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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Dec 26. 2018

강제 이주와 고려인

2013년 7월 1일(월)

고려인들은 러시아 연해주沿海州지방에 있는 항만도시인 블라디보스톡에 모여 살았다. 그런데 스탈린이 고려인들을 강제이주 시킨 것이다. 왜 고려인을 강제이주 시켰는지에 대해 두 가지의 의견이 있다고 한다.                



▲ 바슈토베의 초기 정착지. 이곳에 남은 치열한 흔적들.




스탈린이 고려인을 강제 이주한 까닭

     

그 하나의 카자흐스탄 민족은 유목민으로 양을 키우며 양고기나 먹고 살던 때라, 정착민인 고려인을 보내 불모지를 초원으로 개간하기 위해 보냈다는 것이다. 이 의견이 성립되려면 소련 사람에게 ‘고려인은 농경에 능한 민족’이란 관념이 있어야 하고, 선진 농법을 전파하고 싶었다면 최소한의 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고 보냈어야 한다. 그런데 죽던 말던 상관없다는 듯이 그냥 보내버리기에만 급급했던 것이기에 이 의견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지금도 오지에 연구자를 보낼 때엔,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과 지원을 약속한 후에 보내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고려인을 일본인으로 오해하여 사형하는 대신 죽음의 벌판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당시는 일본군이 한반도를 유린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때였다. 일본군이 연해주까지 다다르면, 고려인들이 일본군에 자원입대하여 적군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러지 못하도록 불모지와도 같던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이 의견이 맞다면, 이건 거의 사람을 지옥 한 가운데 버렸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아마도 이 의견이 더 타당해 보인다. 



▲ 삶이 터전을 권력자의 맘대로 함부로 옮겨 버리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우슈토베까지는 기차로 7일이 걸리는 거리라고 하는데 이때는 무려 한 달이나 걸렸다고 한다. 한 겨울에 객차가 아닌 화물차에 짐짝처럼 그득그득 실려 이동해야 했다. 추위와 배고픔, 불결한 환경에 17만 명 중 9만 명이 죽었다. 하지만 유골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산 사람은 살기 위해 시체를 화물차 밖으로 던지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기차에 몸을 맡겨야만 했다.                



▲ 고려인들이 내려졌던 우슈토베역. 지금은 역의 모습이 있지만, 그때는 허허벌판이었겠지.




때를 기다리며생명력을 지켜내다

     

이런 설명을 듣고 고려인들의 초기 정착지인 바슈토베를 찾아갔다. 정착지엔 비석이 세워져 있고 토굴은 지금 찾을래야 찾아볼 수가 없다. 당연하다, 1937년 10월의 일이었으니, 76년이 흐른 지금 토굴이 남아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니 말이다. 한국 같았으면 모형으로라도 재현해놨을 것이기에, 나와 단재친구들은 그런 모습을 상상하며 토굴을 찾아 헤맸고 흔적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 



▲ 토굴엔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고려인은 이곳에 버려지듯 내린 다음엔 땅을 파서 토굴로 들어갔고 갈대를 엮어 지붕을 만들었으며 온돌을 만들어 10월부터 4월까지 6개월을 버텨냈다고 한다. 허허벌판에서 그들이 그렇게까지 악착스럽게 살아가야만 했던 데엔, 삶의 비애悲哀가 숨어 있다. 살고 싶어서 사는 삶이 아닌,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사는 삶이다. 

비석이 세워진 옆에는 고려인들의 묘지가 있었다. 우리를 안내해주신 할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그와 같은 고려인들의 무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공동묘지를 만들고 싶어서 만든 게 아니라,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환경이었기에 하나 둘 추위에 얼어 죽으며 자연스럽게 형성된 묘지였던 것이다. 

6개월을 버틴 고려인들에게 소련 정부는 달리니바스톡(먼 동쪽, 1938년 4월)에 마을을 만들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1938년 11월에 그들은 학교를 지어 2세 교육을 시작했으며 점차 기반을 잡아나갔다고 한다. 그렇게 뿌리내린 고려인들은 카작인들에게 농경문화를 가르쳐줬고 지금은 존경받는 민족이 되었다고 한다.                



▲ 저 멀리엔 자연히 형성된 고려인의 무덤이 있다.




데스밸리와 맹자그리고 고려인

     

그런 이유 때문에 소련이 망하고 카자흐스탄이 독립하고 난 후, 카작인들은 고려인들을 도와줬다고 한다. 우즈베키스탄에선 고려인들을 약탈하고 죽이기도 했다는 데서 카작인들의 고려인에 대한 우호적인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독립 후 카자흐스탄이 자국인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고 카작어를 공용어로 지정하면서 러시아어를 쓰던 고려인들은 살길이 막막해지자 다시 연해주나 북간도로 대부분이 떠났다고 한다. 

미국 데스밸리Death Valley에 2004년에 짧은 시간동안 180㎜의 비가 내렸고 2005년 봄에 아주 짧은 시간동안에 꽃이 온 계곡에 만개했다고 한다. 모든 생명체가 죽었다고 생각되던 곳에서조차 비가 내림으로 생명의 조건이 갖춰지자 생명이 피어났듯이, 고려인들도 버티고 버텨 생명이 피어날 수 있는 환경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피어난 것이다. 이런 걸 보고 있으면 마치 맹자가 여러 번 인용하는 『서경』의 구절이 생각난다.           



『서경』에 ‘탕임금께서 한 번 정벌하기를 갈땅에서부터 시작하시니, 천하가 그를 믿는구나. 동쪽으로 정벌하면 서쪽의 오랑캐들이 원망하고, 남쪽으로 정벌하면 북쪽의 오랑캐들이 원망하네. 그러면서 ‘어찌하여 우리를 후순위로 하시는가?’라 하는구나’라고 쓰여 있습니다. 백성이 그를 바라보길 마치 큰 가뭄에 구름과 무지개를 바라는 것 같이 한다고 합니다. (탕임금의 군대가 이르러도) 시장에 가는 이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고 밭가는 이의 일상이 변하지 않습니다. 폭군을 주살하고 그 백성을 조문하니, 마치 단비가 내린 것처럼 백성들이 크게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경』엔 연이어 ‘우리의 임금을 기다리니 임금이 오시면 우린 소생하겠구나.’라고 쓰여 있습니다. 

『書』曰: ‘湯一征, 自葛始. 天下信之. 東面而征, 西夷怨; 南面而征, 北狄怨. 曰, 奚爲後我?’ 民望之, 若大旱之望雲霓也. 歸市者不止, 耕者不變. 誅其君而弔其民, 若時雨降, 民大悅. 『書』曰: ‘徯我后, 后來其蘇.’ -맹자양혜왕11     


    

이 글에 인용된 인민들은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단지 자기들을 착취하고 억누르는 권력자가 아니라, 그저 살아가도록 지켜봐주는 권력자를 바랐다. 그런데 전국시대의 중국은 무한하게 인민들을 착취하고 그들을 국가권력으로 억압하며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인민들이 살아가도록 지켜봐주는 존재이기만 한다면, 인민들이 단비가 내린 것처럼 ‘우리 임금이 오시면 우리는 소생하겠구나’라 생각한다고 밝힌 것이다. 

고려인들의 생존기를 듣고 있노라니, 맹자의 저 글이 떠올랐고 2005년 봄의 데스밸리에 만개한 꽃들의 모습이 스쳤다. 



▲ 2005년 데스벨리에 기적이 일어났다. 생명은 죽어 있는 게 아니라, 숨어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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