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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Nov 18. 2018

훅하고 들어가는 스타일로 좌중을 압도한 한시 이야기

김형술 특강 - 조선 후기 한시 쇄신의 방향 2

강의실에 들어가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이가 꽤 있으신 분들이 자리에 앉아 있어서 ‘과연 이건 무슨 조합일까?’ 궁금해 하고 있었는데, 이 수업을 기획하신 분인지 다가오신다. 그러면서 어떻게 오셨냐고 묻기에, 강의를 들으러 왔다고 하니, 이름을 적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름을 적고 나서 살펴보니 여느 연수회장에 갈 때처럼 그 옆엔 김밥과 간식, 음료수가 비치되어 있었다. 

지금 하는 수업은 ‘온다라 인문 아카데미’라고 전주에 사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전주대에서 여는 특강이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이 강의의 분위기가 이해가 되니 맘이 편해지더라. 그러면서 아까 오신 분이 “저녁 안 드셨죠?”라고 물어보시고선 김밥을 손수 가져다 주셨다. 에듀니티에서 들었던 강의 때도 그렇고 강의의 알찬 내용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간식이 가득 쌓여 있는 게 가장 중요하단 생각이 든다. 배움도 또한 배가 어느 정도 채워져야 더 듣고 싶고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  역시 강의엔 먹을 게 있어야 해.




전공자가 들으면 더욱 유익했던 한시 특강  

   

7시가 되어 형술쌤도 들어오셨다. 그러고 보니 형술쌤도 이분들과는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는 거다. 어색한 게 너무도 당연한 상황에서 어떻게 이 특강을 이끌어갈까 무척이나 기대가 됐다. 

형술쌤이 준 프린터에는 원문과 번역이 모두 되어 있는 친절한 안내서였다. 나처럼 전공자에겐 원문과 해석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친절함이 있었고, 한문을 모르는 사람에겐 해석만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번 강의의 주제는 ‘조선 후기 한시 쇄신의 방향과 주자학’이라는 비전공자에겐 무척이나 난해하고 어려워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주제였다. 하지만 나처럼 전공자에겐 소화시평 스터디 때 살짝 살짝 듣던 내용을 ‘문학사적인 흐름과 그 흐름 속에 어떻게 분화되어 조선시가 창작될 수 있게 되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게 하는 유익한 주제였다. 그리고 『우리 한시를 읽다』라는 책을 읽으며 어렴풋하게 이해했던 한시의 흐름을 이 강의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정의할 수 있게 됐다. 일에 선후라는 건 없지만, 어쨌든 과거의 경험들은 지금의 경험을 좀더 폭넓게 정의하고 이해하게 하는 데에 크나큰 역할을 하는 건 분명했다.                




나도 모르는 새에 한시의 세계로 빠져들다

     

나에게 만약 비전공자들을 대상으로 한시 특강을 한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면, ‘나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한시에 대한 개념부터 정리한 후에 내가 하고 싶은 얘길 풀어가겠다’고 말할 것이다.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로 초대하는 것이니 만큼, 알지 못하는 세계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술쌤은 훅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서 16세기부터 중국에서 유행한 복고파인 전후칠자前後七子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내셨다. 이런 부분에서 16년 1월에 초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진행됐던 동섭쌤의 강의와 무척이나 비슷했다. 자신에 대해, 그리고 오늘 말할 주제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알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친절한 안내자가 되어 천천히 설명해주는 방식을 택하기보다, 마치 선불교의 선문답처럼, 마치 공자의 한 마디처럼 훅 치고 들어오니 말이다. 그런 상황을 처음 접해보는 사람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한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데, 교육에 대해 교육학으로 배운 게 전부인데, 거두절미하고 한시의 흐름에 대해 곧바로 들어가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순간 ‘난 누구? 여긴 어디?’를 생각할 수밖에 없고, 이 자리 왠지는 모르지만 버텨내기 힘들 것 같다는 인상도 순간적으로 들기도 한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그 상황에 내몰리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아주 자연스럽게 빠져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노래 잘 부르는 사람과 노래방에 가면 그들이 부르는 노래에 음치에 가까운 나의 목소리를 코러스로 넣고 싶다는 용기가 생기듯, 동섭쌤의 강의를 듣고 있노라면 나도 교육학의 ‘교’자 정도는 얘기할 수 있을 것 같고, 형술쌤의 한시 특강을 듣고 있으며 ‘한시 그까이 것’하는 맘이 어리기 시작하는 거다. 분명 어렵고 난해한 건 맞는데 이상하게도 친근하게 느껴지는 착각의 늪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 두 쌤의 강의스타일이 비슷한 부분이 있다.




