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 일자

by 무딘

“스파인!”


자신을 달려드는 뱀들을 보며 리가 주문을 외우자,

리를 둘러싼 검은 화염이 마치 고슴도치처럼 뾰족한 가시로 변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레비아탄의 몸을 관통한 가시는 몸통 안에서 미세하게 찢어지고 갈라지며 레비아탄의 몸속을 헤집어 놓았다.


“쿠와아악!”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며 똬리 튼 몸을 비틀어대는 레비아탄. 옥죄는 힘이 느슨해지자, 리가 바로 하늘로 뛰어올랐다.

스파인 공격에 레비아탄의 몸통 여기저기서 주홍빛 용암들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천압!”


리가 레비아탄을 보며 손을 내리긋자,

하늘에서 검은색의 거대한 정육면체가 마치 망치로 내리치듯 레비아탄의 몸 위로 떨어졌다.

‘텅!’ 소리와 함께 천압에 짓눌린 레비아탄의 몸통이 순대 터지듯 찢어졌다.


‘키야아악!’


몸통이 으깨지며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르는 레비아탄.

리가 끝장을 보려는 듯 다시 팔을 들어 올렸다.


‘푸확!’


그때, 갑자기 마제에게 찔렸던 리의 왼쪽 어깨에서 검은 액체가 터지듯 뿜어져 나왔다.

얼른 어깨를 움켜쥐며 멈칫거리는 리.

에테르로 잘 봉합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부상이 깊었던 모양이었다.


“크와앙!”


이때를 놓칠세라, 마제가 순식간에 달려들어 커다란 뿔로 리를 들이받았다.

얼른 방어막을 펼쳐 직접적인 타격은 막았지만, 부상의 여파인지 충격파가 고스란히 몸으로 전해졌다.


바닥에 그대로 내리 꽂이며 한참을 데굴데굴 구르는 리.

리에 부딪힌 건물들이 우르르 무너지며 희뿌연 먼지를 일으켰다.


“끼야아아악!”

‘촤르륵’


어느새 리의 공격에서 풀려난 베엘제붑과 아몬도 먼지구름을 향해 동시에 음파와 독을 뿌렸다.

이들의 공격과 먼지가 뒤섞이며 순간적으로 지상 위에 작은 소용돌이가 일었다.


“크르르르.”


공중에 멈춰 선 채 리가 쓰러진 바닥을 내려다보는 마제.

꼬리 칼을 앞으로 돌려, 자신의 뿔에 남은 리의 에테르 조각을 긁어냈다.

공격을 마친 베엘제붑과 아몬도 마제의 등 뒤로 와 나란히 섰다.


“아이, 아깝게. 아나콘다에 제일 공을 들였구만. 저 멍청한 자식 때문에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쳇.”


마제가 잠시 바닥에 널브러진 레비아탄을 바라보다, 다시 리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희뿌연 먼지가 가라앉자,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리의 모습이 드러났다.


리는 부처상처럼 양손을 위아래로 맞들고 있었는데, 손 사이로 반짝이는 작은 구슬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흑동(黑洞)’을 소환해 공간을 왜곡시켰던 것이었다.

덕분에 괴수들의 공격은 리의 공간을 휘돌아 엉뚱한 곳으로 사라진 모양이었다.


“쿨럭! 쿨럭쿨럭쿨럭, 우웨엑!”


그때, 리가 갑자기 거센 기침을 시작하더니, 이내 가부좌를 풀고 엎드려 연신 검붉은 액체를 토해냈다.

리가 토해낸 액체로 금세 바닥이 흥건해졌다.


동시에 리의 왼쪽 등이 또다시 커다랗게 부풀었다.

아까보다 훨씬 더 커진 검은 덩어리는, 사람의 형상을 한 채 자신의 머리를 이리저리 쥐어뜯었다.


“리! 리! 괜찮아! 리!”


비토가 울먹이며 소리치는 사이, 갑자기 검은 덩어리가 훅 줄어들더니, 리의 몸속으로 곧장 빨려 들어갔다.

마치 폭발 장면을 거꾸로 돌린 것처럼 빠르게.


동시에 리의 가슴에서 빛나던 태양도, 주변에서 일렁이던 검은 화염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모든 단계의 변신이 단번에 풀리며,

온몸을 둘러싼 문신도,

화려하게 불타오르는 에테르도,

허공을 너울대던 머리카락도 없는,

평범한 환생 관리자 리만이 남겨졌다.


“리!”

“쿨럭쿨럭, 하아, 하아.”


마른침을 삼키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리.

