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컹!”
삼두견과 아테나 무리가 동시에 공격해 오는 순간, ‘검은 불길의 남자’가 심호흡을 멈추더니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곤 왼손을 앞으로 뻗으며 주문을 외웠다.
그의 팔목엔 하얀색 자물쇠가 하나 남아 밝게 빛나고 있었다.
“퀘이사!”
순간, 남자를 중심으로 운동장 만한 검은색 구체가 순식간에 펼쳐지며 삼두견과 아테나 무리, 그리고 다른 신들까지 단번에 둘러쌌다.
구체에 갇힌 무리들은 그대로 멈춘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완전히 정지해 버린 것처럼.
“엔트로돈!”
남자가 이번엔 오른팔을 앞으로 내밀며 주문을 외우자, 그의 오른손 앞으로 황금색의 ‘원형판’이 나타났다.
그가 판을 붙잡고 왼쪽으로 돌리자, 구체에 갇힌 무리의 피부가 일제히 쭈글쭈글해지더니 곧 까맣게 썩어 들어갔다.
그리곤 순식간에 뼈만 남았는데, 뼈조차도 작은 입자로 분해되더니 이내 검은 구체에 흡수되어 버렸다.
“후흐흡!”
남자가 양팔을 내리며 숨을 들이키자, 검은 구체는 순식간에 남자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새 장작을 집어넣은 화로처럼 ‘화르륵’ 그의 몸 전체가 커다란 검은 화염으로 불타올랐다.
“리... 리, 맞는 거지?”
모래 속에 숨어있던 비토가 얼굴을 반쯤 내민 채 ‘검은 불길의 남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남자가 모래를 내려다보더니, 목에 두른 검은색 스카프를 앞으로 당기며 씨익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비토가 입이 찢어지게 따라 웃으며, 그의 스카프 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랬다, 검은 화염의 남자는 4번째 자물쇠가 풀린 리였다.
덩치도 커지고 얼굴도 검은 문신으로 뒤덮여 겉모습은 달라졌지만, 틀림없는 리였다.
게다가 이번엔 폭주하지도, 정신을 잃지도 않았다.
아마 수운신이 에테르의 운행을 봐준 영향이리라.
“오호라, 흡기공(吸氣功)인가. 키도 아까보다 커졌고. 이 녀석, 진짜 물건은 물건이네.”
멀리서 검은 화염 형태로 변신한 리를 보며, 몽마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하늘의 태양을 보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우우우우우웅’
그러자 보라색 화염이 더 크게 이글거리며, 예의 낮고 굵직한 짐승 울음소리가 다시 한번 해변 전체에 울려 퍼졌다.
“흥, 그래봐야, 여기는 내가 만든 세계야. 마제가 오든, 일자가 오든 여기선 내가 제일 강하다고!”
보라색 장검을 앞으로 뽑아 든 몽마는, 단번에 리의 뒤쪽으로 순간이동 했다.
그리곤 리를 배기 위해 아까처럼 빠르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허리가 아니라 목이 타깃이었다.
“죽어!”
있는 힘껏 장검을 휘두르는 몽마. 그런데 아까처럼 리를 통과하기는커녕 뭔가에 막힌 듯, 검을 배는 자세 그대로 멈춰 섰다.
“응?”
고개를 돌려 검을 보자, 검날이 리의 몸에는 닿지도 못한 채 손처럼 변한 검은 화염에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심지어 리는 몽마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하늘만 보고 있었다.
“이익, 이게”
몽마가 힘주어 검날을 빼려 하자, 부들부들 떨리던 날이 ‘챙’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부러진 날은 검은 화염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이내 모습을 감췄다.
날이 부러진 검을 들고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몽마.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저것 때문이었군.”
하늘을 보며 리가 혼잣말을 했다.
그러다 하늘을 향해 오른팔을 쭉 뻗었다.
그러자 보라색 화염이 일렁거리는 태양 위로, 태양보다 더 큰 거대한 손이 만들어졌다.
검은색 손은 천천히 손바닥을 펼치더니 갑자기 태양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잠시 ‘끼우우우웅!’ 짐승 울음소리가 애처롭게 들리더니, 이내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손이 다시 손바닥을 펴자, 손에서 노란색 태양이 빠져나오며 하늘 위로 휙 날아올랐다.
부서진 조각들은 공중에 흩날리며 보랏빛 오로라를 만들었다.
“안돼! 내 코어!”
뒤로 주저앉으며 고함을 지르는 몽마.
그의 이마 한가운데 박혀있던 만(卍) 자 모양의 보석이, ‘챙’ 소리를 내며 터져 나왔다.
순간, 세계의 모든 사물들이 일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떨어졌다.
해변의 색깔도 옅은 보랏빛이 걷히며 나른한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리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중력이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리의 에테르가 확 올라가며, 리의 몸에서 집채 만한 검은 불길이 ‘화르륵’ 일었다가 가라앉았다.
