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타츠루의 ‘동아시아의 평화와 교육’ 8
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일본은 어쩔 수 없이 미국의 원조를 받아 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당시엔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경제성장을 하다가, 자립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미국의존도를 낮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본인이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점차 우호적인 관계가 깊어지고, 그에 따라 이득을 보는 세력들도 늘어나면서 ‘미국에 의존하는 길만이 일본의 살 길’이라 생각하는 일본인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국가의 정책을 좌우하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들은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아시아의 긴장도를 높이려 하고 친미파 중심으로 모든 권력기관의 구성원을 꾸려 ‘미국 없는 일본’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미국에 의존하는 길만이 일본의 살 길’이라 외치게 된 데엔 장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 넓은 혜안 같은 것은 없이 지금 당장의 이익만을 중시하기 때문이고, 지금 당장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기득권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반영된 예로 우치다쌤은 후쿠시마 원전을 재가동하게 된 이야기와 TPP환태평양 경제동반자 협정(Trans-Pacific Strategic Economic Partnership) 이야기를 들려줬다.
2011년 3월 11일에 일본 동쪽 바다의 해저에서 강진이 발생하며 그 여파로 쓰나미가 후쿠시마 해안가를 덮쳤다. 그런데 하필 그곳에 원자력발전소(이하 원전)가 있었고, 쓰나미의 직격타를 맞고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지고 만 것이다. 이게 그 유명한 ‘후쿠시마 원전사고’다. 그로 인해 방사선이 유출되었고 전 세계는 충격과 공포에 빠졌으며, ‘안전제일국’이라 불리던 일본의 이미지는 무너져 내렸다. 그 당시 뉴스는 한결같이 ‘잘 수습하고 있다’고 떠들어 댔지만, 정확한 정보는 차단되어 얼마나 많은 원전 침출수가 바다로 흘러갔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폭을 당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일본은 그렇다 치더라도 주변국인 한국에게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방사능비가 내리느니, 방사능이 듬뿍 함유된 물고기를 먹느니 온갖 말들이 횡행했던 것이다. 더욱이 그 당시 나는 두 번째 도보여행을 준비하고 있던 때였고, 어머니는 “지금 돌아다니다간 방사능에 노출된다”는 말로 여행을 말렸기에 너무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주변국이 그렇게 방사능 유출에 대해 두려움에 떨고 있을 정도라면, 일본인들은 그 강도가 훨씬 컸을 것이다. 그러니 웬만큼 수습이 되어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는 소극적인 결론이 아닌 ‘매우 안전하다’는 적극적인 결론이 나오기 전까지는 원전을 재가동하지 않고 수습만 할 줄 알았다. 그게 시민들의 안전을 생각하고, 시민들이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부의 역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믿음을 초개와 같이 버렸고, 발전소의 상황이 어떤지 제대로 규명된 적도 없었음에도 ‘멈춰두면 멈춰둘수록 손해를 본다’고 생각한 관료들은 재가동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기엔 안전, 인명, 환경, 지혜와 같은 장기적인 안목에서만 보이는 가치들은 들어설 자리가 없고, 오로지 돈, 이익, 속도, 국가경쟁력과 같은 지금 당장 느낄 수 있는 가치들만 중시된다.
하긴 이런 상황은 한국에서도 ‘질 좋고 값싼 소고기를 공급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에서도 소비되지 않는 30개월 이상 된 소고기를 수입하며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 정부가 특별히 인식을 바꿀 필요가 없다고 본다. 질 좋고 값싼 쪽으로 (쇠고기가) 선택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던 어느 대통령의 말에서도 볼 수 있다. 시민의 건강보다도 미국과의 관계가 우선이라는 발상이 있지 않고서야 다른 나라도 수입하지 않는 고기를 수입하면서 저와 같은 말을 함부로 하지는 못할 것이니 말이다.
