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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질하듯 쓰기

글쓰기

by 무딘

거창하게 뭔가 써볼 거라고

단단히 마음먹었던 어제와는 다르게,

이것저것 찔러보기만 할 뿐,

몇 시간째 글을 잇지 못했습니다.


출발점을 찾지 못한 펜은

이런저런 공상 속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네요.

제 주인의 모습을 쏙 빼다 박았군요.


그런 생각은 듭니다.

글쓰기라는 게

대단히 독립적, 정신적 작업인지라

한 사람이 가진 정수(essence)를 쏟아붓기 마련인데,

들인 정성에 비해

잊히는 과정은

허무할 정도로 짧다는 생각 말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이야기를

너무나 빠르게 뱉어내는 시대이기에,

무관심의 비율은 높고

작가가 느끼는 절망은

깊죠.


내 글도 곧

저 쓰레기 더미 속에 묻히고 말 거라는 상상은

작가로 하여금

절필의 유혹에 시달리게 만듭니다.


이걸 써서 뭐 해,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요새 누가 글을 읽어,

지레 포기하게 하고

지레 도망치게 만들죠.


뭐, 실제로 뚫어야 할 바늘구멍이

나노미터 단위로 좁아지기도 했고요.


한국 사회는 '창의 혁명'이 아니라 '스케일 업(scale up)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 서울대 산업공학과 이정동 교수


최근에 '스케일업'을 주창했던

이정동 교수의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한국 산업의 본질적인 문제는

창의력의 부족이 아니라

개념설계 역량의 부족이다.

개념설계 역량은 실패를 반복하며 쌓아가는

스케일업 과정이 필수인데

우리 사회는 그런 시간을 인내하지 못했다'는 게

그의 주된 주장이었죠.


산업이야 제 관심분야가 아니니까 논외로 하고,

스케일업에 관한 그의 주장을 들으며

글쓰기에도 비슷한 과정이 필요하겠구나 싶었습니다.


정성을 다해 글을 만들어 올려봐야

특별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외면당하거나

무시당할 가능성이 압도적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갈증은 언제나 깊고

대중이 열광하는 이야기가

하늘에 뚝 떨어지는 게 아니므로,

결국엔 실패를 계단 삼아

한 단계 한 단계 글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수밖에 없겠다 싶습니다.

내 글쓰기를,

내 이야기를

스케일업 해가는 거죠.

그러다 보면 깍쟁이 뮤즈도

한 번쯤 내 어깨 위에 앉아주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실패의 두려움을 짊어진 채

외면의 고통을 기어코 견뎌낸 글 만이,

'새로운 이야기'란 황홀경에

끝끝내 닿을 수 있는거라 믿습니다.


그런 면에서 글쟁이로 유명해진다는 건

유화를 그리는 일과도 비슷하다 싶습니다.


붓이 한번 지나면 색이 살아나고

또 한 번 지나면 윤곽이 도드라지지 않습니까.

수천 번의 붓질이 더해지고 덧대져야

비로소 산이 높게 솟고

들판이 넓게 펼쳐지고

강물이 힘차게 튀어 오르지 않습니까.


한 붓으로 완성되는 그림은 없는 것처럼

수백 번의 붓질을 반복하듯

수많은 실패작을 써내려 가다 보면

언젠가 내 글도 하나의 작품으로써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서게 될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한 번은,

인생에 단 한 번쯤은 말입니다.


평범한 관계 속에서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야 하는

저 같은 장삼이사에게는

그게


위로가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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