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적당히 좀 하지!”
얼른 전투태세를 취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리.
커다란 화염 드래곤의 머리 위에 선 남자가, 리를 향해 오른팔을 내뻗고 있었다.
그가 팔을 거두자 붉은 창이 ‘번쩍’하고 날아가 그의 손에 안겼다.
“리... 마, 마, 마제야...”
리의 스카프 속에서 눈만 빼꼼히 내민 채, 비토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제의 왼손엔 천계군이 목을 붙잡힌 채, 날개를 퍼덕거리고 있었다.
마제가 눈썹을 움찔하며 힘을 주자, ‘두둑’하고 천계군의 목뼈가 부러졌다.
축 처진 천계군을 마제가 귀찮은 듯 바닥에 내던졌다.
“이래서 내가 자리를 못 비운다니까. 쓰레기 청소 좀 한다고 잠깐 갔다 왔더니, 그새를 못 참고 방해를 하나.”
마제의 목소리가 천계의 하늘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불길한 예감에 리가 얼른 시선을 돌려 하늘을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하늘에는 단 한 명의 천계군도 남아있지 않았다.
애초에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마제의 공격에 죄다 제압된 모양이었다.
“젠장, 잠깐도 못 버텨주나...”
이를 깨물며 주먹을 쥐는 리.
순간 주황색 에테르가 리 주위로 훅 일었다.
“워, 워, 워. 눈치껏 날 뛰라고. 자꾸 그러면 진짜 죽여버리고 싶잖아.”
“흥! 할 수 있으면 해 보시던가.”
마제를 쏘아보며 천천히 에테르를 끌어올리는 리.
곁눈질로 주변을 도는 방어석을 보는데, 마제의 공격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방어석이 세 덩이로 조각나 있었다.
리도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의 남자가 얼마나 강한지. 그가 풍기는 붉은 에테르는 몽마의 그것을 월등히 넘어서고 있었다.
그가 한마디 한마디 뱉을 때마다, 음파가 장풍처럼 리의 몸을 때렸다.
단 일합의 공격이 이 정도라면, 4단계로 변신하지 않는 한 승산은 전혀 없었다.
문제는 이 몸 상태로 과연 4단계 변신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리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리, 위험해, 이번엔 진짜로. 지금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니잖아.”
얼굴도 못 내민 채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비토.
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쩔 수 없잖아. 끝까지 할 수 있는 걸 해보는 수밖에...”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며 천천히 인을 맺는 리.
‘휴우’ 긴 숨을 내뱉더니, 결심한 듯 염불 같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자, 가보자. 보르디름 아카사이레, 보르디름 아카사이레!”
순간, 리 주변의 먼지와 돌덩이들이 ‘두두두’ 흔들리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동시에 등 뒤의 검은 망토가 배의 돗처럼 하늘로 쫙 펼쳐지더니 그대로 리를 뒤덮었다.
리를 감싼 검은 망토는 살아있는 세포처럼 이리저리 꿈틀대더니, 이내 한쪽 부분이 쭉 찢어졌다.
그 틈에서 붉은 머리카락을 빼고 온몸이 석유처럼 검게 번쩍거리는 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전보다 1.5배 이상 덩치가 커진 리는,
가슴 한가운데에 붉은 태양이 타오르고 있었고,
태양에서 뻗어 나온 금색 선이 리의 팔다리로, 붉은 머리카락으로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갔다.
검은 망토는 곧 리의 몸으로 흡수되어 화염처럼 일렁거렸다.
리가 천천히 눈을 뜨자, 그의 새빨간 눈에서 강렬한 에테르가 뿜어져 나왔다.
“한심한 놈. 정말 백지가 된 모양이구만. 지가 왜 여기 있는 줄도 모르고. 쯧쯧쯧.”
리의 변신을 지켜보며 혀를 차던 마제는 휙 앞으로 텀블링하며 땅바닥으로 내려섰다.
“에넥시옹(anexion)!”
바닥에 내려오자마자 마제는 대자로 팔을 벌리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마제를 중심으로 붉은 파장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으으으아악!”
마제의 파장이 몸을 훑고 지나가자, 멀쩡했던 ‘암석 마물’들이 갑자기 눈을 뒤집으며 몸부림을 쳤다.
그러다 이마의 십자 낙인이 새빨갛게 빛나더니, 피부가 ‘쩌저적’ 갈라지며 딱딱해졌던 피부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미리 프로그램이 입력된 로봇처럼 서로들 향해 미친 듯 달려들었다.
