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15일(토)
어젠 혜린이가 아팠던 것이 큰 문제였다. 하지만 아침을 먹으며 보니, 걱정과는 달리 혜린이는 미소를 되찾았다. 더 이상 아픈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아져서 정말 다행이다.
오늘은 교육원에서 여름 캠프를 하고 있는 학생들과 일정을 함께 하기로 했다. 교육원은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각 지방에서 온 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이들 중 고려인이 대부분이다. 그들의 일정에 단재 친구들도 함께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사모님은 우리를 위해 밥과 된장찌개를 준비해주셨다. 아침밥을 정성껏 차려주셔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밥이 설익긴 했지만, 한국음식을 국외에서 먹고 있으니 여기가 카자흐스탄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았다.
다 먹고 나선 설거지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주방 아주머니가 나오지 않는 날이라 하지 않으면 사모님이 할 것이 뻔했기에 하기로 했다. 나 혼자 빨리 끝낼 생각으로 그릇을 닦고 있는데 주원이가 교육원 선생님에 의해 주방에 들어와 도와주게 되었다. 헹구는 것을 맡겼는데 나름 잘하더라.
그런데 문제는 너무 느리다는 것이었다. 단재학생들만 일정을 진행하는 것이라면 몇 분 늦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전체 일정에 맞춰야 했기 때문에 맘이 조급해졌다. 주원이는 “헹굴 때 그냥 손으로 헹구기보다 수세미로 헹궈야 하지 않아요.”라며 불안해했다. “수세미로 하지 않아도 돼”라고 안심시킨 후, 최대한 빨리 그릇에 세재를 묻히고 헹구는 걸 도왔다. 설거지가 끝나고 나니, 출발하기까지 겨우 20분 정도 남았더라.
오늘은 서바이벌 경기장에 가고 호수 같은 곳에 가서 수영을 한단다. 그래서 주원이에게 수영복을 준비하라고 했는데, 그게 어려운 일이었나 보다. 갈아입을 옷, 수건, 속옷 등을 고르는데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으니 말이다. 내가 보채니 주원이도 촉박하다고 느껴지던지 더욱 긴장을 하며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죠?”라는 말로 자신의 상황을 이해시키며 긴장을 해소하려 하는 모습이 보였다. 가방 안엔 갈아입을 옷이 차례차례 들어있어서 갑자기 끼어든 수영이란 일정 탓에 융통성을 발휘하여 옷을 고르기가 힘든 것처럼 같았다.
주원이 뿐만 아니라, 나도 갑자기 어떤 일정상에 변동이 생기면 생각이 일시 정지될 때가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 줄 몰라, 식은 땀 뻘뻘 흘리며, 긴장하고 가만히 멈춰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때의 주원이도 나처럼 그랬던 건 아닐까. 어쨌든 이 때문에 차는 10분가량 늦게 출발했다.
게임장으로 향하는 동안 교육원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자신을 세종학단에서 교육원에서 파견된 직원이라 소개했으며 지금은 교육원의 전체적인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고 했다. 이곳에 오기 전엔 중국에 있었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흥미로운 부분은 그는 카작어, 러시아어를 전혀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어 강사이기에 한국어로만 말해도 된단다. 자신의 이야기를 학생들이 이해하지 못할 땐 한국어에 능통한 직원에게 번역을 해달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론 이 또한 반쪽짜리 소통이 될 우려가 있다. 그리고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매우 힘들 것이다. 혼자 여행하는 정도라면 임기응변으로 해도 되겠지만 교육을 위해 해외에서 살아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현지어를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이 말은 ‘교육원 사정을 완전히 무시한 말’ 정도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교육원 일을 하다보면 11시에나 퇴근하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업무에 치여 정작 자신이 하는 교사로서의 일에 장애가 되는 형국이다. 그에게 필요한 건 적당한 업무와 현지어 학습이 아닐까.
알마티는 특이하게 도시 전체가 중앙난방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맹추위가 기승을 떨치는 겨울(영하 40℃까지 내려감)에도 집안은 후끈후끈할 정도라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집들은 꽤 잘 사는 축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알마티의 물가는 서울과 비슷한 편으로 고물가지만 급료는 50달러 벌기도 힘들 정도의 저임금이란다. 한 달 중앙 난방비로 60달러 정도가 나가지만 그걸 낼 돈이 없는 집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가정에선 나무를 떼며 겨울을 나니, 어제 원장님이 말했던 것처럼 겨울엔 대기오염이 심할 수밖에 없다.
알마티 시내를 벗어나니 도로상태가 엄청 안 좋아졌다. 심하게 덜컹덜컹 거릴 정도로 도로포장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차들은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이러다 사고가 나면 대형사고가 나겠다’는 걱정이 들 정도로 도로사정과 차의 속도는 반비례했다.
그런데 거기서 한술 더 떠, 서바이벌 게임장에 들어가는 길은 비포장도로였다. 차가 요동치는 체험은 정말 간만이다. 운명에 몸을 맡긴다는 건, 이런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도로를 달려본 건 군 시절 밖에 없을 정도로 일상에서 경험하기 힘들다. 그만큼 한국은 도로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곳은 국토가 넓기 때문인지, 돈이 누군가에게로 들어가기 때문인지 아직 도로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런데 어찌 보면 나의 이런 ‘당연한 반응’도 문명의 이기利器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인지도 모른다. 이때 ‘불편하다’는 생각이 든 게 아니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불편하다’는 감정은 그럼에도 수용할 수 있다는 부드러운 감정인데 반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감정은 그 나라의 모든 것을 비난하고 격을 낮춰보는 격한 감정이니 말이다. 바로 이러한 시각은 ‘선진국과 후진국’이라는 획일화된 이해방식이고, 우리도 알게 모르게 서구중심주의에 쪄들어 있다는 반증이다.
조금의 불편도 감수할 수 없는 나를 보며, ‘미개인들을 개화시킨다는 명목으로 문화, 환경, 언어 모든 것을 파괴당한 인디언들의 악몽’을 떠올렸다면 오버라고 하려나. 이건 문명을 비판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나라를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지극히 서구화되었다는 것을 비판하기 위한 말이다. 적어도 지금은 카자흐스탄이란 나라에 왔으니, 이 나라의 정서와 상황에 맞게 이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