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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작가를 먹고 자란다.

이야기

by 무딘

최근에 '탁류'라는 드라마를 봤습니다.

15년 전 '추노'를 썼던 작가가

인생굴곡을 돌고 돌아 어렵게 다시 잡은 사극이라 그런가

모처럼 '드라마 불감증'을 깨주더군요.


경강(한강)의 하역권을 두고

왈패(깡패)들이 벌였던 권력 다툼을 소재로,

중반부까지는 이야기가 힘 있게 뻗어 나갔습니다.

역시 작가에게는

맞춤옷 같은 장르가 따로 있구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체 플롯의 중간점을 지나며

이야기의 방향이 왈패들 간의 패권다툼이 아닌,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동인과 서인의 이권다툼 쪽에 무게가 실리며

극 초반의 신선함이 묽어져 버렸습니다.


극의 깊이를 더하려는

작가의 의도였겠지만,

차라리 왈패 세계의 평정 쪽으로 이야기가 뻗었다면

막 잡은 활어 같은 '날 것'의 느낌이

더 살아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흥미진진한 초반에 비해

마무리가 아쉽다는 후기들이 많았습니다.


뭐, 거기까진 그럴 수 있는데,

'중간까지 잘 만들고 이따위로 초를 치냐',

'스토리를 이렇게 전개하는 게 개어의 없네',

'마지막이 워낙 날림이라 시즌2는 기대도 안된다'는 등,

글 한편, 이야기 하나 써본 적 없는 인간들이

남이 애지중지하며 만든 이야기를

떨어진 과자 마냥 무참히 짓밟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않더군요.

제작진이나 작가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없이 말이죠.


워낙에 공짜 이야기가 넘쳐나는 세상을 살다 보니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발에 차이는 돌처럼

하찮게들 여겨지나 봅니다.


일상의 행복을 발견하는 능력과 특별한 성과를 내는 능력은 이율배반적이다.
- 미국의 사상가 랄프 애머슨

최근에 스토리 구상만 3개월,

완성까지 총 7개월이 걸린

웹소설을 한 편 완결했습니다.

(브런치에서는 뒤늦게 연재하고 있습니다.)

처참했던 결과는 실력의 문제니 논외로 하고,

그렇게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해 보니

정확히 알겠습니다.


글쓰기는 단순히 시간만 소모하는 게 아니더군요.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동안

작가의 삶 자체가

이야기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가더군요.


이야기는 작가의 인생을 먹고 자라나는 '괴물'이더군요.


남들 다 그러듯

남이 차려놓음 음식에

감 놔라 배 놔라 투덜대며 편하게 살 수 있지만,

굳이 스스로를 이야기라는 감옥 안에 가둔 채

자신의 인생을 먹처럼 갈아

그 잿가루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게

작가의 운명이더군요.


그래서 일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능력과

특별한 성과를 내는 능력은

이율배반적이라고 말하나 봅니다.

그래서 하나의 이야기는

작가가 소모해 버린

자신의 인생일 수밖에 없나 봅니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이야기는 많지 않지만,

무의미한 이야기는 없다고 믿습니다.

이야기 하나하나가

작가가 소모한 자신의 인생이니까요.


그래 건전한 비판은 용인할 수 있겠지만

경멸의 눈빛 만은 삼가했으면 좋겠습니다.

평범한 이야기를 비난하는 일은

작가가 쏟아낸 인생을 비난하는 일이요,

타인의 인생을 무책임하게 비난하는 일은

곧 자신의 평범한 인생을 욕보이는 일과

다를 바 없을 테니까요.


같은 맥락에서

살며 마주치는 명작들이 더더욱 귀하게 느껴진답니다.


쇼생크 탈출, 다크 나이트, 세븐,

공동경비구역,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추격자, 1987,

슬램덩크, 베가본드, 나루토, 드래곤볼,

응답하라 1988, 나의 아저씨, 도깨비 등등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를 느끼게 하는 이야기를 만들고자,

작가들은 얼마만큼 많이

자신의 삶을 소모해야 했을까요.

그들이 희생한 일상의 행복 덕분에

지극히 평범한 우리에게도

이처럼 특별한 즐거움이 허락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언젠가 우연히 찾아올 명작들을 위해서라도

비난은 아끼고

격려는 늘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뿌린 격려의 씨앗이

누군가의 가슴에서

또 다른 명작으로 잉태될 테니까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법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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