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13일
볕 좋은 네 시
노루와 인사하며
내려오는 길
오랜 시간 숲길을 걷다 보면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시시각각 변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한낮에는 강한 햇빛에 바위마저 눈이 부실 때도 있고, 세차게 바람이 부는 날엔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며 마치 이 숲 속 안에서만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듯 금방금방 해가 뜨고 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가장 기분 좋은 햇살이 쏟아질 때는 해가 뜰 때와 해가 질 때의 볕이지요.
그렇게 어제는 종일 한라산 둘레길을 걷다가 네 시 반을 넘겨 길을 내려왔습니다. 너무 눈부시지도 어둡지도 않은 부드러운 햇살에 나무의 몸통마저 살짝 투명해지는 듯했고, 강아지풀은 하나하나 모두 빛을 내는 것만 같았습니다. 느린 발걸음으로 풀 하나하나 천천히 지나치며 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노루였습니다. 어쩌면 이 친구에게도 볕 쬐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었을까요. 길가에 나온 노루와 마음속으로 인사를 나누며 숲을 내려오던 어제의 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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