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3일(수)
7명이서 몰려다니다 보니, 시간을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서로의 체력이 현격하게 차이나기 때문이다. 오전팀과 오후팀이 나뉘어져 코펠과 연료, 그리고 버너를 번갈아 들고서 이동한다. 6명이 모두 출발하는 것을 보고 나도 걸어가기 시작했다.
몇 분이나 걸어왔을까? 갑자기 건호가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두리번거린다. 그러고 나서 “코펠 챙겨온 사람?”이라고 묻는다. 그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때 우리 뒤에 오시던 분들이 “벽소령 앞 의자에 검은색 코펠이 놓여 있던 데요.”라는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신다. 그 순간 ‘과연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며, ‘어떻게 해결되는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기에 실수는 하기 마련이고, 그로 인해 위기는 늘 닥친다. 그러니 그런 상황이 일어났다고 해서 뭐라고 나무라거나 ‘일생일대를 좌우할 중대한 실책’으로 만들어선 안 된다. 단지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역량이기에 그걸 지켜보며 잘 극복해나갈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다. 과연 영화팀 아이들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건호가 부리나케 배낭을 내려놓더니, 혈혈단신으로 돌아서 뛰어간다.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으려 하지 않았고 막둥이들이 가야한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상황을 인지한 순간에 이와 같은 행동을 한 것이니 말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뿌듯하고 대견하더라. 그래서 나는 건호가 올 때까지 기다렸고, 나머지 아이들은 먼저 보냈다.
20분 정도 흘렀다. 건호가 코펠을 들고 달려온다. 그 모습이 그렇게 자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만약 건호가 코펠이 없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세석까지 도착한 상황이었다면, 지리산 프로젝트를 도중에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딱 시기적절할 때 그걸 알아냈고 자진해서 갔다 왔으니, 우리의 여행은 계속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참 멋지다, 그리고 위기수습능력이 정말 탁월하다.
건호와 단둘이 가니, 제 페이스대로 갈 수 있었다. 한참을 가다 보니, 모든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벽소령과 세석의 중간지점인 덕평봉 근처엔 선비샘이 흐른다. 1.400m가 넘는 고지대에 샘이 흐른다는 게 신기했다.
선비샘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데엔, 유래가 있다. 지리산 촌부의 자식으로 태어난 주인공은 일자무식인데다, 추남이기까지 하니 사람에게 대우다운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처녀와 결혼하여 아들 2명을 낳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천대는 계속된 것이다. 그게 평생의 한이었을까? 그가 죽기 직전에 아들 2명에게 “내가 죽으면 상덕평 샘터 위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한 것이다. 왜 그런 유언을 했을까? 사람들이 샘터 근처에서 샘물을 마시며 합장을 하는 모습을 봐왔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는 백일치성을 드리기 위해서 샘물을 떠놓고 기도를 드리던 풍습이 있었다. 아마도 샘물 앞에서 합장하는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런 식으로라도 노인은 사람들의 대우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일화를 알게 된 후세 사람들은 그의 넋을 기려 샘물 이름도 ‘선비샘’이라고 붙었다고 한다. 결국 누구 할 것 없이 사람이라면 타인에게 인정받는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 일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인정욕이야말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게 만드는 저력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에만 사로잡힐 경우 탐욕의 화신이 되어 인생을 그르치게도 하는 화근이 되기도 한다. 저력과 화근 사이에 삶의 비의가 숨겨져 있다. 여기서 우린 목을 축이고 조금 쉬었다가 길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