당나라 시풍이 우세를 떨치며 개성이 사라진 한시들 

    

한시는 삼국 시대에 본격적으로 쓰여진 이후 송나라 시풍이니, 당나라 시풍이니 하는 논쟁을 무수히 거치며 16세기를 맞이했다. 이때엔 송나라 시풍(이지적이고 철리적인 시풍)은 잠시 주춤하고 당나라 시풍(정감적이고 눈에 풍경을 그리듯 써내려가는 시풍)이 한바탕 유행을 선도한 시기다. 

그런데 당나라 시풍의 기본 배경엔 시적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그런 시를 쓸 수 있다는 걸 깔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처럼 한자를 빌려 문학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겐 더욱 더 어렵고 느껴졌던 것이고,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자각까지도 생겼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쐐기를 놓듯 중국 송나라 학자 엄우가 쓴 『창랑시화滄浪詩話』 같은 책에선 아예 대놓고 “시란 별도의 재능이 있는 것이지 책과는 관련이 없다. 시는 별도의 의취意趣가 있는 것이지 이치와는 관계가 없다(夫詩, 有别材, 非關書也; 詩有别趣, 非關理也.).”라는 선천적인 시 재능론을 펼쳐놓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사람들이 쓸 수 있는 시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선천적 재능도 재능이지만, 한문이란 낯선 문자체계를 완벽히 습득해야 했고 그걸 잘 배합하여 시적 규격에 맞춘 시를 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당나라 시를 거의 모방하는 수준으로 시를 써나가게 됐고 그래서 정철이 지은 「가을날에 짓다秋日作」와 같은 시의 경우는 아예 중국종이에 써서 성혼에게 보여주며 “작가가 누군지 알 수가 없구료?”라고 말하자, 성혼은 한참 보더니 “만당晩唐 때의 시입니다.”라고 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만큼 시의 개성은 사라지고, 어떤 시를 지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사라진 채 무작정 흉내내기에 바빴던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복고파와 한국의 복고파 

    

바로 이런 분위기에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 복고파라고 할 수 있다. 복고파는 제대로 시를 지으려면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고 힘껏 외쳤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두 가지 부분에서 그 전 시대와 다른 점이 있다. 이들은 “문장은 전한 시대의 것을 따르고, 시는 성당 시대의 것을 따른다文必秦漢詩必盛唐”라는 구호를 만들어 외쳤다. 이 말을 통해 전 시대와는 두 가지 다른 부분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첫째는 시든 문장이든 천부적인 재능에 따라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에 따라 잘 쓰고 못 쓰고가 정해진다는 점이다. 그러니 좋은 시를 짓고 싶거든 명편들을 열심히 읽고 따라 써보며 노력한다면 그만한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이고, 문장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둘째는 모범이 될 수 있는 시기는 지금 당시가 아닌 과거에 이미 전범이 있기에 그 때의 것을 참고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론들은 조선 사회에도 크나큰 물결을 이룬다. 그 대표주자가 바로 정두경으로, 그는 “사람이 비록 뒤늦게 태어났더라도 옛 것을 배우면 고상해지리니, 낮은 수준에서 기어 다닐 필욘 없는 것이다(人雖生晩, 學古則高, 不必匍匐於下乘.)”라고 말하며 지난 시대의 문장 중 좋은 문장만을 골라서 읽어야 하고 송나라 이후의 작품들은 보지 말아야 한다고 간곡히 말했다. 

복고파는 문장을 짓는 실력이란 게 천부적으로 타고난 게 아니라고 말하며, 여러 사람들에게 희망을 줬다는 점에선 분명한 희망이었지만, 최고의 작품을 정해놓음으로 그것만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모방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선 한계가 있었다. ‘달은 차면 기운다(月滿則虧)’라는 말처럼 한 방향으로 귀결되어 버리면 반동이 생기게 마련이다. 복고가 유행하고 좋은 작품이란 게 확정되어 그것만을 따라 짓게 되면서, 명나라에서든 조선에서든 억압된 욕망은 더욱 꿈틀대기 시작했다. ‘따라하지 않고, 어떤 권위에 기대지 않으며 쓸 수 있는 시라는 것은 과연 뭘까?’하는 논의들이 연달아 나오게 된 것이다. 

형술쌤의 강의는 점점 고조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만큼 강의실의 분위기도 한껏 달아올라 사람들은 ‘그래서 그 다음은 뭘 어쨌다는 것이오?’라는 느낌으로 눈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다, 이건 밤하늘에 뜬 별들이 아닌 109호 강의실 가득 반짝반짝 빛나는 호기심에 가득 찬 사람의 눈이란 별들이었다. 



▲ 강의가 시작될 때 나름 긴장한 듯 보이는 형술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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