그의 왼쪽 어깨에서 울컥울컥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욱신거리는 몸 때문에, 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쯧쯧쯧, 내 저럴 줄 알았지. 에테르를 그렇게 마구잡이로 써대는데, 괜찮을 줄 알았냐? 네가 무슨 신이야? 일자야? 어딜 조연 주제에, 주연을 하려 들어. 멍청한 자식 같으니라고. 크르르르.”


마제가 송곳니를 보이며 리를 향해 그르렁 댔다.

‘펑’, ‘퍼벙’ 폭탄 마물들이 폭발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리가 소환했던 ‘공허천구’들마저 함께 소멸한 모양이었다.


“일, 일어나야 해.”

“리, 그만, 이제 그만해.”


스카프를 빠져나온 비토가 리를 바라보며 울먹거렸다.

그런 비토를 뒤로 물리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리.

마제를 바라보고 서는데, 눈앞의 초점이 자꾸 흐려졌다.


“곧 광마께서 오실 테니, 그때까지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 이 문제아 자식아!”


마제가 리를 향해 휙 꼬리를 휘젓자, 반달 모양의 화염이 핑그르르 돌며 리를 향해 날아갔다.


“리! 피해!”


비토가 소리치자 화염을 향해 엉거주춤 양팔을 뻗는 리.

중력으로 밀어낼 생각이었지만 에테르가 모이긴커녕, ‘쿨럭’ 검은 피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 안돼...”


화염을 향해 애먼 손만 뻗는 리.

또다시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


‘치이익, 치익!’


마제가 리를 상대하는 사이, 뼈다귀 형상의 마물들이 모여 또다시 집마석을 오벨리스크 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사전에 마제에게 지시를 받은 모양이었다.


쇳덩이 용접되는 소리를 내며 하얀 화염 속으로 밀려 들어간 집마석은, 어느덧 절반 이상이 녹아 있었다.

하늘을 뒤덮은 비단 구름도 3분의 2 이상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야! 저 새끼 뭐 하는 거야!”


표범 형상의 마물 하나가, 마치 나무를 타고 오르듯 오벨리스크를 타고 오르는 걸 보며, 뼈다귀 마물이 신경질을 냈다.


“몰라, 그냥 신경 꺼, 우린 빨리 이거나 녹이자고! 힘들어 죽겠어!”


온몸으로 집마석을 밀며 뼈다귀 마물이 고래고래 소래를 질렀다.

표범 마물을 보던 해골 마물은 ‘툇!’ 침을 뱉더니 다시 집마석을 밀기 시작했다.


어느덧 오벨리스크를 끝까지 기어 올라간 표범 마물은,

뾰족한 끝에서 올라오는 하얀 연기가 신기한 듯, 연신 손을 연기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럴 때마다 붉은 가루 같은 게 표범의 손에 잔뜩 묻었다.


‘크르르르.’


그르렁 거리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표범 마물. 긴 혀를 내밀어 자신을 손을 핥았다.

그러자 마물의 몸에서 에테르 화염이 ‘화르륵’ 일었다.


‘캬아아아!’


그 쾌감에 하늘을 향해 한껏 입을 벌리며 포효하는 표범 마물.


그때, ‘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뭔가가 표범 마물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마물의 이마 한가운데에 은빛 화살이 튀어나와 있었다.


“빠, 바빠빰~ 빠바 바빠빰빰~”


이어 힘찬 나팔 소리가 천계 공간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며 메아리쳤다.

동시에 엄청난 숫자의 은빛 화살들이 하늘을 뒤덮으며 날아들었다.


‘우우우우...’


화살을 눈치챈 마물들이 하늘을 보며 나지막이 신음소리를 냈다.


*


“바빠빰~”


길게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드는 리.

머리를 세차게 흔들자, 어느새 바로 앞까지 날아온 마제의 화염이 보였다.

하지만 피하기엔 늦었을뿐더러, 더 이상 에테르가 모아지지도 않았다.

눈을 질끈 감는 리.


“젠장!”

“리!”


비토의 비명과 거의 동시에 ‘펑!’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더운 바람이 리의 몸을 훅 덮쳤다.


‘후두두두둑!’

‘크아악!’

‘아악!’


이어 우박 퍼붓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더니, 마물들의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응?”


뭔 일인가 싶어 리가 천천히 눈을 뜨자, 몸 천체를 가리는 커다란 원판 같은 게 리의 앞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원판이 마제의 화염을 막아준 모양이었다.


옆을 보자 하얗게 빛나는 수백 발의 화살이, 바닥에 비스듬히 꽂혀 있었다.

화살은 늦가을 추수를 앞둔 벼들처럼, 끝도 없이 길게 이어졌다.

중간중간 화살에 관통된 마물들이, 꼬치처럼 화살에 꽂힌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리... 저, 저, 저기 하늘 봐봐.”


