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 게으른 조각

by 무딘

뒤로 물러서며 손가락을 ‘딱’ 튕기는 몽마.


그러자 그의 등 뒤로 일군의 무리들이 주르륵 늘어섰다.


8명의 제우스, 8명의 아테나, 8명의 포세이돈과, 8명의 하데스, 그리고 8마리의 삼두견이었다.

빙결로 제압했던 ‘세계의 저항’들이 다시 두 배로 늘어나 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머리는 좀 나빠도 에테르는 쓸만한 것 같으니. 자, 맛있게들 먹으라고. 하하하”


몽마가 웃으며 하늘로 부웅 날아오르자, 기다렸다는 듯 8명의 포세이돈이 일제히 리를 향해 삼지창을 던졌다.

동시에 일렬로 늘어선 아테나 무리가 방패를 앞세운 채 무섭게 달려들었다.


“리! 또 온다!”

“중력벽!”


리가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 허공을 주욱 문지르자, 리의 앞으로 침대 매트 같은 투명한 공기벽이 쭈르륵 생겼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온 삼지창들이 중력벽에 ‘촤자작!’ 박혔다.

하지만 중앙으로 날아온 창 하나가 벽을 관통하더니 리의 장딴지를 스쳤다.


“크흑!”


다리가 꺾이며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는 리.

그러다 달려드는 아테나 무리를 보곤, 땅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주문을 외웠다.


“토류장천!”


순간, 아테나 무리의 발밑으로 뾰족한 흙기둥이 쭈르륵 튀어나왔다.

허나 이미 예상했다는 듯, 아테나 무리는 일제히 방패를 아래쪽으로 돌려 흙기둥을 막았다.

그러자 뒤에서 함께 뛰어오던 8마리의 삼두견들이 아테나의 어깨를 밟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컹컹!’


뛰어오른 삼두견들이 일제히 입을 벌리더니 리를 향해 화염구를 쐈다.

24개의 화염구가 순식간에 눈앞을 뒤덮었다.

뒤질세라, 흙기둥을 넘어선 아테나들이 나란히 창을 앞세워 리를 향해 돌진했다.


“아아, 너무, 너무 많아.”


더 이상의 공격을 지켜볼 수 없었던 비토가, 리의 스카프 속으로 쏙 숨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를 깨무는 리.

허벅지에서 울컥 피가 쏟아졌다.


“천압만장(天壓輓章)!”


리가 양팔을 펼친 채 주문을 외우자, 리의 앞으로 빌딩 크기의 거대한 공기 덩어리가 나타났다.

리가 공기 덩어리를 앞으로 쭉 밀자, 삼두견과 아테나 무리가 통째로 공기 덩어리에 갇혀 버렸다.

마치 투명한 젤리 속에 갇힌 과일 조각들처럼. 천압만장이 일으킨 바람에 날아오던 화염구들은 경로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전검(電劍)!”


이어 리가 방망이를 쥐듯 양손을 모은 채 하늘로 치켜들자, ‘쩌저적!’ 번개가 리의 두 손 위로 내리쳤다.

내리친 번개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커다란 장검으로 변했다.


전검을 보며 눈을 반짝거린 리는 그대로 천압만장에 갇힌 무리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긴 검이 번개를 일으키며 단번에 그들의 몸뚱이를 배었다.

검이 빠르게 지나간 자리 Z자 검흔이 남아 지직거렸다.


‘크아아악!’


전검에 배인 아테나와 삼두견 무리가 순식간에 세 동강으로 잘리며 비명을 질렀다.

천압만장이 사라지자 잘린 그들의 몸뚱이가 ‘우수수’ 바닥에 떨어졌다.


전검을 한 손에 든 채, 리가 이번엔 다른 손을 허공에 한 바퀴 돌렸다.

그러자 왼손에 몸의 절반을 가리는 길쭉한 방패가 만들어졌다.

방패 또한 번개로 번쩍거렸다.


“자, 올 테면 와봐!”


전검과 방패를 부딪히며 리가 다른 무리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리의 사자후가 쩌렁쩌렁 해변에 울려 퍼졌다.

