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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건수 May 17. 2020

때때로 하이쿠 <87>

2020년 5월 16일








 안개 속에서

 모든 것이 멈추네

 하얗게 검게




 어제는 실로 안개로 가득한 밤이었습니다. 전 이런 날에는 집안의 불은 모두 끄고 창문을 활짝 엽니다. 어두울 것 같지만 오히려 환합니다. 간간히 켜있는 어딘가의 불빛이 산란에 의해 안개에 반사되고 반사되어 퍼지기 때문이지요. 마치 하늘 전체가 하얀 한지로 감싼 거대한 등불처럼 바뀝니다.

 함께 할 술도 하나 있으면 좋습니다. 안개 낀 밤의 정취를 더해주지요. 잔에 술을 따르고 한 손에 집어 든 채로 창밖을 바라봅니다. 물론 무언가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창가에 앉아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바라본 창밖은... 마치 무언가 완성되기 이전의 상태처럼, 어쩌면 '소리'조차 만들어지기 이전의 세상처럼, 그리고 세상을 이룰 색은 단지 흰색과 검은색만 남아있는 것처럼, 들리는 것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이 그저 멈춘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 밤이었습니다.






#열일곱자시 #하이쿠 #시 #안개 #봄날 #일상 #순간 #찰나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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