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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Nov 18. 2018

한시가 맛있다

김형술 특강 - 조선 후기 한시 쇄신의 방향 3

교실에 뜬 별들이 환하게 앞을 주시하며 ‘그래서 복고파가 휩쓸며 획일화된 한시의 풍조를 어떻게 됐냐?’고 묻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찌 보면 형술쌤도 바로 그 이후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꺼내고 싶어 지금의 이야기를 시작했던 것이니, 이 순간이 가장 하이라이트이자, 오늘 이야기의 핵심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잠시의 침묵과 잠시의 눈길이 오고간 후에 마침내 입을 열었다.                




복고파의 억눌림을 뚫고 분출한 생기발랄한 목소리

     

조선 후기에 이르면 마침내 ‘우리 것을 펼쳐내야 한다’는 자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진경산수화를 비롯한 미술세게의 관점 이동만큼이나 문학에서도 ‘우리 것을 담아내기 위한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만발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정약용과 홍세태는 ‘진시眞詩’를 말하기 시작했고, 문학에서도 이규보가 외친 ‘창신刱新’에 버금갈 만한 ‘法古而刱新 能典而知變 논의가 문단을 채우기 시작했다. 

하나의 관점이 주류를 차지하게 되면 그 전까지 존재하고 있던 뭇 소리들은 더 이상 숨소리조차도 내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리거나 뒷방 구석으로 감춰지기 일쑤다. 하지만 우린 알고 있다. 주류적인 이야기가 맹위를 떨치는 시대일수록 소수자의 목소리엔 그 사회가 감추고 있는 모순이 드러나 있으며, 그들의 이야기야말로 어쩌면 그 시대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어느 시대든 주류의 관점을 탐구하는 것 이상으로 감춰진, 사라진 소수자의 목소리에 관심을 기울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럴 때 그 시대의 분위기가 더욱 생기발랄하게 느껴지며 사람이 사는 세상의 다종다양한 감정들과 느낌들이 그대로 느껴지니 말이다. 

그처럼 조선 후기에 불어 닥친 ‘조선시 선언’이나 ‘각자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새로운 흐름은 주류를 형성하기엔 턱 없이 부족하고, 세력 또한 구축하기에 버겁기에 주류적 관점으론 자리 잡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다양한 생각들이 충돌하고 여러 관점들이 살아 있음을 이만큼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일관되지 않은, 맹목적이지 않은, 무개성적이지 않은, 그저 죽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닌, 활발발한 생동감이었던 것이다.                




공안파자유분방한 사상이 조선 후기 문단을 휩쓸다 

    

형술쌤은 그들이 중국 공안파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신다. 공안파의 대표주자인 원굉도와 이지 같은 인물은 억눌려 있던 말들을 거침없이 풀어낸다. 그래서 원굉도는 아예 “본성에 맡기고 발하면 오히려 사람의 희노애락과 기호정욕에 통할 수 있으니, 이것이 기쁠 만하다(任性而發尚能通於人之喜怒哀樂嗜好情欲是可喜也).”라는 충격적인 말까지 하며, 이지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곧 진짜 마음이다(夫童心者眞心也).”라는 말까지 했다. 

유학에선 억눌러야 했던 기, 리에 방해만 된다고 보았던 기를 그들은 한없이 긍정하며 ‘심즉리心卽理’라는 말까지 하기에 이른다. 그러니 그들에겐 자유분방하게 자신의 생각들을 펼쳐내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게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풀어낼 때 거기에 마음이 자리하고 그 마음이야말로 이치를 제대로 담아낸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 관조는 생물에 내재하는 理를 그대로 수용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다.




공안파의 천기와 백악시단 천기는 다르다 

    

바로 이런 새로운 논의들이 조선 사회를 휩쓸며 영향을 끼쳤고 그에 따라 조선시 선언과 같은 ‘우리 것을 표현해 낸다’는 생각이 가능하게 됐다는 점이다. 

하지만 형술쌤은 그쯤에서 멈춰선 안 된다고 말에 힘을 주어 얘기했다. 분명히 공안파의 이론에 영향을 받은 게 확실하지만 그들과 조선 후기 백악시단 사이엔 엄청난 격절이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볼 땐 김창협의 논의나 공안파의 논의나 얼핏 비슷해 보이는데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둘 사이엔 자유분방하고 정감을 그대로 담아내려는 마음은 같기에 ‘천기天機’를 중시하고 개성적인 글쓰기를 긍정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때 김창협이 공안파에 대해 평가했던 말을 들려주신다. 김창협은 공안파의 글을 읽다보면 “백정이 술을 마시고 불경을 읊조리는 격”이라 평가했다고 한다. 그건 ‘외설과 예술’ 사이만큼이나 사람들에게 아리송하게 느껴지는 어느 한계에 대한 이야기였으리라. 김창협이 볼 때 공안파들은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을 자유분방하게 넘어다니며 추태를 부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같은 ‘천기天機’를 얘기했으면서도 둘 사이엔 전혀 다른 천기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주희가 제자와 나눴던 천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서 들려준다. 제자는 “천기라는 개념은 장자가 쓴 것이기에 유학을 하는 사람은 그 말을 쓰면 안 되지 않습니까?”라고 따지자, 주희는 ‘누가 썼던 그 말 자체가 중요한 말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그 사람 때문에 그의 좋은 말을 제단해선 안 된다.’라는 식으로 대답을 해준다. 그 말은 곧 천기라는 단어가 어떻게 유교에 편입되었는지 그리고 그게 어떤 흐름을 통해 김창협을 위시한 백악시단에까지 퍼지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라 할 수 있다. 

