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 어려운 선택

by 무딘

“빙결(氷潔)!”


리가 손가락을 교차해 가슴 앞에 모으며 외쳤다.

그러자 리 주위를 돌던 방어석이 머리 위로 올라서더니 ‘파박!’ 소리를 내며 터졌다.


“6!”


폭발과 동시에 새하얀 안개가, 폭발하듯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안개에 닿는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하얗게 얼어붙었다.

삼두견도, 제우스의 번개도, 아테나의 창도, 포세이돈의 검기도, 모두 그 자리에서 하얗게 얼어붙었다.


물질뿐이 아니었다.

안개에 닿는 모래사장도, 파도도, 심지어 먼지까지 순식간에 눈송이처럼 얼어붙었다.

안개를 보고 신들이 뒤늦게 몸을 빼려 했지만, 변화를 눈치챈 순간 이미 그들의 몸은 얼어버린 뒤였다.


“와우, 4초!”


몽마의 외침에 언덕 위를 바라보는 리.

거리가 좀 멀어 그랬는지, 망치 거한은 신발 앞쪽만 살짝 얼어 있었다.


리가 그를 보더니, 갑자기 오른쪽 팔을 뒤로 뺐다.

그런 뒤 마치 창 던지기 하듯 팔을 앞으로 휙 휘둘렀다.

그러자 노란 번개가 창 모양으로 빠지직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번쩍’하고 날아가 망치 거한의 목을 꿰뚫었다.


‘크허헉!’


망치를 떨어뜨린 채 자신의 목을 붙잡고 비틀거리는 거한. 이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모래사장에 처박혔다.


“3초!”


거한이 모래사장으로 떨어지자마자, 절벽 위에 떠 있던 시계가 흐릿해지더니, ‘2초’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짝짝짝짝!’ 리의 성공을 축하한다는 듯, 몽마가 박수를 쳤다.


“와우, 성공이야, 성공! 대박 아슬아슬했다고. 하하하.”


하얗게 얼어버린 주변을 잠시 둘러보는 리.

그러다 자신의 두 손을 바라봤다.

마치 냉동고 속처럼 하얀 서리 같은 게 자신의 두 손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이런 것도 할 수 있었다니...”


리가 오른손을 쫙 펼친 채 살짝 회전시키자, 이번엔 손 위에 작은 불덩이가 만들어졌다.

불덩이에 닿자 흩날리던 서리들이 ‘파바박’ 거리며 스파크를 일으켰다.


‘번개가 전자기력의 전부는 아니에요. 전자기력의 본질은 조합하는 힘입니다. 어떻게 조합하냐에 따라 얼마든지 물성(物性)을 변형할 수 있죠.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미리 녹음이라도 해놓은 듯, 대사제의 차분한 설명이 귓가를 맴돌았다.

신기한 듯 리가 양손을 모았다 떼자, 이번엔 미세한 번개가 리의 손 사이를 빠르게 오고 갔다.


‘풍덩!’


그때, 뭔가가 바다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차차!’ 정신이 든 리가 얼른 오발탄 쪽을 돌아봤다.

돌조각들이 부서져 떨어지는 외길 끝에서, 오발탄이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흔들거리고 있었다.


“어라, 곧 떨어지겠는데.”


몽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발탄의 곁으로 단숨에 이동하는 리.

오발탄의 머리 위에 둥둥 뜬 채, 그를 묶은 쇠사슬을 움켜쥐었다.

천으로 입까지 막은 오발탄이 눈을 껌뻑거리며 리를 올려다봤다.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니, 얼른 떨어지길 바란다는 듯 바닷속에서 거대한 물고기가 이빨을 철컥거리고 있었다.


“자, 그럼 약속대로 이 자는 내가 데려간다. 이의 없겠지?”


리가 몽마에게 전음으로 말한 뒤, 쇠사슬을 끊으려 손날을 모았다.