“너 이 자식, 내 코어를!”
“이제 더는 없어. 네가 만든 세계 따윈.”
몽마를 돌아보며 리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곁에서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비토가 로봇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어금니를 깨무는 몽마.
‘딱!’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선 몽마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예의 그리스 신들이 모래 속에서, 절벽 속에서, 구름 속에서, 바닷속에서 우르르 몰려나왔다.
이젠 그 수가 너무 많아, 모두 몇 마리인지 한눈에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공격해!”
몽마가 다시 손가락을 튕기며 신호를 주는데, 이상하게도 모두 병풍처럼 서 있기만 할 뿐,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 해! 공격하라니까!”
몽마가 연신 손을 튕기며 재촉했지만, 신들은 요지부동 반응이 없었다.
매번 선봉에 나서던 삼두견 무리조차 앞발을 괴고 누운 채 눈만 껌뻑거렸다.
“이것들이... 단체로 겁을 처먹었나...”
“가자, 나랑. 가서 오발탄에 대해 진술해 줘. 그럼 네 세계로 언제든 돌아가게 해 줄게.”
“...”
리에게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리스 신들을 무섭게 쏘아보는 몽마.
그러다 백덤블링하며 공중으로 휙 날아올라 백사장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하하, 이거 체면이 말이 아니구만. 저 딴 하급 저항들에게도 무시당하다니. 인정한다, 니 실력. 그래 나도 제대로 보여주마. 왜 내가 차기 마제로 불리는지를.”
웃음기를 지운 몽마가 번데기처럼 몸을 앞으로 웅크렸다.
“뜨랜스뽀르마띠온(transpormation)!”
몽마가 주문을 외우자, 그의 주위로 주황색 에테르가 불길처럼 모여들더니, 차츰 붉은색으로 변했다.
그러다 ‘투둑’ 소리와 함께 몽마의 등이 갈라졌고, 그 틈에서 펄펄 끓어오르는 용암이 울컥거리며 쏟아져 나왔다.
마치 막 분화한 화산처럼.
끝없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던 용암은 모래 위에서 서로 엉겨 붙어 어떤 모양을 만들더니,
이내 거대한 새의 형상을 완성했다.
“키야아아아악!”
새빨간 ‘용암 새’는 고개를 하늘로 쳐들며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그 소리에 겁먹은 삼두견들이 얼른 모래 속으로 몸을 숨겼다.
“리, 저거... 저거 지옥불에 산다는 불사조, 피닉스(phynix)야.”
피닉스의 기세에 눌린 비토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겁먹을 거 없어, 비토. 지금의 난 강해.”
제자리에서 거대한 날개를 시험하듯 몇 차례 펄럭거리던 피닉스는, 훌쩍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제우스 무리들이 행여 피닉스에 닿을 새라 사방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허공에 뜬 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는 피닉스.
피닉스의 미간, 콧잔등 위에 몽마의 상체가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몽마의 머리엔 초승달 모양의 뿔이 가로로 박혀 있었다.
“흐흠, 오랜만에 맡는 군, 이 유황 냄새. 너도 느껴지지? 네놈의 죽음이 다가오는 게. 하하하”
다시 몽마의 웃음소리가 해변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다시 한번 말할게. 나와 함께 가자. 그럼 언제든 너의 세계로 돌려보내 줄게.”
리가 전음으로 몽마에게 속삭이자, 몽마가 빈정 상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흥, 언제까지 그리 건방을 떨 수 있을지 두고 보마. 푸에고 에스파다(fuego espada)!”
몽마가 검지를 앞으로 내밀며 주문을 외우자, 피닉스가 가슴이 부풀도록 호흡을 잔뜩 들이마시더니, 리를 향해 ‘후욱’ 바람을 불었다.
그러자 보라색 불길이 이글거리는 집채 만한 화염구(火焰球)가 리를 향해 곧장 날아갔다.
“온다!”
다시 리의 스카프 속으로 쏙 숨는 비토.
“세파라시온!”
몽마가 주문을 외우자 화염구가 중간에 펑 터지며 갈가리 갈라지더니, 마장군이 쓰던 보라색 장검으로 바뀌었다.
순식간에 수천 개의 장검이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꼬치구이를 만들어 주마!”
화염을 꼬리처럼 달고 날아오는 수천 개의 검들을, 리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 검들을 향해 오른손을 펼쳐 들었다.
그러자 금색의 원형 판이 또다시 리의 손 앞에 나타났다.
“제행무상(諸行無常), 환형(換形)!”
리가 원형 판을 오른쪽으로 돌리며 주문을 외우자, 날아오던 장검들이 일제히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순간 팝콘처럼 ‘파박!’ 소리를 내며 터지더니 미세한 원자로 분해되었다.
