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쌰!”
리가 비틀거리며 쓰러지려던 순간, 어디선가 검은 그림자가 휙 다가와 리의 겨드랑이에 목을 밀어 넣었다.
흠칫 놀라며 옆을 바라보는 리.
누군지 알아보기도 전에, 익숙한 ‘구린내’가 먼저 리의 코를 덮쳐왔다.
“응?”
목을 뒤로 빼며 옆을 보자, 환생 관리자 고글을 쓴 남자가 리를 보며 씩 웃고 있었다.
“일권 선배!”
그랬다, ‘원 빤치 쓰리 강냉이’ 일권이었다.
리를 부축해 쓰러진 기둥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은 일권은, 고글을 벗으며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후와, 아따 죽겄소, 잉.”
“선배! 살아 있었군요!”
“암만, 자네 뒤치닥거리 할라믄 꿋꿋이 살아 있어야쟤.”
일권이 냄새나는 초록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왐마, 좀 비켜봐야!”
일권의 초록 가방 위로 ‘새끼 오랑우탄’이 매달려 있었다.
중간계에서 일권만 보면 쫓아다니던 오랑우탄이, 가방 안에 한껏 머리를 밀어 넣고 있었다.
일권이 입을 비죽거리며 오랑우탄을 피해 고글을 집어넣었다.
“난리통에 결국 붙잡혔나 보네요.”
“잉, 딴 거 신경 쓰다가 잡혀 부렀쟤. 그나저나 자네 꼴이 참말로 볼만 허요. 이 많은 마물들을 자네 혼자 상대 할라 했는가. 어깨에 그 피는 또 뭐시고.”
“콜록 콜록, 뭐 어떻게 해보겠다는 건 아니고, 영혼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잖아요. 하하. 명색이 환생 관리자인데.”
리가 일권을 보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일권이 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리의 장딴지를 발로 툭 찼다.
“워메 환생 관리자가 무슨 감찰사라도 되는가. 바본 줄 알았드마, 인자 본께 똥멍청이구마. 이랄줄 알았으믄, 소환하겄다고 애쓸 필요도 없었는디. 허미.”
“소환이요? 저를요?”
“뭐, 그란 것이 있다고.”
일권이 재차 리의 머리를 쥐어박자, 비토가 달려들어 일권의 머리카락을 잡아 뜯었다.
그러자 일권이 고개를 이리저리 피하며 비토를 손으로 쳐냈다.
“저리 안 가냐? 이 날파리 같은 시키!”
“저분이 ‘일자’ 맞죠? 선두의 기사들은 ‘천제와 천계 삼대장’ 같고요.”
리가 왼쪽 어깨를 부여잡은 채 하늘을 바라봤다.
다행히 지혈이 된 듯, 어깨에선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았다.
일권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오호, 쪼까 공부 좀 했는갑제. 그라제. 쩌것이 일자고, 쩌것이 천제와 꼬붕들이제. 겁나 쎄다고 소문난.”
“휴, 그럼 됐네요. 이제 저들이 알아서 하겠죠?”
“그라것지.”
“무리했더니 엄청 피곤하네요. 우리는 유니 선배나 찾아서 얼른 가자고요. 우리 중간계로.”
“...”
무릎을 짚은 채,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리.
아직도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걱정스레 자신을 보는 비토에게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유니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돌아섰다.
*
“그 더러운 짓을 멈추지 못할까!”
일자가 오벨리스크 쪽을 바라보며 고함을 질렀다.
오벨리스크 앞에는 살아남은 마물들 몇몇이 여전히 집마석을 밀어 넣느라 여념이 없었다.
집마석은 이제 거의 다 태워져 10분의 1 정도만 남아있었다.
일자가 대성당 쪽을 향해 손바닥을 살짝 휘젓자, 푸른색의 커다란 소용돌이가 일어나 대성당과 오벨리스크 쪽으로 몰아쳤다.
‘크아악!’
오벨리스크 근처에 남아있던 마물들이 소용돌이에 휩쓸려 허공으로 날아갔다.
남은 집마석 조각도 맥없이 휩쓸려 날아갔다.
강력한 송풍기로 낙엽들을 불어내듯, 대성당 주위가 단번에 말끔해졌다.
“일자시여, 암형계의 마제 인사드립니다. 크르르르.”
