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건 마제님의 계획대로야. 넌 마제님의 계획대로 놀아난 거라고, 이 바보 같은 놈! 크크크.”
마지막 힘을 짜내서 웃는 몽마.
그의 웃는 모습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뒤통수를 타고 짜르르 소름이 돋는 걸 억누르며, 리가 쓰러진 몽마의 가슴을 한쪽 발로 밟았다.
그의 허리에서 울컥 용암이 빠져나왔다.
“그게 무슨 소리지? 갑자기 마제의 계획이라니?”
“크크, 쿨럭쿨럭, 이제 알겠군. 마제님께서 왜 너를 붙잡아 놓으라 했는지. 쿨럭.”
파도가 ‘쏴아아’ 밀려들어 몽마의 얼굴을 뒤덮었다가 곧 빠져나갔다.
볼을 타고 흐르던 피눈물이 거품에 씻겨나갔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크크크, 멍청하긴. 내가 여기 중력을 괜히 높인 줄 알아? 에테르를 억누르는 것도 억누르는 거지만, 쿨럭쿨럭, 중력이 높으면 시간이 빨리 흐르거든. 미친 듯이. 내가 정말로 할 일이 없어서 쿨럭, 너랑 게임이나 한 줄 알았냐. 크크크, 지금쯤 중간계와 천계는 초토화... 쿨럭쿨럭쿨럭, 초토화돼 있을걸. 크크크, 멍청한 놈.”
몽마를 뚫어질 듯 노려보며 인상을 쓰는 리.
‘시간이 빨리 흘러? 중간계와 천계가 초토화돼?’
영문을 알 수 없는 몽마의 이야기에 한껏 눈썹을 찌푸리는 리.
고개를 들자 역시나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비토가 보였다.
그러다 뭐가 생각났는지 비토가 눈을 번쩍거리며 리를 바라봤다.
“리! 설마, 그 예언서에서 말하던, 대절멸?”
“... 탐욕이 순결의 그릇을 흘러넘칠 때, 하찮은 외침들이 고결한 속삭임을 뒤덮을 때, 당연하지 않은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만연할 때, 대절멸의 피눈물이 쏟아지리라.”
파피루스에서 읽었던 내용을 한자씩 되뇌어 보는 리.
천천히 시선을 돌려 해안 끝, 이곳으로 들어왔던 포털을 바라봤다.
순간 포털 위로 유니와 일권의 얼굴이 겹쳐졌다.
어금니를 깨무는 리.
“젠장!”
‘퍼엉!’ 폭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리가 포털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끼룩끼룩, 끼룩’
리가 떠난 해변 위로, 다시 갈매기들이 하나둘 날아들었다.
모래 바닥을 콕콕 쪼며 먹이를 찾는 갈매기들 너머로, 몽마의 시체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
중간계 서쪽 끝, 암형문 광장.
광장 너머 거대한 호수 밑으로 암형계의 붉은 실루엣이 어른거리며 보였다.
바람이 불어 물결이 너울거릴 때마다, 암형계의 실루엣이 덩달아 춤을 췄다.
“땅! 땅! 땅! 땅!”
호수 바로 옆 광장에는 ‘암형문’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건물 7층 높이의 문 2개짜리 ‘여닫이문’이었다.
금운신의 석공들은 형문 기둥에 긴 사다리를 걸친 채 열심히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기둥 쪽으로 커다란 경첩 같은 걸 설치하는 듯 보였다.
망치질을 할 때마다 사다리가 조금씩 흔들리는 게 적잖이 위태로워 보였다.
“땅! 땅! 땅!”
망치질 소리가 요란한 광장 한편엔, 환생 관리자 무리가 잔뜩 줄지어 있었다.
중간계 소속 환생 관리자들이 총출동한 듯, 낯선 환생 관리자들도 많이 보였다.
“왐마, 비상상황은 비상상황이구마.”
발끝으로 선 채 이리저리 환생 관리자 무리를 둘러보던 일권이, ‘털썩’ 바닥에 내려서며 말했다.
일권이 움직일 때마다 가방에서 이상한 냄새가 풍기는지, 주변의 관리사들이 코를 움켜쥐며 인상을 썼다.
“석공들은 뭘 만드는 거래요? 지금은 사용하지도 않는 암형문을 가지고.”
일권의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유니가 석공들을 보며 물었다.
“본디 암형문은 일방통행이여. 중간계서 암형계로만 열려 불지. 근디 이참에 허벌나게 많은 '만행자(滿行者)'가 올라와야 하잖여. 심판국의 포털은 일방통행이기도 하고, 좁기도 한 게, 암형문을 쓰기로 결정했다드마. 긍게 까꿀로 암형계서 중간계로도 열리게끔 개조하는겨. 양방향으로다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유니.