그리곤 끊기 좋게 몸 쪽으로 잡아당기는데, 오발탄에게 쇠사슬 말고 ‘파란색 반투명 줄’이 하나 더 감겨있는 게 보였다.

꼭 굵은 낚싯줄 같은.


“뭐지, 이건?”


고개를 들어 눈으로 줄을 따라가 보니, 하늘 중간에 박힌 커다란 도르래에 줄이 걸려 있었다.

멀리 있을 때는 구름으로 착각했을 하얀색 도르래였다.


도르래의 반대편으로도 반투명 줄이 길게 이어져 거대한 삼각형을 이뤘는데, 반대편 줄 끝에 몽마가 있었다.


“이봐, 이거, 이 파란 줄은 뭐지?”

“하하하하! 봤니? 이제야 본 거니?”


몽마가 또다시 비열하게 웃으며 오른팔을 휘두르자, 선과 도르래의 모습이 선명하게 바뀌었다.

몽마 쪽의 선은 몽마 옆, 길쭉한 유리 상자와 이어져 있었다.


뭐가 들어있나, 리가 인상을 쓰고 들여다보자 유리상자 윗부분에 낯익은 형체가 보였다.

오뚝이처럼 배가 불룩 튀어나온 짧은 팔의 토끼. 그것은 비토였다.


“비... 토?”


잘 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보는 리.

틀림없는 비토가 맞았다.

오발탄처럼 재갈을 물린 비토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파란 줄에 묶여있었다.

유리 상자의 아래쪽에는 보라색 화염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짜란! 그럼 두 번째 게임을 시작해 볼까! 내심 이걸 못 해보고 끝나면 어떡하나 걱정했잖아. 하하하하!”


‘나는 정령이라 내가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만 보여야 하거든...’


순간, 비토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정령이라 다른 사람의 눈엔 안 보인다더니, 갑자기 왜 저기에 있는 건지.

짧은 순간 리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게임 한 번 했다고 그냥 줘버리면, 그래도 명색이 마장군인데 내 영(令)이 안 서잖아. 이것도 통과하면 두말 않고 오발탄을 주지. 자, 이건 더 간단한 게임이야. 그냥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기만 하면 돼. 그 줄을 끊고 오발탄을 데려가거나, 아니면 여기 이 줄을 끊고 네 토끼를 데려가거나.”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리.

둥그런 도르래 양쪽으로 파란 줄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보시다시피, 양쪽이 도르래에 단단히 묶여 있거든. 한쪽이 끊어지면, 다른 쪽은 반드시 떨어지게 되지. 이쪽을 끊으면 오발탄은 물고기 디저트가 될 테고, 그쪽을 끊으면 이 불쌍한 토끼는 화염에 불타 사라질 거야. 하하하. 분열계에서 훔쳐 온 화염이 이렇게 요긴할 줄이야. 하하하”


또다시 해안이 떠나가라 웃어대는 몽마. 그의 웃음소리에 얼어붙었던 해변이 균열을 일으키며 조금씩 부서졌다.


“니가 이곳에 들어와서 요 토끼 녀석과 떠들어대는 걸 보고, 딱 아이디어가 떠오르더라고. 아, 둘을 매달면 재미있겠구나. 햐, 내가 봐도 난 참 기발하단 말이야. 하하하하. 자 어떡할 거냐? 누굴 구할 거야?”


‘쿠구구궁’


그때, 지진소리와 함께 오발탄이 매달려 있던 외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리가 얼른 오발탄이 묶인 쇠사슬을 붙잡아 잘라냈다.


“자, 이번엔 짧고 굵게 즐겨보자고.”


몽마가 하늘을 향해 다시 손가락을 들었다.

그러자, 사라졌던 카운터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엔 불과 5초에 불과했다.


“자, 5초면 충분하지? 시간이 다 지나도 선택 안 하면, 동시에 끊어질 거야. 그럼 틀림없이 다 죽겠지? 하하하하. 시작!”