마치 새빨갛게 달궈진 유리가 하나로 들러붙듯,
서로서로 엉겨 붙으며 점점 덩치를 키워가던 마물들은, 어느 순간 거대한 ‘괴수의 형상’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몸은 거대한 아나콘다인데 양쪽으로 지네처럼 수백 개의 다리가 달려있고, 얼굴은 대머리 독수리 형상을 한 ‘레비아탄’,
몸은 공룡인데 등에서 4개의 커다란 날개가 뻗어 나왔고 머리엔 돼지, 노인, 부엉이의 세 얼굴이 합쳐진 ‘베엘제붑’,
몸은 거대한 말벌인데 머리는 사자에, 전갈의 꼬리 같은 두 개의 긴 꼬리가 뻗어 나온 ‘아몬’으로,
암형계에 영구 수감되었던 이계의 ‘3대 괴수들’이었다.
“어딜! 광역분해(廣域分解)!”
마물들의 합체를 눈치챈 리가 양팔을 앞으로 뻗으며 외치자,
그의 손 사이에서 검은색 원형 구체가 만들어져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애드벌룬처럼 점점 커지는 구체는 아직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레비아탄의 머리를 향해 나선 모양으로 빙빙 돌며 날아갔다.
리의 공격을 눈치채고 레비아탄이 몸을 피하려 했으나,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난 커다란 검은손 둘이 레비아탄의 몸통을 단단히 붙들었다.
“키야아아아악!”
결국 검은 구체에 닿고만 레비아탄의 머리는, ‘빠지직’ 검은 스파크를 일으키며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퍼먹고 남은 자리처럼, 레비아탄의 머리 절반이 둥그렇게 파여 사라졌다.
머리를 잃은 레비아탄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쿵’ 맥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얼른 과녁을 바꿔 이번엔 말벌 형상의 아몬을 겨냥하는 리.
거대한 말벌 형상의 아몬은 거의 최종 모습이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광역분...”
리가 주문을 외우려는 순간, 엄청나게 빠른 뭔가가 훅 날아와 리를 들이받았다.
리의 검은 화염이 황급히 두터운 벽을 만들어 막았지만,
그 충격이 어찌나 강력한지 리의 몸이 쭈르륵 뒤로 밀려났고, 화염벽 중앙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적당히 하라니까 진짜! 저것들을 ‘만행자’로 분해하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 줄 알아! 쇼를 시작하게는 해줘야 할 것 아냐, 이 자식아!”
마제가 리를 바라보며 고함을 질렀다.
마제도 어느새 변신한 듯, 붉은 화염으로 이뤄진 ‘거대 표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뾰족한 두 개의 송곳니에선 용암이 뚝뚝 떨어졌고, 그의 미간엔 황소 같은 두꺼운 뿔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었다.
꼭 커다란 불덩이를 공룡 뼈로 가둔 듯한 모습의 마제는, 시뻘건 칼날이 달린 꼬리를 이리저리 휘저어 댔다.
그가 꼬리를 흔들 때마다, 반달 모양의 화염이 뻗어나가 천계의 영혼들을 불태웠다.
“이 자식, 멈춰!”
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마제를 향해 돌진하려는데, 순간 눈앞이 ‘번쩍’ 하더니 강렬한 통증이 등 쪽에서부터 올라왔다.
또다시 리의 왼쪽 등이, 검은 풍선처럼 커다랗게 부푼 것이었다.
지난 마경과의 전투 때처럼 제멋대로 커진 등은, 마치 리의 몸에서 떨어져 나오길 바라는 것처럼 이리저리 몸부림을 쳤다.
“안돼! 제발!”
얼른 몸을 웅크리며 자리에 주저앉는 리.
곧 떨어져 나올 것처럼 정신없이 몸부림치던 검은 물체는,
다행히 리가 움직임을 멈추자 천천히 덩치가 줄어들더니, 이내 리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멍청한 놈. 제 몸 하나 못 가누는 주제에 나대기는. 쯧쯧쯧. 무다(mudar)!”
리를 보며 혀를 차던 마제가 꼬리를 위로 치켜들었다가, 바닥에 ‘쿵’ 내리꽂으며 소리쳤다.
그러자 또다시 붉은 파장이 마제를 중심으로 넓게 퍼져나갔다.
마제의 파장에 닿자, 이번엔 일반 마물들이 눈을 하얗게 뒤집으며 제자리에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다 피부가 ‘쩌저적’ 갈라지더니 몸 안쪽의 주홍빛 용암이 드러났다.
“자, 쇼를 시작해 볼까, 가라!”
마제의 명령이 쩌렁쩌렁 울려 퍼지자,
눈이 하얗게 변한 마물들이 ‘캬아아!’ 괴성을 지르더니, 천계의 영혼들을 향해 미친 듯 달려들었다.
꼭 인간을 깨물기 위해 돌진하는 좀비 떼처럼.
‘펑!’
‘퍼펑!’
‘펑! 펑! 펑!”
천계 영혼들을 붙잡자마자, 마물들의 몸이 빨갛게 변하며 순식간에 폭발했다.
마물 하나하나가 꼭 움직이는 폭탄이 된 셈이었다.