그 기세에, 제우스와 하데스 무리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와, 대박. 리, 번개검도 만들 수 있었어?”


스카프 속에서 비토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감탄했다.


“몰라,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내뱉는 건데, 이게 다 되네. 대사제의 수정 때문인가 봐.”


방패를 치켜든 채 제우스 무리를 쏘아보는 리.

다시 한번 방패와 전검을 ‘쾅쾅’ 부딪혔다.

부딪힐 때마다 번개가 지직거리며 튀었다.


“오발탄이 죽었으니, 더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 또 두 배로 불어나기 전에 어서 여기를 뜨자.”


리가 슬슬 뒷걸음질 치며, 바닥에 널브러진 오발탄의 시체를 곁눈질했다.

마물로 변한 채 두 동강 난 그의 모습에, 콧잔등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스파이의 최후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리.


그 순간, 갑자기 ‘휭’ 바람이 불더니 리의 앞으로 몽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리를 등지고 선 몽마는 보라색 장검을 반대편을 향해 뽑아 들고 있었다.

꼭 뭐라도 배고 지나온 모양새였다.


“쯧쯧쯧, 정말 귀찮은 녀석이구만.”

“리! 배! 배가!”


비토의 비명에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는 리.

멀쩡했던 옷에 가로로 쭈르륵 줄이 가더니 검붉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이어 눈을 뜰 수도 없을 정도의 엄청난 통증이 밀려들었다.


“으아악!.”


복부를 부여잡은 채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는 리.

애벌레처럼 몸을 웅크린 채, 고통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배꼽부터 잘려 벌어진 배에서 뜨거운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등 뒤의 작은 태양은, 수명을 다한 전구처럼 몇 차례 깜빡거리다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거참, 이 정도로 중력을 높여도, 다리 하나를 없애 불구를 만들어도 이렇게까지 날뛰다니. 기세만큼 대단하구만, 대단해. 소심쟁이 마경이 당했을 만 해.”


몽마가 혼잣말을 하며 리를 곁으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발로 리를 밀어 대자로 엎드리게 만들었다.


그리곤 하늘을 보더니 검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중력벽에 박혀있던 포세이돈의 삼지창들이 우르르 날아와 리의 사지에 꽂혔다.

마치 바닥에 고정하려는 듯, 손목과 발목, 허리와 목에 그대로 박혔다.


“크허헉.”


바닥에 엎드린 채 입에서 울컥 피를 토해내는 리.

리의 온몸에서 빠져나온 피가 모래를 붉게 물들였다.


“리!”


비토가 쓰러진 리의 얼굴 곁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며 ‘흥’ 콧방귀를 뀐 몽마가, 보라색 검을 거꾸로 잡더니 리의 등 한가운데, 심장을 향해 내리꽂았다.


“마제님도 이상하시지. 이런 놈이 뭐라고 굳이...”


몽마가 장검을 빠르게 뽑아 들자, 리의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컹컹! 컹컹!’ 어느새 16마리로 불어난 삼두견들이 어서 먹이를 달라는 듯 짖어댔다.


“그래, 이제 진짜 끝내자. 먹어라!”


삼두견 무리에게 고갯짓으로 신호를 보낸 몽마가, 다시 하늘로 훅 날아올랐다.

그러자 16마리의 삼두견들이 침을 뚝뚝 흘려가며 일제히 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곤 세렝게티의 하이에나 떼처럼 리의 몸 곳곳을 게걸스럽게 뜯어먹었다.


‘컹! 크르르 컹!’


그 모습을 보고 흥미를 잃었다는 듯, 다른 그리스 신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삼두견들에게 물어뜯긴 리의 몸뚱이가 순식간에 걸레 조각처럼 흐느적거렸다.


“리... 이렇게는, 이렇게는 싫어.”


눈물을 흘리는 비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리의 시야가 완전히 흐려졌다.

‘너라도 도망쳐’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조금도 움직여지질 않았다.


“뭐라도, 뭐라도 해봐 리. 여기 거기잖아. 오발탄의 테이블에서 봤던 곳. 여기도 있을 거 아냐. 리가 변신할 수 있는 거. 뭐라도, 뭐라도 해보라고. 흑흑흑.”


