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2일(화)
오후에는 고려인 초기 정착자 중에 유일하게 살아계신 분이 있다고 해서 찾아뵈었다.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에서 김복동 할머니를 뵐 때마다 느껴지던 감정이 지순옥 할머니를 뵈었을 때에도 느껴졌다. 가슴이 아려왔다. 위안부 문제도 그렇지만, 고려인의 이야기도 우리의 아픈 과거임과 동시에 현재 진행형인 역사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더라.
하지만 나와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팩트fact라기보다 픽션fiction이며, 현재의 이야기이기보다 ‘과거에 그랬더라’라는 옛날이야기에 가까웠다.
그런 이유 때문에 어제 초기 정착지 근처의 무덤을 둘러보며, 누군가가 한 말은 충격적이었지만 충분히 이해되는 말이기도 했었다. 허허벌판에서 죽어간 초기정착자의 무덤이었기에 감상평이 나올 수도 있고, 울분을 터뜨릴 수도 있는데, 그 학생은 “무덤수가 적네요.”라는 아주 객관적인 말을 먼저 했다. 그건 좀 더 풀어 말하면, ‘무덤수가 적어서 고려인들의 수난의 역사를 증명하기엔 뭔가 부족한 거 같아요.’라는 뉘앙스의 말이었다. 그 말에 우릴 안내해주시던 고려인 3세 할머니는 “여기 외에도 여기저기 흩어진 무덤들이 많아요.”라고 대답해줬고,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그 학생은 “그럼 그렇지.”라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런 식의 반응은 수치화된 역사, 도표화된 역사, 무미건조한 활자화된 교과서로만 역사를 공부하며 살아온 사람에게 나오는 당연한 반응이다. 우리가 삼전도비를 보거나 동학농민운동 기념관에 가서 별 감정 없이 자료나 수집할 뿐, 감정이 복받쳐 오르지 않는 것과 같다. 그건 단지 외워야 하고 그냥 알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장에 가서 보더라도, 실제적인 흔적이 없으면 시덥잖은 옛 이야기를 듣듯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무덤을 보며 ‘많지 않다’는 반응이 나오는 데엔 이와 같은 메커니즘이 있다.
그렇다고 희망이 없다거나, 갈 때까지 갔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오늘 생존자 할머니의 생생한 증언을 들으면, ‘나와는 상관없는 옛 이야기’로 받아들인 마음에 약간의 미동이라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사건을 생생한 육성으로 듣는 자리이니, 고려인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처럼 들렸으면 좋겠다.
할머니는 딸과 살고 계셨다. 할머니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꽤 많나 보다. 한국 사람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얘기를 듣곤 한단다. 할머니는 거의 눈과 귀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셨다. 할머니를 가운데에 놓고 우리는 둘러앉았다. 마치 그 분위기는 유명인사의 말을 듣듯이, 한 곳으로 집중됐고 역사적인 순간이니만치 귀를 활짝 열었다. 그 순간만큼은 단재친구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최고의 집중도와 최고의 진정성을 보였다.
그래서 딸이 “한국 학생들이 옛 이야기 들으러 왔으니, 들려줘요”라고 말하자, 조금 머뭇거리시더니 러시아어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신다. 그러자 딸이 할머니 귀에 대고 큰 목소리로 “조선 아이들이 왔는데, 웬 러시아어로 말하오. 조선어로 말해야지.”라고 말했고, 그제야 할머니도 조선어로 말씀을 하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말에도 북한식 사투리와 러시아어, 그리고 발음이 새는 부분들까지 있어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부분이 많다. 그래도 최대한 알아들으려 노력했다. 이 순간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순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