몽마가 시작을 외치자마자, 때마침 얼어붙었던 제우스의 번개가 녹으며 ‘쩌적 쿵’ 굉음을 냈다.

마치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 같았다.


“아니, 거기까지 가는 데도 2초는 걸릴 텐데...”

“4!”


함정에 빠졌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이미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누구를 구하지? 누구를 구하지? 순간 걱정스러워하는 유니와 일권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3!”


함께 오발탄의 집을 수색하고, 천계를 종횡무진 날아다니던 비토의 얼굴도 눈앞을 스쳤다.

뿅망치를 들고 스모커를 향해 열폭하던 그의 모습도 겹쳐졌다.

누구를 구하지? 누구를 구하지? 비토? 오발탄?


“2!”


어떡하지? 어떡하지? 머리가 깨질 듯 아파오는 순간, 또다시 엄청난 양의 사진들이 빠르게 리의 눈앞을 스쳐갔다.


각 사진엔 이름 모를 영웅들이 다양한 기술을 쓰는 장면이 담겨있었다.

그러다 양팔을 하늘로 치켜든 남자의 사진에서, 리의 눈빛이 ‘번쩍’하고 빛났다.


“1! 끝이구나!”

“중력역전(重力逆轉)!”


그때, 리가 두 팔을 하늘 위로 치켜들며 외쳤다.

그러자 중력이 마치 거꾸로 작용하는 듯, 대지의 모든 것들이 일제히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해변의 돌덩이도, 지나다니던 게도,

하늘을 날아다니던 새들도,

담장 위 졸던 고양이도,

파도 속의 물고기도 일제히 하늘로 붕 떠올랐다.


“0!”


‘티팅!’ 소리와 함께 오발탄과 비토를 묶던 파란 줄이 동시에 끊어졌다.

하지만 떨어지지 않고 다른 물건들처럼 하늘로 ‘붕’ 떠올랐다.


얼른 오발탄을 한쪽 팔로 안은 리가, 비토가 있는 유리 상자 쪽으로 단숨에 날아갔다.


“해(解)!”


검지로 유리 상자를 가리키며 주문을 외우자, 유리가 먼지처럼 흩어지며 사라졌고, 상자 안쪽의 비토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토! 어서!”


유리 상자 주변을 빙글 돌며 리가 소리를 지르자, 비토가 순간적으로 모습을 없앴다가 나타나며 묶은 선을 풀더니, 리의 스카프 속으로 쏙 날아 들어왔다.


“리, 아까 이상한 소리가 나서 돌아보는데, 갑자기 커다란 손이 나타나서...”

“쉿! 일단 여기부터 뜨고!”


비토를 확보한 리는 그 궤도 그대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오발탄을 삼키려던 거대한 물고기가 열기구의 풍선처럼 하늘 위에 두둥실 떠 있는 게 보였다.


물고기를 끼고돌아 얼른 해변의 포털 쪽으로 향하려는데,

하늘 한가운데, 태양이 있던 자리에 만(卍) 자 모양의 보라색 조형물이 떠있는 게 보였다.

조형물은 옆으로 살짝 기운 채, 천천히 제자리를 돌고 있었다.


“뭐지?”

‘우우우우우웅!’


그때, 만(卍) 자 조형물이 제자리에서 빠르게 회전하더니, 예의 낮고 굵직한 동물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전보다 훨씬 길고 강렬한 소리에 리의 시야가 좌우로 마구 흔들리더니, 이내 순식간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리!”


비토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머리가 뭔가에 부딪히는 충격이 느껴졌다.

눈앞이 번쩍거리고 몽둥이에 맞는 듯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렸다.

동시에 입 안에선 모래가 써걱거리며 씹혔다.


“리! 정신 차려! 리!”

“퉤!”


리가 침을 뱉으며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실눈을 뜬 채 힘겹게 주변을 둘러보자, 백사장 한가운데 자신이 엎드려 있었다.