그러다 뭐가 못마땅한지 입술을 비죽거린다.
“아니, 근데 ‘만행자’가 한꺼번에 이렇게 많을 수가 있나요? ‘형계의 벌을 몇 곱절이나 더 받고, 죄를 뉘우쳐 열반의 깨달음 얻는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개나 소나 다하게?”
“음마, 모르지 나는. 1겁 년마다 한 번씩 있다는 '대환생'인디, 나라고 본 적이 있을라고.”
“에잉, 재수 없게 하필 우리 차례에 걸려 가지고. 쯧쯧쯧”
인상을 쓰며 혀를 차며 유니.
“다들 환생계로 돌아가겠죠?”
“그라제. 그래봐야 미물로 환생할껴. 지은 죄가 있응게.”
“흐흠, 그나마 일 처리는 쉽겠네요”
말없이 일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 뒤 경첩 설치가 끝났는지, 날카롭게 귀를 찔러오던 망치질 소리가 멎었다.
망치를 허리춤에 찬 석공들이 곡예하듯 빠르게 사다리를 내려왔다.
그 모습을 보고 짓궂은 몇몇 환생 관리자들이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쳤다.
“끝났능가?”
일권이 다시 발끝을 들고 석공들을 살피는데,
순간 유니가 맨 배낭에서 강아지가 머리를 쏙 내밀더니 ‘캉캉’ 거리며 짖었다.
“엥, 야는 뭐더러 데리고 왔능가. 그 가방은 또 뭐시고?”
“선배 스타일 한번 응용해 봤죠.”
유니가 앞으로 맨 배낭을 좌우로 흔들며 멋쩍게 웃자, 일권이 한쪽 볼을 씰룩이며 인상을 썼다.
“그럼 어떻게 해요. 다 여기 나와서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데. 얘만 혼자 두고 나올까요? 리라도 있으면 맡기고 오는데, 이 썩을 노무 자식은 어디 갔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캉캉이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일권.
일권이 쳐다보자 캉캉이가 ‘캉!’ 짖으며 일권을 반겼다.
“진짜, 리 이 자식은 5일째 연락도 없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감찰사에게 붙잡힌 것 같진 않던데. 이젠 소명기간도 다 끝나버렸고. 어휴, 진짜 왕 골칫덩이...”
한숨을 내쉬며 캉캉이를 다시 가방 속으로 밀어 넣는 유니.
움직이기 좋게 가방을 뒤로 돌려맸다.
그 모습을 보며 일권도 덩달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 내 업이지, 내 업인겨.”
‘두웅, 둥, 둥뚱. 두웅, 둥, 둥뚜두둥’
그때, ‘만행자 대환생’의 서막을 알리는 둔중한 북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나온다!”
환생 관리자들의 웅성거림과 동시에, ‘쩌정!’ 쇳덩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육중한 암형문이 ‘드르륵’ 땅 긁는 소리를 내며 중간계 쪽으로 당겨졌다.
사람이 서너 명 지나갈 정도로 문틈이 벌어지자, 문이 움직임을 멈췄다.
“...”
순간 언제 소음 같은 게 있었냐는 듯, 광장 전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광장에 모인 환생 관리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틈을 향해 쏟아졌다.
열린 틈으로 암형계의 뜨거운 공기가 새어 나와 아지랑이를 만들었다.
“선배, 저기!”
유니의 손가락질과 동시에, 드디어 첫 번째 만행자가 문틈에서 빠져나왔다.
찢어지고 해져 다 낡아빠진 반바지만 달랑 걸친 채, 한 남자가 천천히 문밖으로 걸어 나왔다.
몸통과 팔다리에 불에 덴 흔적과 검은 그을음으로 가득한 이 남자는, 양손과 두 발을 하나의 쇠사슬로 묶고 있었다.
그나마 유격이 꽤나 있어서, 걷는데 무리는 없어 보였다.
“우우...”
환생 관리자들 사이에서 알 수 없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자자! 주목! 계획한 대로 20명당 환생 관리자 한 명입니다.
이곳은 협소하니까 모이는 족족 신속하게 환생의 숲으로 이동해 주세요!”
모처럼 현장에 나온 관리국 차장이, 잔뜩 신이 났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리 걱정은 접어불고, 일단은 이 짝부터 잘 마무리 허자고”
“그래요.”
일권과 유니가 서로를 마주 보며 주먹을 맞댔다.
*
“젠장!”
문을 관통해 다시 포털 공간으로 들어선 리.
엄청난 속도로 젤리 같은 공간을 질주하다가, 문득 꺼림칙한 느낌에 조금씩 속도를 늦췄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다가, 결국 미간을 찌푸리며 멈춰서는 리.
부드럽게 움직이는 젤리의 흐름 따라, 리의 머리카락이 물속처럼 흐느적거렸다.