김창협과 홍세태가 천기라는 말을 쓸 지라도 그건 공안파의 논의를 그대로 이어받아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성리학의 테두리 안에서 새롭게 정의된 천기라는 개념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소화시평 스터디를 할 때 관조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성리학자들에게 관조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미 천지만물엔 이치가 깃들여 있기 때문에 사물을 정신을 집중한 채 보고 있으면 사물의 이치가 그대로 나에게 이르러 오며 그걸 통해 활연관통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자연을 관조하려 노력했으며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이를수록 자연을 핍진하게 담아내는 시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박지원에서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 보이긴 한다. 그의 아들 박종채가 아버지에 대해 남긴 기록인 『과정록』에 보면 관조하려 애쓰던 아버지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다. 연암협에 살 때 아버지는 당을 내려오지 않을 때도 있었는데 그러다 관심이 있는 외물을 만나면 아무런 말도 없이 느긋이 내려다보며 “비록 외물의 지극히 은미한 것, 예를 들면 풀과 짐승과 벌레들은 모두 지극한 경지가 있으니 만들어진 자연스런 오묘함을 볼 수가 있다

(雖物之至微如艸卉禽蟲皆有至境可見造物自然之玅.)”라고 말해줬다는 것이다. 사물 안에 이미 만물의 이치가 구비되어 있으니 그것을 보려 노력해야 한다는 말과 김창협이 「제월당기」에서 외친 말이 겹쳐 보이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한시의 매력그리고 한시의 맛

     

이론은 이미 갖춰졌으니, 형술쌤도 맘이 놓이나 보다. ‘이제부턴 본격적인 한시의 맛을 선사하겠어’라는 심정으로 쫘르륵 한시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김창흡의 「까치내에 다리 없어鵲川無梁」라는 시는 민중이 핍박받는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시였고, 이병연의 「우계(강릉)에서羽溪」라는 시는 민중의 대화를 그대로 시로 씀으로 민중이 들려주는 고초를 구색을 갖춰 그럴 듯하게 표현한 게 아닌 있는 그대로 보여줬으며, 이병연의 「일찍 출발하려다早發」는 하룻밤 신세를 진 손님이 일찍 출발하려 부산을 떨다 결국 주인에게 걸렸고 아침밥까지 먹은 후에야 출발하면서 ‘결국 이렇게 아침까지 먹고 갈 것이면 부산을 떨지나 말 것을, 괜히 부산을 떠는 바람에 여러 사람 번거롭게 했구먼.’이라 마지막 구에서 말하는 장면에서 얼마나 멋쩍었을까 싶었고, 신정하의 「두월정 옛터에서 새롭게 개업한 주막의 벽에 쓰며題斗月亭舊墟新開酒家壁」라는 시는 강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감 없이 그대로 묘사해내어 밑에서 자신의 힘으로 힘껏 살아가는 백성들의 저력을 보여줬으며, 권섭의 「아이들이 ’ 운으로 바둑을 읊었기에 늙은 나도 또한 제목을 장난삼아 네 가지 잡기에 대해 쓰다兒輩用驚韻咏碁老夫亦戱題仍題雜技四詩」라는 시는 영화 『타짜』를 시로 묘사한 듯한 쾌감을 느끼게 했고, 김창흡의 「십구일에十九日」이라는 시는 자연을 관조하며 생의 이치를 핍진하게 묘사하여 ‘저런 게 바로 관조한다고 하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했으며, 김시보의 「달밤에 거문고를 연주하며月夜琴韻」이라는 시는 홀로 누대에서 거문고를 연주했지만, 달과 시냇물이 합주를 하여 최고의 앙상블이 되었다는 감상을 얘기함으로 절로 이백의 「술 하나 달 하나 그림자 하나月下獨酌」이 떠올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고, 김창업이 지은 「배추」나 「시금치菠薐」이란 시를 통해서는 한시는 근엄해야 하고 철리를 담아야 한다는 관념을 깨부수고 일상의 아주 사소한 것, 우리에겐 너무나 친숙하여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을 담아도 된다는 것을 여지 없이 보여줬다. 

형술쌤은 시간이 한참이나 오버됐지만 좀 더 한시의 맛을 보여주고 싶으신지 망설이신다. 그래도 지금껏 보여준 한시만으로도 그런 감흥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한시가 얼마나 맛있는지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소화시평 스터디를 통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강의를 통해 한시가 어떻게 변화되었고 그게 우리에겐 어떤 식으로 다가오는지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여러 한시를 통해 그 당시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핍진하게 현실의 사물들을 담아내며 따스한 시선으로 민중을 보고 그들을 묘사하고 있으니 보는 내내 긴장은 눈 녹듯 사라지고 그런 시 마냥 나도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더라. 그건 분명히 희망이었고 사랑이었고 그리움이었고 행복이었다. 한시를 보며 행복했노라라고 말할 수 있는 지금은 그 어느 때에도 비길 수 없는 행복의 순간인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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