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워크 - 살인의 추억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극의 프레임워크를 따 보려 합니다.
프레임워크는 '구조, 뼈대, 붕어빵 틀' 정도로
이해하시면 편할 겁니다.
여기서 따낸 틀을 레퍼런스로 활용해
다른 세계관을 만들어 가는 거죠.
프레임워크를 따내는 데는
영화가 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각적이라 극의 변화를 인식하기도 좋고,
애초에 막과 시퀀스 단위로
이야기가 잘 조직화되어 있거든요.
3막을 토대로 삼는 제 분석법에는
영화만 한 교과서가 없죠.
자꾸 혀가 길어지는 거 보니,
슬슬 걱정이 되나 봅니다.
빈수레를 너무 요란하게 굴린 게 아닌가 하는.
어차피 싸구려 믹스커피를 모토로 잡은 거,
'아님 말고'의 정신으로
무책임하게 밀고가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프레임워크를 따 볼 영화는
올 타임 레전드, '살인의 추억(봉준호)'입니다.
누가 '재미있는 영화 없어?'라고 물으면
언제나 1순위로 추천하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줄거리를 모르시는 분이라면
프레임워크로 극을 구분하는 과정이
잘 와닿지 않을 겁니다.
모르는 영화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아무리 디테일하게 풀어도
전 이해가 잘 안 되더군요.
그래, 2시간 값은 충분히 하는 영화이니
한번 보고 제 분석을 읽어보십사,
제안드려 봅니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3막 이론에서는 보통 극을 다음과 같이 구분합니다.
'1막, 2-1막, (중간점), 2-2막, 3막'
영화로 치면 보통
1막 30분, 2막 60분, 3막 30분으로 구성되죠.
1막에서는 극이 벌어지는 물리적 배경을 설정하고
주인공의 일상을 뒤엎는 사건,
이른바 '도발적 사건'이 일어납니다.
2막은 크게 둘로 분리되는데,
2-1막에서는 도발적 사건에 따른
주인공의 대응이 연쇄적으로 이어져
어떤 잠정적 결과를 맞게 됩니다.
2-1막과 2-2막 사이에는 '중간점'이 놓이는데,
극은 중간점을 기점으로
이야기의 갈등이 한층 '심화'되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거나
새로운 목표가 '설정'되거나 하는 등,
극 전체를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 짓는 변화를 겪죠.
2-2막에서는 중간점에서 일어난 변화를 추구해 가다
결국 클라이맥스로 이어지는 계기를 맞게 되고
3막에서는 극 전체를 아우르는 클라이맥스에 진입,
1막에서 설정한 '도발적 사건'과 연계되어 마무리되죠.
이후 주인공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며
극은 대단원을 맞이합니다.
낯선 설명이 후루룩 지나가니
한눈에 안 들어오시죠?
앞으로 숱하게 반복하게 테니
차츰 익숙해지실 겁니다.
3막의 관점에서 살인의 추억을 분석하자면,
우선 1막에선 살인사건이란 배경을 깐 뒤,
'직관(느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어설픈 지방 경찰들을 드러내죠.
그러다 설정 단계에서 '이성(데이터)'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파견 경찰(김상경)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의 등장이 극 전체의 '도발적 사건' 역할을 합니다.
2-1막에서는 1막에서의 실패로 인해
이성(데이터) 중심 경찰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직관 중심의 경찰과
이성 중심 경찰 간의 갈등이 드러나죠
이후 범인을 특정할 유력한 데이터(노래)를 포착하지만
결국 실마리가 끊기고 맙니다.
그렇게 데이터 수사에도 한계가 드러나며
2-1막은 중간점을 맞습니다.
중간점을 지나며 극은 '전환'을 겪습니다.
2-2막에서는 지금껏 무시당하던 직관의 경찰이
현장에 나타난 용의자를 검거하며
다시 주도권을 잡죠.
하지만 직관은 습관을 반복할 뿐,
제대로 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한편, 이성 중심 경찰은 나름의 추적을 이어가다가
숨겨진 피해자를 발견하게 되고,
이를 통해 직관 중심 경찰의 오류를 집어내죠.
둘 사이의 갈등은 여기서 절정을 이룹니다.
그러다 새로운 사건이 터지며
앞서 놓쳤던 중요한 실마리(노래)가 다시 확인되고,
그 덕분에 가장 유력한 용의자를 특정하는 것으로
2막은 끝을 맞습니다.
3막에선 용의자를 특정했지만
결정적인 증거를 잡지 못한 두 경찰이
묘하게도 서로 간에 심적 전이 현상을 겪게 됩니다.