이와 같이 단기적인 이익에 함몰되어 정말 중요한 가치들을 아무렇지 않게 버리는 상황은 최근에 개봉한 『터널』이란 영화에서 명확하게 나온다. 하도터널을 통과하던 정수는 터널이 무너지며 갇히게 된다. 초반에는 정부가 구조에 최선을 다하지만, 시간이 너무 지체되고 유일한 통신망이었던 정수의 핸드폰까지 꺼지게 되면서 관심은 급속도로 시들해진다. 급기야 한 사람을 구하느라 ‘제2하도터널’ 공사가 무기한 지연되어 손실이 발생했다며 시공사는 공사강행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세월호 사건을 떠올렸고, 사람의 가치가 아닌 돈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의 민낯을 제대로 보고야 말았다.
TPP라는 것은 우치다쌤에게 처음 들어봤다. 하지만 계속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한미FTA와 많은 부분에서 유사하더라.
TPP든 FTA든 그 본질은 한 나라의 존립기반인 농업을 죽여 중공업을 살리자는 얘기였던 것이다. 협정을 체결하면 외국의 값싼 농산물들이 무분별하게 수입되어 유통되게 된다. 그러면 경쟁력이 없는 자국 농산물들은 팔리지 않게 되고 더 이상 농사를 지을 필요도 없어지게 된다. 그럴 때 정부는 농업부문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장기간 국고를 지원하여 다른 업종으로 변경할 수 있도록 도우며(?) “농민도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농업을 수출산업으로 키울 수 있다는 적극적 자세 갖는다면 세계적 경쟁력 가질 수 있다”는 말로 비수를 꽂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처럼 농업 쪽은 엄청난 피해를 볼 때, 자동차와 같은 중공업 쪽은 해외에서도 경쟁력이 있기에 이익을 보게 된다. 그때 관료들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바라보기보다, 지금 당장 ‘농산물을 수출하여 얻는 이익<자동차를 수출하여 얻는 이익’으로 단순히 환산하여 비교한 후에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에 협정을 추진한다’고 말한다. 지금 당장 이익이 되고,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와 같은 선택(?)을 하는 게 오히려 현명해 보이기도 하기에, 사람들은 ‘국가경쟁력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게 당연히 제대로 된 결정이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먹을거리 문제를 돈 한두 푼의 문제로 단순화시켜 말하는 것은 정말로 어이가 없다. 왜냐하면 국가정책은 단순히 한두 사람에게만 영향이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치다쌤도 “TPP 얘기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화나는 점은 농수산물을 상품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공급이 원활할 땐 상품으로 보이나, 그렇지 않을 땐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에, 결코 상품으로 다뤄서는 안 됩니다. 단순히 국제가격에 비해 비싸다 싸다의 문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생명 보존의 기반으로 생각해야 합니다.”고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상품이란 단순히 있으면 쓰고, 없으면 쓰지 않으면 그만이다. 비누, 스마트폰, 선풍기가 없다면 잠시 불편할지언정, 사회적인 혼란이 야기되진 않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농수산물은 없으면 살지 못하게 되고 그 사회는 아예 붕괴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니 지금 당장 이익이 된다고 자국의 농업을 경쟁력이란 잣대로 평가하여 사라지도록 부추기기보다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줘야 하는 거다.
그러면서 우치다쌤은 멕시코의 일화를 들려줬다. 멕시코의 주식은 옥수수인데 캐나다, 미국과 FTA를 추진하며 싼 미국산 옥수수를 먹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이니 당연히 멕시코의 옥수수 산업은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옥수수가 바이오에너지로 각광을 받으며 미국 내에서도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게 되자, 멕시코는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된다. 미국에선 대체 에너지에 불과한 옥수수가 멕시코에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치다쌤은 “공산품일 경우 없어지면 잠시 불편한 정도로 끝나지만, 농산물은 생명과 직결되기에 생활이 완전히 깨집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결코 남의 이야기일 수는 없다. 한국도 여러 나라와 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자본의 논리, 단기적인 이익의 논리에 따라 무역대상을 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멕시코에서 이미 벌어졌던 사건들이 머지않아 우리에게도 닥치게 될 것이다. 이걸 바로 ‘작은 이익을 탐하다가 큰 걸 잃는다(小貪大失)’이라고 한다. 과연 충분히 예측 가능함에도 ‘사회는 원래 그래’라며 방치할 것인가, 그런 흐름을 바꾸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