비토가 말을 더듬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화살 무리에서 시선을 거둬 천천히 하늘을 보는 리.

리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하늘의 10분의 1을 가릴 만큼 어마어마한 크기의 거인이, 천계 하늘에 두둥실 떠 있었다.

흰 머리칼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거인은, 발목까지 미끄러지듯 이어지는 연한 하늘색의 가운을 입고 있었다.

가운 안쪽으로 단정히 동여맨 벨트에서 금빛 오오라가 은은하게 퍼져 나왔다.


“리, 일자(一者)야!”


그랬다.

이 세계를 만든 장본인, 모든 신들의 아버지 ‘일자’였다.

대성당 벽화처럼 근육질은 아니었지만, 거대한 석상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아, 아...”


리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니, 그것은 안도의 한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자의 뒤로 백마를 탄 기병대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기병대 중간중간 은빛 화살을 수백 개씩 장착한 ‘광차(光車)’도 보였다.


무리의 선두에는 흰 날개를 활짝 펼친 거대한 남자가 날고 있었는데,

그는 ‘몸은 사람인데 하체는 말’인 ‘반인반수(伴人半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가 뭔가를 부르듯 손짓하자, 리의 앞을 막고 있던 원형판이 ‘휭’ C자를 그리며 날아가, 그의 팔뚝에 달라붙었다.

금빛 오오라가 일렁이는 방패였다.


‘반인반수의 전사’ 뒤로 도자기 빛 갑옷을 입은 기사 셋이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각기 든 금빛 창에서 하얀 화염이 일렁거렸다.


“여기가 어디라고 날뛰는 겐가!”


그때, 천둥 같은 일자의 고함소리가 천계 전체를 진동하며 울려 퍼졌다.

에테르가 실린 일자의 고함이 공간 자체를 흔들자, 마물들이 입과 코에서 용암을 쏟아내며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제에 의해 변신했던 마물 폭탄도, 몸을 부르르 떨더니 팝콘 터지듯 머리가 터져나가며 우르르 쓰러졌다.


“크아아악”

“끼야아아악!”


분위기 파악을 못한 건지, 아니면 일자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건지,

‘익룡형 괴수 베엘제붑’과 ‘말벌형 괴수 아몬’이 일자를 보자마자 괴성을 질러대며 일자를 향해 돌진했다.


일자의 얼굴까지 올라간 괴수들이 일자를 향해 음파와 독을 뿜어 대려던 순간,

빛이 번쩍하더니 ‘반인반수’의 남자가 자리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베엘제붑과 아몬의 몸을 둘러싸고 수십 개의 흰 검기가 일어나, 정신없이 그들의 몸을 베었다.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 ‘반인반수’의 남자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순식간에 잘게 조각난 괴수들의 잔해는, 신기하게도 떨어지며 하얀색 민들레 꽃씨로 변했다.

비단 구름이 뿜어내는 입자들과 뒤섞여, 나풀나풀 대지를 향해 쏟아졌다.


“오오, ‘천제(天帝)’까지 드디어!”


대사제가 대성당 벽을 짚고 일어서더니, 하늘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곳곳에 숨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던 천계의 영혼들도, 쭈뼛쭈뼛 길가로 걸어 나왔다.

일자를 모습을 확인한 영혼들은, 두 손을 모으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몇몇 영혼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안도의 눈물까지 흘렸다.


“하아, 됐어, 된 거야.”


자신의 왼쪽 어깨를 부여잡은 채, 리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압도적인 일자의 힘을 확인하자마자, 긴장이 탁 풀리며 다리에 힘이 빠졌다.


“콜록콜록, 콜록.”


바닥에 주저앉은 채, 리가 검붉은 피를 뱉어냈다.

얼른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내는데, 손가락이며 팔이며 사시나무 떨듯 떨려왔다.

왼쪽 어깨는 이제 불덩이로 휘젓고 있는 듯 고통스러웠다.


“리, 괜찮은 거야?”


비토를 보며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리.

리의 새파래진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괜찮아. 내 일은 이제 끝났어. 우리는 유니 선배나 찾으러 가자고.”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서는 리.

몇 걸음 걸어가다가 다리가 꺾이며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순간 하늘이 노래지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리!”

“웃싸!”

그때, 어디선가 검은 그림자가 ‘휙’ 리 곁으로 다가오더니, 잽싸게 리의 겨드랑이에 목을 밀어 넣었다.

덕분에 리는 쓰러지지 않고 다시 중심을 잡았다.


흠칫 놀라며 옆을 바라보는 리.

누군지 알아보기도 전에, 익숙한 ‘구린내’가 먼저 리의 코를 덮쳐왔다.


늘 맡아왔던, 아주 지독한 구린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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