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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Apr 06. 2019

천왕봉이 알려준 지혜

2013년 11월 15일(금)

▲  다섯째 날 경로: 장터목 대피소~  천왕봉 ~ 장터목 대피소 ~ 중산리 탐방안내소



어제 본 천왕봉은 가을의 운치를 한껏 품은 곳이었다. 가을산에 오르는 이유는 단풍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서서히 잎사귀를 떨어뜨리며 겨울을 준비하는 ‘처연한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어서이기도 하다. 인간이 갖지 못한 ‘버려야 할 때, 놓을 줄 아는 마음’을 그곳에서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더욱이 오랜만에 본 천왕봉의 모습은 경이로웠다. 사방이 확 트여 수묵화에서나 볼 법한 능선을 그대로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지리산에 한 번 와서 세 번 천왕봉에 오르다  

   

그에 반해 오늘 새벽에 본 천왕봉은 쓸쓸하면서도 고지대 산악들이 지닌 풍미를 담은 곳이었다. 높다는 건 쓸쓸한 것이다. 높기에 기고만장해지거나 타인과 거리감이 생겨서 타인과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 자리에 와 주지 않으면 그 쓸쓸함은 옹이가 되어 썩어 들어간다. 하지만 새벽의 천왕봉엔 태양이 친구가 되고 일출을 보기 위해 올라온 사람들이 동지가 된다. 일출의 찬란함이 천왕봉을 밝히며 힘듦을 이겨내고 오른 사람들이 천왕봉을 어루만진다. 그래서 천왕봉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보는 천왕봉은 겨울과 가을의 경계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곳이었다. 가을이 넘어가면 겨울이 오는 것이 아니라, 가을 속에 겨울이 있고 겨울 속에 가을이 있어서 자연스레 변해가는 것이다. 우린 ‘가을 속의 겨울’을 맛보므로, 가을의 의미를 더 깊이 알 수 있었다.                



▲ 한 번 종주하며 세 번이나 천왕봉에 올랐고, 세 번 모두 전혀 다른 천왕봉의 모습을 봤다.




천왕봉과 같은 존재가 되길 바란 남명 선생     


나의 이런 감상에 곁들여 옛사람의 감상도 놓칠 수 없다. 과연 옛사람들은 천왕봉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을까?         

              

請看千石鐘 非大扣無聲      천 석 들이 큰 종을 살펴 보게나. 작은 공이 두드려도 소리 안 나네.

萬古天王峯 天鳴猶不鳴      만고에 변함없는 저 천왕봉은 하늘이 울리어도 울지 않으리.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은 천왕봉에 올라 밑을 내려다보며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산청군 산천재山天齋에서 천왕봉을 올려다보며 시를 지었다. 이 시를 통해 옛 사람들에게 천왕봉은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작은 종을 울리기 위해서는 젓가락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성덕대왕신종 정도 크기의 종을 울리기 위해서는 웬만한 막대로는 울릴 수 없다. 그에 걸맞은 큰 공이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천왕봉을 하늘이 내린 종이라고 가정하고 그걸 울리려 하면 얼마나 큰 공이가 필요할까? 웬만한 공이로는, 미동조차 없을 것이다. 이 시는 그와 같은 듬직하면서도 웅장함을 지닌 천왕봉을 일생사의 소소한 것들에 일희일비하며 쉽게 동요되는 인간의 나약하고 소극적인 마음에 대조하며 쓴 것이다. 

그 당시 남명 선생도 여러 가지 일에 신경 쓰긴 매 한가지였다. 젊었던 시절에는 벼슬을 얻기 위해 학업에 전념할 때도 있었지만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충격을 받고 낙향하여 지리산 덕천동에 산천재를 짓고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그래서 그는 영남사림의 거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이 날로 유명해지자 여기저기 그를 등용하기 위해 분주했으나, 그는 모든 걸 거부하고 후학양성에 전념했다고 한다. 

아마도 산천재에서 지은 이 시는 불안했던 정국과 처사로 전전긍긍하며 살 수밖에 없는 자신의 복잡한 심정을 대변한 시가 아니었을까. 천왕봉처럼 작은 변화에도 흐트러짐 없이 신념을 지키고 자신이 가야할 길을 묵묵히 가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런 남명 선생과는 달리 현대인들은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다. 집값이 떨어질까, 성적이 떨어질까, 미래가 어떠할까, 나만 낙오되나? 하는 수많은 불안을 안고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사회 안전망이 없어 ‘실패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 사회이다 보니,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걸 거다. 그러니 그런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과 천왕봉을 보면서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으리’라고 외치는 사람은 스케일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천왕봉에 오르는 사람들이 남명 선생 같은 그런 큰 사람이 되길 바라며 하산하기 시작했다. 



               

▲ 천왕봉에 올라 내려본 광경.




비천한 일그게 바로 소중한 일  

   

멀리까지 걸어가려해도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높은 곳에 오르려거든 반드시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辟如行遠必自邇; 辟如登高必自卑. -中庸』 15     


     

중용』이란 책은 사람의 깨우침에 관한 책이다. 성경이 일상적인 비유를 통해 형이상학적인 이야기의 본질을 꿰뚫어주듯이, 이 책 또한 마찬가지다. 위에 인용한 구절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 지리산 여행 후 2년 후엔 대구에서 서울까지 라이딩을 했다. 이화령 고개를 오르는 민석이의 모습.



누군가에게 ‘지금 바로 천왕봉에 오를래?’라고 하면 손사래를 칠 것이 분명하다. 그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낮은 산부터 차근차근 올라 체력을 기르며, 산에 오르는 것이 어떤 것이란 걸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천왕봉 같이 높은 산도 오를 수 있게 된다.

세상의 모든 일은 이렇게 순차가 있다. 하찮은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때, 그걸 기반 삼아서 거창한 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청소하기, 설거지하기, 인사하기, 제 시간에 가기와 같은 것들은 하찮은 일이지만, 그게 될 때에야 크나큰 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게 무슨 또라이 같은 소리야?’라며 불쾌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식들에게도 ‘공부’는 해야 하는 거라고 이야기 하지만, 위에서 예로 든 일은 해서는 안 되는 일처럼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찮은 일이 공부를 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걸 테지만, 그 본질엔 ‘하찮은 일과 거창한 일을 나누고, 미래를 위해서는 거창한 일만 해야 한다’는 의식이 숨어 있다. 이런 현실이니 아이들도 ‘난 공부라는 큰일을 하니, 하찮은 것들은 당연히 안 해도 된다’는 식으로 행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점엔 문제가 있다. 하찮은 일과 거창한 일은 이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모든 행위엔 결국 ‘절제’와 ‘단속’, ‘타인과의 관계’를 아울러 생각하는 마음이 숨어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작은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지을 때 자신의 앞가림을 할 수 있으며, 어떤 일이든 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먼 길을 가려면 가까운 길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자신이 꿈꾸던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찮은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상은 높아야 하지만, 행동은 가장 일상적인 일부터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천왕봉 등반이 알려준 삶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 올라갔으면 내려가는 것도 인생. 힘내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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