직관 중심 경찰은 데이터를 중시하게 되고,
이성 중심 경찰은 자신의 직관을 강박적으로 믿게 되죠.
그러다 극의 초반부
직관의 경찰이 본능적으로 찾아냈던,
또한 직관의 어리석음으로 예시되었던
결정적 목격자(최초의 복선)를 깨닫게 되지만,
결국 답을 얻지 못하고 눈앞에서 잃고 맙니다.
이후 마지막으로 보루였던 데이터(정액)마저
모두의 기대를 외면,
어쩔 수 없이 용의자를 놓아주죠.
그렇게 직관과 이성 모두 실패하는 것으로
극은 씁쓸하게 마무리가 됩니다.
워낙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히 엮여있어
세세한 인과관계까진 다루지 않았습니다.
제가 하려는 건 이야기를 표절하려는 게 아니라
이야기의 프레임워크를 따려는 것이라 더 그렇죠.
결국 살인의 추억은
'직관과 이성'이라는 두 가지 인식틀의 충돌이자
콜라보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 중 어떤 것도 홀로 정답이 될 수 없다는
감독의 가치관이 담겨 있죠.
여기에 집중해 프레임워크를 따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가. 1막
- 극 전체 배경, 세계관을 설정하는 사건 발생
- '직관 중심 주인공'의 어리석은 대처 에피소드
. 이게 뒤에서 극 전체를 관통하는 반전이자 핵심 복선 1이 됨
- 도발적 사건 : '이성 중심 주인공'의 등장
- 직관 중심 주인공의 처참한, 우스꽝스러운 실패
나. 2-1막
- 이성 중심 주인공이 직관의 허점들을 파고들며
본격적으로 주도권 장악
. 절정에서 이성을 변화시킬 복선 2 깔기
- 직관과 이성 간에 갈등 표면화
- 직관이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하나 변함없이 어리석음
- 중간점 : 이성이 결정적 해결책에 접근하지만, 결국 좌절
다. 2-2막
- 지금껏 무시당하던 직관이 뜻밖의 주도권을 장악,
직관중심의 해결방식 심화
- 직관의 방식을 불신한 이성은 나름의 추적을 지속,
이를 통해 직관의 허점 파악 및 지적
. 절정에서 이성을 변화시킬 복선 3 깔기
-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채, 직관과 이성의 갈등 격화
- 새로운 사건이 터지며 2-1막 후반에서 주목했던
결정적 해결책 다시 드러남
. 직관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
- 이를 통해 클라이맥스로 이어지는 지점 확보
라. 3막
- 직관은 이성으로, 이성은 직관으로 심적 전이 겪음
- 직관의 가치를 드러낼 복선 1의 전말 드러남
- 이성을 직관으로 완전히 무너뜨릴 사건 발생
. 앞서 배치했던 복선 2, 복선 3의 결과
- 이성의 주인공은 이제 '직관의 화신'이 되어
클라이맥스와 대면
- 직관의 주인공은 이제 '이성으로 진화'하여
데이터를 통해 '직관의 화신'을 제지
- 결국 직관도 이성도 최초의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는
열린 결말로 대단원
. 문제가 해결되는 닫힌 결말로의 응용 가능
어떻습니까?
이야기의 큰 뼈대가 보이시나요?
표절이 아닌 프레임워크를 딴 다는 게 어떤 의미였는지
감이 오시나요?
이렇게 상부의 프레임워크가 만들어지면
다양하게 응용해 볼 수 있습니다.
'직관 대 이성'이라는 개념을 그대로 가져오되
배경이 되는 세계관을 바꾼다던지,
'직관 대 이성'대신 다른 대립하는 두 개념,
예를 들어 '재능 대 노력'이나
'유전자 대 양육' 같은 걸로 바꿔보는 거죠.
예를 들면 학교에서 문제아들을 다루는
선생님들의 가치관 대결이라던지,
야구부에서 전국대회 우승을 위해
어떤 아이들을 등용할 것이냐 등으로
이야기를 다르게 열어갈 수 있을 겁니다.
그에 따라 하부의 에피소드는 싹 바뀌겠죠.
완전히 백지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편하게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을 겁니다.
디테일을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레 작가의 오리지널리티가 형성될거고요.
시험 삼아
위 프레임워크와 나름의 세계관 설정을 넣고
AI에게 이야기를 만들어 달라고 해보시죠.
여러 가지를 변용을 적용시키다 보면,
틀림없이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이야기에 지름길'도' 있습니다.
전 그렇게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