물어뜯겨 광대뼈가 훤히 드러난 리의 얼굴 옆에서, 비토가 울먹거리며 속삭였다.


‘오발탄의 책상. 그래 거기서 봤었지, 그리스 해안. 이 모래사장. 근데 여기 뭐가 있었더라...’


의식이 점점 아득해지더니, 비토의 목소리가 더는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흐리멍덩해졌다.


‘이제, 정말 끝인가...’


*


“정신 줄 꽉 잡아!”


벼락같은 호통에 눈을 번쩍 뜨는 리.

순간, 자신의 손에 매달린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얼른 시선을 돌려보니 다시 우물 안, 리까지 우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어, 어떻게 여길?”


양쪽 발에 잔뜩 힘을 주며 더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버티는 리.


“네 이놈! 안 도와주고 뭐 하는 거야!”


다시 쩌렁쩌렁한 호통 소리가 들렸다.

리가 힘겹게 고개만 들어 위를 올려다보자, 우물 곁을 지나쳐 가는 대머리 노인의 모습이 살짝 보였다.

옆모습이긴 했지만 분명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안 구하고 뭐 해! 이 게으른 자식.”

“그렇게 돕고 싶으면 본인이 하시던가.”


아마도 대머리 노인이 벤치에 앉은 ‘사슴뿔의 남자’에게 뭐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싸우지 말고 누구라도 도와줘요! 제발!”


리가 고함을 질렀지만, 아무도 대꾸해 주지 않았다.


“네가 해야 한다는 거 알면서, 게으름 피울래!”

“왜 이래, 다 알만한 사람이. 도와줘 봐야, 나한테 이득 될 거 하나 없잖아. 난 이대로 좋다고. 자유롭게.”

“이게 정말 자유로운 거야? 마장군 때문에 죽은 듯 숨어 있는 게?”

“...”


두 사람이 말싸움하는 사이, 리의 몸이 점점 더 우물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이는 어린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아니 갈수록 더 무거워졌다.


“이봐! 빨리, 빨리 좀 도와 달라고!”


리의 말을 듣는지 못 듣는지, 두 사람의 말싸움 소리만이 요란하게 우물 안을 메아리쳤다.


“싫어, 또 누군가의 욕심에 이용당하는 거. 명분 싸움 따위 정말 지긋지긋하다고. 그러느니 이렇게 있는 게 나아.”

“아니야, 이번엔 달라, 다르다고.”

“달라? 아직도 이렇게 순진하다니, 그걸 어떻게 믿어?”

“봐봐, 저 녀석을. 아이 하나 구하겠다고 저렇게 버둥거리고 있잖아!”


그 순간, 리의 몸 쪽 둔덕이 한 번 더 무너지며 리가 우물 안으로 ‘쑤우욱’ 빨려 들어갔다.

‘으악!’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는 리.


‘끝이구나’ 생각하는데, 떨어지다 말고 리의 몸이 덜컥 멈췄다.

무언가가 리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었다.

거꾸로 매달린 채 우물 입구를 보자, 자신의 발을 붙잡고 있는 검은 실루엣이 보였다.

실루엣의 머리 위로 사슴뿔 같은 게 보였다.


“야이 멍청아! 그냥 손을 놓으면 되잖아! 그러다가 너까지 죽는 거 몰라?”

“어떻게 그래요, 아이가 살아있는데! 그럼 구해야지, 도와줘야지!”

“우와아앙!”


순간 기절했다가 정신이라도 든 듯, 조용했던 아이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리의 발목 붙잡은 채, ‘사슴뿔의 실루엣’이 물끄러미 리를 내려다봤다.

잠시 뒤 그의 뒤쪽으로 또 다른 실루엣이 스윽 몸을 내밀었다.

이번엔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믿어보자고 우리. 이 이상한 녀석을.”

“...”


그때, 아이의 몸무게가 갑자기 엄청나게 무거워지며 아이의 발목이 리의 손에서 점점 빠져나갔다.

이젠 손아귀 힘이 다 빠져 다시 움켜쥘 수조차 없었다.