“이상한데. 왜 출구가 안 나오지?”
“그러게, 한참 날아온 것 같은데.”
비토가 스카프에서 얼굴만 내민 채, 망원경을 사용해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 뭐가 찾았는지, 손가락을 뻗어 한쪽 끝을 가리켰다.
“리! 저쪽에 뭐가 있는데.”
비토가 가리키는 방향을 얼른 돌아보는 리.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희미한 빛 같은 게 반짝거렸다.
“오케이!”
다시 젤리를 관통하며 쏜살같이 이동하는 리.
비누 거품 같은 것들이 꼬리를 이루며 리의 뒤를 따라왔다.
한참을 날아가 빛에 근접하자, 조금씩 빛의 정체가 드러났다.
포털의 출구를 기대했건만, 빛의 정체는 리의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그 모습을 보고 또다시 리가 천천히 멈춰 섰다.
“이, 이게 다...”
“오 마이... 갓”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린 리와 비토.
그들의 앞에는 오와 열을 맞춰 직사각형으로 배치된 수십만 개의 문이 좌우로 한껏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파노라마 스크린처럼.
‘하하하하하!’
몽마의 웃음소리가 환청이 되어 리의 귓가를 맴돌았다.
*
첫 번째 만행자를 필두로, 본격적으로 만행자들이 암형문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인원 점검차 암형계로 파견 나갔던 관리도 부채질을 하며 암형문에서 빠져나왔다.
관리국 차장과는 안면이 있는 듯, 악수를 하며 서로를 반겼다.
광장에서 2열로 잠시 대기했던 만행자들은, 20명이 되면 어김없이 배치된 환생 관리자를 따라 광장을 빠져나갔다.
만행자들을 위해 특별히 설치한 육로가, 중간계를 가로질러 동쪽 끝, 환생의 숲으로 곧장 이어졌다.
쇠사슬 때문에 이동속도가 더디긴 했지만, 애초에 긴장했던 것과는 달리 대환생의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만행자들의 행렬은 환생의 숲을 향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면 꼭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제품들이 줄줄이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나가는 만행자 행렬을 보며, 용의 길에서 심판을 기다리던 영혼들이 나지막이 수근거렸다.
“도대체 언제까지 나온데요. 엄청 나온 것 같은데. 이제 남은 관리자도 얼마 없어요.”
유니가 한층 줄어든 환생 관리자들을 눈으로 세어가며 말했다.
“긍게, 예상보다 많긴 헌디, 거의 다 나왔을 것이네. 자, 준비하드라고. 인자, 자네 차례여.”
일권이 가방을 고쳐 매며 말했다.
그의 가방에서 다시 악취가 풍기자, 유니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하아, 이 냄새는 진짜 적응이 안돼.”
일군의 만행자들이 들어와 광장에 줄을 서자, 일권이 손을 번쩍 들더니 유니를 앞으로 떠밀었다.
관리국 차장의 수신호에 따라 드디어 유니도 열의 선두에 섰다.
가까이서 보니 만행자들은 덩치도 컸고 얼굴도 괴물처럼 울그락 불그락했다.
쇠사슬에 단단히 묶여 안전하긴 했지만, 겉모습만으로도 겁을 먹기엔 충분했다.
“어휴, 죄인은 죄인이네. 포스가...”
유니가 나지막이 혼잣말을 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자, 이제부터 저를 따라오시면 돼요!”
겁먹지 않은 척 일부러 크게 말했지만,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리는 건 숨길 수 없었다.
유니는 앞서간 행렬의 꽁무니를 쫓아 만행자들을 이끌었다.
그렇게 서너 팀 더 나왔을까. 문을 통해 나오는 만행자들의 행렬이 드디어 끊어졌다.
한동안 기다려도 아무 소식이 없자, 관리국 차장은 서류를 넘겨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서류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그의 모습을 보며, 배정되지 않은 환생 관리자들이 쾌재를 불렀다.
관리국 차장 끝났다는 의미로 양팔을 X자로 만들어 수신호를 보내자,
광장 한편에 대기하고 있던 ‘석공 팀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어나자고, 일할 시간이야. 얼른 마무리하고 가게.”
장갑으로 엉덩이를 털며 석공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한쪽에 내려놓았던 사다리를 하나씩 붙잡고 암형문을 향해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석공 중 하나가 문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저, 저게 누구야!”
“왜, 뭔데?”
석공들의 시선이 일제히 형문 쪽으로 향했다.
“대, 대석공님?”
“오, 오!”
뒤이어 석공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흰 머리카락을 죄수처럼 풀어 헤친 난쟁이 하나가, 신발도 신지 못한 초췌한 모습으로 형문을 졸망졸망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허리엔 손때가 잔뜩 뭍은 ‘청색 쇠망치’가, 키링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