마물 폭탄에 당한 천계의 영혼들은 사방으로 터져나가며 분해되었다.
전쟁터처럼 천계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마물 폭탄이 터졌다.
“젠장!”
폭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리.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다가, 얼른 바닥에 손을 짚었다.
“공허천구(空虛千球)!”
리가 주문을 외우자 천계 바닥이 꿀렁하더니, 천계 바닥 곳곳에서 농구공 만한 검은 구체가 우르르 튀어나왔다.
꼭 비가 내리는 영상을 거꾸로 돌린 것처럼.
사람의 얼굴 높이까지 튀어나온 구체들은, 제자리에서 빠르게 회전했다.
그러자 구체 주위로 에테르 소용돌이가 일더니, 영혼들에게 달려드는 마물 폭탄들을 순식간에 빨아들였다.
에테르 물질만 흡수하는 소형 블랙홀들이었다.
구체에 빨려간 마물 폭탄을 즉시 폭발했는데,
어찌나 흡수하는 힘이 강하던지, 폭발하는 물질도, 소리도, 심지어 불빛조차 조금도 새어 나오지 못했다.
“뇌룡운(雷龍雲)!”
곧바로 일어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는 리.
이번엔 검은 번개가 지지직거리는 구름이 하늘에 빠르게 모여들었다.
뇌룡으로 남은 마물 폭탄을 단숨에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사...”
팔을 내리며 뇌룡을 내리치려는 그때, ‘끼야아아악!’ 길고 강렬한 음파가 리의 몸 전체를 덮쳐왔다.
검은 화염이 빠르게 반구형의 방호벽을 만들어 막았지만, 리의 몸 전체가 흔들리며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음파에 닿은 땅바닥이 발톱에 할퀸 것처럼 깊게 파였다.
얼른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완성된 익룡형 괴수 베엘제붑이 머리 위에서 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날개를 펄럭거리며 방어막의 반대편으로 이동한 베엘제붑은 두꺼비처럼 재차 가슴을 부풀렸다.
돼지, 노인, 부엉이의 세 얼굴이 볼을 잔뜩 부풀리며 입안 가득 바람을 머금었다.
“어딜!”
얼른 베엘제붑을 향해 오른팔을 뻗는 리.
허공에 커다란 손이 나타나더니 베엘제붑을 목덜미를 그대로 움켜쥐었다.
‘푸흡’ 목덜미를 사로잡힌 베엘제붑이 헛바람을 내뱉으며 버둥거렸다.
“광역분...”
베엘제붑을 겨냥해 공허구를 쏘려는 순간, 리의 오른쪽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느껴졌다.
얼른 곁눈질로 보니, 이번엔 초록빛의 널따란 액체 덩어리가 리를 덮쳐오고 있었다.
어느새 완성된 말벌형 괴수 아몬이 꼬리에서 독극물을 뿌려댄 것이었다.
“젠장!”
얼른 뒤로 물러나며 독극물 덩어리를 피한 리는, 아몬을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천압!”
순간 거대한 투명 정육면체가 나타나 아몬의 전신을 완전히 감쌌다.
아몬이 몸을 부르르 떨며 빠져나오려 했지만, 얇은 날개조차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전검!”
이어, 리가 두 손으로 칼집을 잡는 모습을 취하자, 하늘에 검은 번개가 지직 거리는 거대한 검이 나타났다.
단칼에 아몬과 베엘제붑을 베어버릴 생각이었다.
“죽어라!”
리가 두 괴수를 향해 검을 가로를 긋는 순간, ‘채챙!’ 소리와 함께 번개와 뒤엉킨 붉은 화염이 사방으로 확 퍼져나갔다.
어느새 나타난 마제가 이빨로 전검의 날을 깨물고 있었다.
동시에 리의 가슴팍을 향해 마제의 꼬리가 날아들었다.
검은 화염이 얼른 방어벽을 만들었지만, 꼬리 끝에 달린 붉은 칼이 드릴처럼 돌며 파고들어, 결국 리의 왼쪽 어깨를 꿰뚫었다.
“크흑.”
얼른 뒤로 물러서며 칼 끝을 뽑아내는 리.
순간, 땅바닥이 축 처지더니, 뭔가가 리의 몸을 빙글빙글 빠르게 돌며 휘어 감았다.
어느새 되살아난 아나콘다 괴수 레비아탄이었다.
‘키야악!’
수천 개의 다리로 리의 몸을 단단히 결박한 레비아탄은, 리를 내려다보며 부리를 한껏 벌렸다.
그러자 레비아탄의 입에서 수백 마리의 뱀들이 턱까지 입을 벌린 채, 리의 머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뱀들의 혀끝에서 보랏빛 독이 안개처럼 뿜어져 나왔다.
순간, 눈을 하얗게 뒤집으며 생각에 잠기는 리.
그러다 눈을 다시 뜨며 소리 질렀다.
“스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