“이봐! 어서 당겨! 아이가 빠진다고! 어서!”

“어쩌다 이런 물건이 들어왔을고...”

“제발, 당기라고!”


아이의 발목이 리의 손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갑자기 익숙한 음정의 주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보르디름, 아카사이레. 보르디름 아카사이레!”


그러자, 리를 둘러싼 우물 속 공간이 갑자기 폭발하듯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그 강렬한 빛에 리가 눈을 감았다.


*


“보르디름, 아카사이레.”


삼두견에 온몸이 뜯겨 갈비뼈가 훤히 드러난 리가, 절반만 남은 입술을 들썩거리며 속삭였다.

더는 먹을 게 없어 떠나가던 삼두견 두 마리가, 리의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봤다.


“쏴아아아아!”


그 순간, 모래사장과 맞닿은 바다가 홍해 갈라지듯 좌우로 쫘악 갈라졌다.

그 아래로 V자 형태의 거대한 해안 지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V자 지형 바닥에 엄청난 크기의 생물이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는데, 커다란 물고기 비늘로 뒤덮인 게 마치 거대한 뱀장어나, 아나콘다처럼 보였다.


“응?”


자신의 아지트로 날아가던 몽마가 강렬한 에테르를 느끼고는 뒤를 돌아봤다.

갈라진 바다 사이에서 사슴뿔을 머리에 단 뭔가가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용이었다.

붉은 비늘로 온몸이 뒤덮인.


하늘로 날아오른 용은 한 바퀴 ‘빙글’ 돌더니, 해변에 쓰러진 리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했다.


“아, 거기 있었어? 꼭꼭 잘도 숨어있더니만, 웬일로 직접 나타나셨데. 드디어 죽고 싶어진 건가? 하하하”


몽마가 웃으며 손가락을 ‘따악’ 튕기자 멀어져 가던 제우스 무리가 돌아서더니 일제히 용을 향해 번개를 내리쳤다.


‘쩌저저적 쿠쿵!’


8명의 제우스가 쏜 번개가 용의 머리부터 몸통까지 쭈르륵 내리 꽂히려는 순간, 용의 몸이 미세한 정육면체로 산산이 부서졌다.

타깃을 잃은 제우스의 번개가 조각들을 관통해 모래사장에 내리 꽂혔다.


부서진 용의 조각들은 붉은 연기처럼 훅 퍼지더니, 바닥에 쓰러진 리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곤 모습조차 보이지 않도록 리를 완전히 뒤덮었다.


“크르르, 컹컹!”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삼두견 두 마리가 겁 없이 연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떼에에에에엥!’


그 순간, 맑고 투명한 종소리가 해안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 강렬한 종소리에 해안의 온갖 소리들이 일제히 파묻혔다.


위기감을 느낀 그리스 신들이, 리를 둘러싼 붉은 연기를 향해 하나 둘 다시 모여들었다.

창과 방패를 뽑아 든 게 언제든 달려들 기세였다.


“컹컹, 컹컹!”


남아있는 삼두견들이 이빨을 번뜩이며 짖어대는 순간,

붉은 연기가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듯 한 점으로 훅 빨려 들어가며 연기 안쪽의 모습이 드러났다.


공중에 뼈다귀만 남은 채 멈춰있는 삼두견 너머로,

꼭 석유처럼 반짝거리는 새까만 옷을 입은 남자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가슴 한가운데 붉은 태양이 박혀있는 남자의 몸은,

마치 검은색 불길 그 자체 인양 어깨와 팔에서 검은 화염을 이글거렸다.


또 태양으로부터 금색 고리 문양이 뻗어 나와 팔과 다리로 이어졌고,

동시에 그의 머리카락과도 연결되며 붉은색 머리에 금색 브리지를 만들었다.

브리지는 꼭 용의 뿔처럼 보였다.


“컹!”


사내의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삼두견 무리가 우르르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다가오던 아테나 무리도 일제히 남자에게 방패를 던졌다.


그때, 남자가 심호흡을 멈추더니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곤 왼손을 앞으로 뻗으며 주문을 외웠다.


“퀘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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