진 아이= 위급한 상황에 가장 위험한 존재’라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왜 살아남는 힘이 강한 아이는 수업 받는 것을 힘들어 하는 걸까? 살아남는 힘이 강하다는 건 그만큼 오감이 민감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한 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무엇인가가 느껴지니 그걸 표현하고 싶고, 표현하려고 하니 움직여야만 한다. 그런데도 학교는 끊임없이 제한된 공간에 많은 아이들을 몰아넣어 정해진 시간 외엔 움직여선 안 된다고 윽박지르며, 정해진 것 외엔 말해선 안 된다고 화를 내니 적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자기 몸에 관심이 많은 아이들에게 학교의 체육시간은 가장 힘든 시간 중 하나입니다. ‘내가 내 몸의 주인이기에 몸을 컨트롤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죠. 자신의 몸을 극복의 대상으로, 단련의 대상으로 여기도록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난 운동 감각이 별로 없나 봐’라고 운동을 하기 전부터 한계 짓게 되는 것이죠. 이미 자신의 몸을 움직여 보기도 전에 한계 지은 아이들일수록 개풍관에 와서 합기도를 배우면 훨씬 실력이 빨리 향상됩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속엔 학교 수업의 본질적인 부분을 비판하는 시선이 들어있다. 학교에서 수업을 받는 이유는 좀 더 높은 실력(성적)을 만들어 다른 아이들보다 경쟁우위에 서기 위해서다. 그건 체육 활동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어 올림픽 정신처럼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Citius-Altius-Fortius’라는 경쟁의식이 들어있다. 그러니 친목을 위해 스포츠 게임을 할 때에도 상대편을 이기는 것을 기본으로 삼게 되고, 승부욕이 강한 아이일수록 잘 못하는 자기 팀 선수를 깎아내리고 못마땅하게 여기게 마련이다. 이런 상황이 무한히 반복되니 잘 하지 못할 거 같으면 ‘난 운동엔 소질이 없어’라고 아예 도전조차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실이기에 학교의 체육은 자꾸만 ‘체육 혐오증’을 부추기고, 자기 몸에 대한 불신을 조장한다.
그런데 자기 몸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아이들이 개풍관에 와서 합기도를 하면 실력이 금방 는단다. 도대체 개풍관엔 어떤 비법이 있기에 그와 같은 반전이 가능한 걸까? 학교에선 ‘몸을 컨트롤하라’, ‘체력을 길러라’ 따위의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좌절감을 안겨주는데 반해, 이곳에선 ‘몸의 움직임 그것에 신경을 집중하며 느껴보라’고 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건 곧 ‘몸=도구(자아)’로 보던 관점에서 벗어나, ‘몸=자연물(타자)’로 보는 관점을 회복한 것이다. 몸을 도구로 보면 컨트롤하려 하고 정복하려 하지만, 자연물로 보면 자연과의 공생을 모색하듯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끌어안을지 고민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생각의 차이가 몸을 움직이는 것에 흥미를 느끼게 하고 그건 결과적으로 몸과의 화해로 이어진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쓰게 될 ‘공생의 필살기’에서 나오니, 그때 알아보도록 하자.
일본은 더 이상 손해를 볼 수는 없다며 통제 불능에 빠진 원전을 재가동했고, 무역장벽을 해소하여 경제에 이익이 된다며 미국과 TPP를 맺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모든 정책결정자들이 단기적인 성과에만 집중하고 눈앞의 이익에만 신경 쓰기 때문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눈앞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가치관’은 그대로 교육에도 반영되어 ‘평상시의 가치관에 매몰된 아이를 키워내는 것’이 최대의 목표가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우린 ‘반-교육적인 교육’을 아무렇지도 않게 미래 세대에게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땐 섬뜩할 수밖에 없다. 교육적인 활동을 하며 미래세대를 잘 키워내고 있다고 자임하고 있었는데, 그것 자체가 반교육적인 활동인 것은 물론,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활동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제부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 있을 수는 없다. 어찌 보면 동섭쌤이 줄곧 얘기해왔듯이 “어떤 사실을 알았다는 것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긴장감을 유지하고 살아야 합니다.”라는 말이 핵심일지도 모른다. 그건 하나의 방법을 찾으려는 발버둥이 아닌, 문제 상황에 빠져들지 않도록 애쓰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 우치다쌤도 단순히 ‘과거로 회귀해야 한다’거나, ‘지금은 다 잘못 됐으니, 모두 뜯어고쳐야 한다’고 막무가내로 주장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저 냉철한 현실 인식을 기반으로 인간으로서 원초적으로 지니고 태어났지만 서서히 잃어버렸던 능력들을 찾고, 오감을 민감하게 하는 것에서 시작하면 된다고 말할 뿐이다. 그럴 때 눈앞의 이익에만 골몰하여 미래를 제물로 바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게 되고, 나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여러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짓밟는 파렴치한 짓을 하지 않게 된다.
그는 마지막으로 “원시부족 사회에서의 교육은 아이들의 오감을 열어주고 배움의 자세를 갖추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상시와 비상시의 교육은 다른데,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는 교육은 평상시의 교육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비상시의 교육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본질적인 생존의 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오픈 마인드’입니다. 그런 생각을 염두에 두고 교단에 서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마무리 인사를 하며 강연을 마쳤다.
2012년부터 이어졌던 우치다 타츠루와의 인연은 신나는 일임과 동시에 무거운 돌멩이 하나를 얹어놓은 것 같이 부담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여태까진 ‘우치다 빠’라고 자부하면서도 한 번도 강연 후기를 쓸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것이다. 내용이 너무 방대하기도 했고, 그 내용을 왜곡 없이 담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으로 우치다쌤의 강연 내용을 담아내어 마무리 짓고 보니, 꼭 국토종단을 끝냈을 때의 기분이 들었다. 국토종단을 했던 당시엔 매순간 ‘오늘은 과연 잘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까?’, ‘잘 마칠 수 있을까?’가 걱정이 되어 두렵긴 했지만, 걸을 때만큼은 행복이 물씬 느껴졌다. 그렇게 한 달 동안 걸어 목적지에 도착하고 보니, 그제야 ‘나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단독 작품이 아니라 모두의 도움과 지지로 함께 이룬 공동 작품’이라는 깨달음이 오더라. 여행을 하던 순간엔 그저 하루하루 버텨내기도 힘들어서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끝난 그 순간엔 도움을 주던 뭇 사람들의 손길과 눈길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처럼 전주 강연 후기도 ‘내용을 왜곡하지 않고 잘 남길 수 있을까?’,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있었지만, 그래도 한 편 한 편 끝낼 때의 기분은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이 최고였다. 그런 순간들이 쌓여 이렇게 마무리 짓고 보니, 역시나 나 혼자 고군분투한 것이 아닌 함께 밀어주고 당겨주며 만들어나간 ‘공동의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치다쌤의 강연을 통역해주고 손수 녹음해준 동섭쌤의 손길, 그걸 전해준 애정, 그리고 한 편 한 편 올라오는 글을 보며 응원해준 사람들까지. 그런 넉넉한 도움들이 있었기에 끝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우린 우치다쌤의 말처럼 ‘키메라적 신체’가 되어 이렇게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함께 축배를 들어 이 순간의 뿌듯한 기분을 함께 나누며 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