어느새 자신이 얼려놓았던 백사장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늘에서 갑자기 정신을 읽고 백사장으로 추락한 모양이었다.


‘우우우우웅’


그때, 또다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이번엔 시야뿐 아니라 몸 전체가 흔들렸다.

그러면서 리의 몸에서 에테르가 급격히 빠져나갔다.


“크으윽, 이게 또.”


엎드린 채 고통스러워하는 리.

아니나 다를까, 리의 2단계 변신이 풀리며 얼굴의 검은 문신과 등 뒤의 망토가 사라졌다.

등 뒤의 소형 태양도 당장이라도 꺼질 듯 깜빡거렸다.


“리, 괜찮은 거야?”


곁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리를 바라보는 비토.


“큭큭큭, 네놈의 그런 꼴을 꼭 보고 싶었는데. 마장군 덕분에 결국 보는구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앞을 보는 리.

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오발탄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어느새 재갈을 풀었는지, 천으로 몸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고 있었다.


“내 손으로 네 놈의 목을 따고 싶었는데 말이야. 뭐, 몽마님의 수하로 들어갈 수 있다면야, 뭐 이 정도는 양보해야겠지. 큭큭큭.”


비열하게 웃는 오발탄의 머리 앞뒤로 코뿔소 같은 노란색 뿔이 쑤욱 튀어나왔다.

찢어진 양 어깨로 나뭇가지 같은 검은 가시들도 삐져나왔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리가 의외의 모습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발탄! 당신, 마, 마물!”


‘샤아앙!’


그때, 검으로 얇은 종이를 배는 듯,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오발탄의 몸통이 대각선으로 두 동강 나며, 윗부분이 흘러내렸다.


“크허헉...”


잘린 오발탄의 하반신 뒤로, 몽마가 기다란 장검을 하늘로 치켜든 채 서 있었다.

보라색 검날이 햇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사실, 난 박쥐 새끼는 싫어하는 편이라서 말이야. 하하하”


몽마가 장검을 가로로 휙 긋자, 오발탄의 피가 둥그렇게 사방으로 튀었다.

일부는 리의 얼굴까지 날아왔다.

얼른 고개를 돌려 이를 피하는 리.


“아악! 리!”


비토의 비명에 다시 고개를 돌리는데, 누군가가 리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멀리 떨어져 있던 몽마였다.


“자네 실력도 인정은 해줄게. 이 정도 압력까지 끌어올린 건 처음이거든.”

“익, 뇌룡승천!”


갑작스러운 몽마의 접근에 리가 반사적으로 팔을 들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뇌룡이 리를 휘감아 돌며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근거리이니 아무리 빨라도 피하는 건 불가능하리라.


“쯧쯧쯧, 머리가 나쁘구만. 여기선 아무도 날 이길 수 없다고. 여긴 내 세계니까.”


순간적으로 리의 정면으로 이동한 몽마가,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리의 오른쪽 허벅지에 장검을 ‘푹’ 찔렀다.

그리곤 검날을 비튼 뒤 그대로 뽑아냈다.

리의 허벅지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크흑!”

“리!”


허벅지를 움켜쥔 채 한쪽 무릎을 꿇는 리.

비토가 울먹이며 리의 허벅지 곁을 날았다.


“자, 즐길 만큼 즐겼으니, 이제 끝내자고. 이 정도면 마제님의 명령도 어느 정도 이행된 것 같으니.”


뒤로 물러서며 손가락을 ‘딱’ 튕기는 몽마. 그러자 그의 등 뒤로 일군의 무리들이 주르륵 늘어섰다.


8명의 제우스, 8명의 아테나, 8명의 포세이돈과, 8명의 하데스, 그리고 8마리의 삼두견.


제각기 무기를 치켜든 그리스의 신들이, 리를 바라보며 빨갛게 충혈된 눈빛을 번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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