분해된 원자들은 얽히고 섥히며 정신없이 뒤엉켰고, 이내 수만 방울의 이슬로 변했다.
이슬들은 마치 소나기라도 된 듯, 리가 있는 모래사장으로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우와! 웬 소나기가 갑자기...”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비토가 스카프 밖으로 짧은 팔을 내밀었다.
“마지막 제안이야. 나와 함께 가서 증언해 줘. 그럼 넌 살 수 있어.”
리가 피닉스의 공격을 무마시키고 또다시 전음으로 이야기하자, 몽마가 인상을 쓰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네깟 놈이, 감히 이 마장군 몽마를 우습게 봐...”
“키야악!”
몽마가 주먹을 움켜쥐며 가슴에 대자, 피닉스가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빙그르르 돌았다.
그러다 점점 회전 속도가 빨라지더니, ‘펑’ 소리와 함께 마치 피칭 머신이 던진 야구공처럼 리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왔다.
“두알리다드(dualidad)!”
몽마가 주문을 외우자, 피닉스의 위치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그러다 또다시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날아오는 동안 피닉스의 위치가 너무도 빠르게 변하자, 도무지 어느 방향에서 날아오는지 그 궤적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가르라(garra)!”
순간 회전하는 피닉스의 몸뚱이에서 칼날 같은 발톱이 튀어나오더니, 이내 ‘쿵’ 뭔가에 강하게 부딪혔다.
충격 때문인지 흙먼지가 훅 일었다.
튕겨진 피닉스는 날갯짓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발톱에 찢겨나간 리의 모습을 기대하면서.
“더 떠들어 보시지, 건방진 자식!”
허나 흙먼지가 가라앉자, 피닉스의 앞에는 리 대신에 빌딩 크기의 거대한 ‘모래 거인’이 우뚝 서 있었다.
왼쪽 어깨와 팔이 터져나가고 없었지만, 충격을 받은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뭐야 이건?”
피닉스가 날갯짓을 하며 얼른 날아오르려는데, 갑자기 양쪽에서 또 다른 모래 거인 둘이 나타나, 피닉스의 양 날개를 하나씩 붙잡았다.
거인들의 손은 순식간에 모래로 바스러지더니, 피닉스의 날개와 완전히 들러붙었다.
피닉스가 몸을 바둥거리며 빠져나오려 했지만, 단단히 붙잡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놔라! 이 자식들! 놓으라고!”
그때, 정면에 있던 모래 거인의 가슴팍을 뚫고 검은 불길의 리가 훅 튀어 올랐다.
공중으로 유유히 날아오른 리는, 한 바퀴 ‘빙글’ 돌더니 피닉스를 향해 X자로 양손을 내리그었다.
“무상검(無常劍)!”
그러자 피닉스의 가슴팍에 X자가 번쩍하더니, 양 날개와 몸통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놀랍게도 잘린 자리에선 피가 튀거나 용암이 터져 나오는 대신, 연분홍색의 벚꽃 잎이 뿜어져 나왔다.
“끼야아아...”
급격히 에테르가 줄어들며 맥없이 추락하는 피닉스. 백사장에 떨어져 퉁퉁 튕기더니, 파도가 드나드는 모래사장까지 굴러갔다.
피닉스의 몸통도 이내 벚꽃잎으로 변해 우수수 바닥에 쌓였다.
파도가 드나들며 벚꽃 잎을 쓸고 가자, 마장군의 상반신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쿠허억.”
입에서 용암을 토해 내는 마장군. 파도가 마장군의 몸을 덮칠 때마다 하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하늘에서 떨어진 벚꽃 잎 하나가 쓰러진 마장군의 얼굴 위에 떨어졌다.
“쏴아아아.”
마침내 치열했던 공방이 끝나고, 환영이라도 하듯 파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찰팍’ 물 튀기는 소리를 내며 리가 몽마의 곁에 내려섰다.
바닥에 쓰러진 몽마가 한쪽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리를 올려다봤다.
“쿨럭, 쿨럭.”
“그러게 나와 함께 가자니까. 왜 굳이 죽음을 자초하냐고.”
“쿨럭... 멍청한 자식.”
‘쏴아아’ 파도가 밀려들며 리의 발목을 간질였다.
‘슈욱’ 소리와 함께 리의 검은색 불길이 사라지며, 환생 관리자 복장의 리로 되돌아왔다.
“쿨럭, 니가 이긴 것 같냐?”
“그 모습을 하고도, 끝까지 자존심을 세우고 싶나?”
“쿨럭, 쿨럭, 크크크. 모든 건 마제님의 계획대로야. 넌 마제님의 계획대로 놀아난 거라고, 이 바보 같은 놈! 크크크.”
마지막 힘을 짜내서 웃는 몽마. 그의 웃는 모습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놀아나?”
잔뜩 인상을 쓰며 눈썹을 치켜뜨는 리.
순간, 뒤통수를 타고 짜르르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