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혹 이런 표현을 들어보신 적 있을까요?
'레퍼런스를 삼는다.'
대중가요, 특히 작곡 분야에서 가끔 언급되는 표현이죠.
표절에 대해 대중의 반응이 민감해지자,
표절의 법적 한계를 건드리진 않으면서도
히트한 원곡의 분위기는 은근슬쩍 가져오는
작곡 타짜들의 '고급 기술'입니다.
티 안 나게 원곡의 리듬 파트만 따온다든지,
코드진행을 그대로 가져오되
조를 바꾸고 멜로디는 다르게 가져간다던지,
코드진행을 부분적으로 변경하되
악기 편성을 완전히 다르게 가져간다던지 함으로써,
얼핏 듣기에는 전혀 다른 곡처럼 보이도록 하는 게
레퍼런스를 활용한 작곡이죠.
말 그대로 원곡을 '참고'하는 겁니다.
흥행성이 검증된 원곡을 활용하는 거라
생소한 곡을 내놓는 것보다
대중에게 어필할 가능성이 훨씬 높기에,
대중가요 분야에서는
실제로 많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게 어떤 느낌인지
구체적인 곡을 들어 알려드리고 싶지만,
어디서 또 쌍심지를 켠 채 달려들지 몰라
함부로 말을 못 꺼내겠네요.
그걸 폭로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은 아닌 만큼,
나머진 AI에게 물어보시라
무책임하게 답변드려 봅니다.
훌륭한 예술가는 모방하지만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Pablo Picasso
레퍼런스라는 개념을 알게 된 뒤로
그런 궁금증을 갖게 되었습니다.
원곡을 레퍼런스 삼아 작곡하는
이 '영악한' 창작법을
스토리 창작에 활용할 수는 없을까?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건
창작자에게 있어 엄청난 고통이고
또한 관객에게는 '적응의 허들'을 넘어야 하는
달갑지 않은 과정인데,
굳이 모든 이야기가
반드시 허허벌판에서부터 시작되어야만 하나?
매일매일 수 백가지 새로운 이야기가
미친 듯이 쏟아지는
이 제자백가의 시대에?
그래 '거인의 어깨에서 내려본다'는
거창한 변명을 앞세워,
여기저기 안테나를 돌려봤습니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아니나 다를까
저와 비슷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많더군요.
영웅 서사 구조,
픽사의 스토리텔링 프레임워크,
또는 3막 구조로 극을 해체하고 분석하려는 시도가,
명작을 레퍼런스로 응용하려는 시도와
맥을 같이 하더군요.
특히 소설, 영화, 드라마를 포함해
요즘 소개되는 대부분의 극들이
전형적인 3막 구조를 뼈대삼아 제작된다는 사실에
꽤나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기본적인 구조도 모른 채
단순히 갈등에 갈등을 잇는 것만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질 거라 믿었던 제가,
어리석게 느껴지더군요.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라는
학생 시절 배웠던 모호한 틀에 의지한 채 말이죠.
그렇게 이야기의 구조라는 걸 인식하게 되자,
공대생 본능이 꿈틀대며
자연스레 다음 스텝이 떠올랐습니다.
'명작의 프레임워크를 따자!'
작품이 3막이라는 큰 틀 위에
어떤 식으로 플롯을 배치했는지를 분석해,
그 '플롯의 흐름'을 하나의 틀로 활용하자!
마치 명곡의 코드 흐름을 가져와서,
그 위에 새로운 멜로디를 얻는
레퍼런스의 방식처럼!
만약 검증된 명작의 프레임워크를 가져와
그 위에 전혀 다른 '멜로디(세계관)'를 얹을 수 있다면,
홀로 낯선 세계와 인물과 갈등을 구상해 내는 것보다
훨씬 경쟁력 있는 스토리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영화 '세븐'의 3막 구조와 플롯의 흐름을 가져와
이를 학원물이란 설정 위에서 풀어놓는다면,
혼자서 가상의 세계를 만드느라 아등바등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새롭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지 않겠냐는 겁니다.
그런 확신 아닌 확신 속에서,
제가 생각하는 이른바 '갓띵작'들을 분석했습니다.
이야기를 시퀀스 단위로 묶고
시퀀스와 시퀀스가 어떤 관계로 엮이는지
꼼꼼히 따져봤습니다.
3막이란 틀을 배경에 깔아놓고
그 위에 어떤 식으로 플롯을 배치했는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보니,
정말로 보이더군요.
프레임워크가 말입니다.
심지어 관객일 땐 보지 못했던
작가의, 감독의 숨겨진 의도까지 말입니다.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을 투자해
20편의 국내외 히트작을 분석했습니다.
덕분에 극이란 게 무엇인지
이야기는 어떻게 써야 되는지,
더 분명히 이해하게 됐습니다.
검증된 프레임워크라는 선물은
물론이고요.
앞으로 이어지는 글에선
이들에 관해 하나씩 이야기 나눠볼까 합니다.
애초에 이에 대한 자신감으로
이 브런치북을 시작한 것이기도 합니다.
당연하게도 정답은 아닐 겁니다.
세세하게 다 보여드릴 수도 없을 겁니다.
사람마다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다른만큼,
극을 이해하는 정도도 다를 테니까요.
하지만 분명 도움을 될 겁니다.
에피소드에서 구조로 확장돼 가는
전형적, 귀납적인 이해 방식에서 탈피해,
구조에서 에피소드로 좁혀나가는
이색적, 연역적 이해 방식을 취해 볼 거거든요.
그렇게 일상과 다른 방식으로
극을 바라보는 경험만으로도,
작가의 도구함은
보다 풍성해질 겁니다.
창작에 '지름길'은 있습니다.
전 그렇게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