거대한 ‘화염 표범’ 상태의 마제가 일자의 가슴까지 날아올라, 일자 앞에 고개를 숙였다.
일자 옆의 선 천제가 그를 보며 눈빛을 번쩍거렸다.
“어찌 그 더러운 입에 내 이름을 올리는가!”
일자가 고함을 치자, 공간이 일그러지며 ‘진파’가 마제를 향해 훅 날아들었다.
“곧 광마... 흡!”
말하다 말고 진파에 정통으로 맞은 마제는 한참을 뒤로 밀려나더니, 변신조차 풀려 해골 갑옷 차림으로 되돌아왔다.
“크윽.”
밀려나지 않으려 최대한 자세를 낮춘 마제가, ‘쿨럭’ 입에서 용암 덩어리를 뱉어냈다.
충격이 적지 않은 듯, 가슴을 부여잡은 채 나지막이 기침을 했다.
“고작 미물 몇을 데려와 나의 거처를 더럽히다니. 광운이 그리하라 시키더냐! 광운은 어디 있는가? 네 간악한 기운이 느껴지거늘. 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까!”
노기(怒氣) 어린 일자의 호통이 천계의 공간 전체를 재차 뒤흔들었다.
*
“광운신? 광마? 광마가 여기 있다고?”
짧은 팔로 양쪽 귀를 막은 채, 비토가 리의 머리 위로 올라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광마? 광마라면 암형계로 쫓겨났다던 그 광운신?”
“그래! 그 광운신! 근데 어디 있다는 거야? 내 눈엔 안 보이는데? 광마까지 왔다면, 진짜 보통 싸움이 아닌 건데. 이거 완전히 ‘2차 왕자의 난’이구만...”
“2차 왕자의 난이라... 휴, 그냥 신경 끊자고, 비토. 광마고 뭐고 이젠 내가 먼저 죽겠어. 선배, 우리는 어서 가자고요. 유니 선배가 목 빠지게 기다리겠어요.”
길게 한숨을 내쉰 리가, 일권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 순간, 뭔가가 리의 발 앞에 툭 떨어졌다.
“응?”
흠칫 놀라며 리가 아래를 보자, 초록색 가방이 발 앞에 놓여있었다.
일권의 구린내 나는 초록 가방이었다.
“왜요, 뭐 꺼내게요?”
리의 질문과 동시에, 가방 뒤에 매달려 있던 새끼 오랑우탄이 가방에서 얼굴을 ‘쑤욱’ 빼내더니, 뭔가를 자기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우우! 우우!”
오랑우탄의 손에는 어른 주먹 만한 ‘심장 모형’이 들려있었다.
모형 표면에는 파란색의 문자 같은 게 잔뜩 새겨져 있었다.
모형을 빼자마자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게, 아마도 저게 가방 구린내의 원흉인 모양이었다.
“윽! 냄새!”
얼른 코를 막으며 인상을 찌푸리는 리.
“내 아까 고글 넣음서 열어 뒀는디, 인자 찾았는가. 고생했네. 고것 땀시 나를 그라고 쫓아 댕겼는 갑제? 효자가 따로 없소, 효자가.”
“오오! 오!”
새끼 오랑우탄이 탄성을 지르며 심장 모형을 치켜들자,
모형을 뒤덮은 문자가 갑자기 파랗게 빛나더니, 천천히 심장에서 떨어져 나왔다.
동시에, 오랑우탄의 손등이 빨갛게 빛나더니, 어떤 문자 같은 게 튀어나왔다.
심장의 파란 문자와 손등에서 나온 빨간 문자는, 둘로 분해된 조각처럼 허공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닫을 폐(閉)’라는 글자였다.
완성된 문자는 하얀빛을 뿜어내더니 아지랑이 일듯 사라져 버렸다.
“뭐야, 저게 대체...”
눈이 동그래진 채 혼잣말하는 비토.
그때, 멈춰있던 심장 모형이 갑자기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크기도 아까보다 조금 더 커졌다.
그러다 굵은 혈관 하나에서 ‘울컥’ 무언가를 뱉어냈다.
손가락 두 개 정도 크기의 하얀색 덩어리였다.
“잘 빌려 썼네. 덕분에 티 안 나게 숨겨부렀어. 멈추기 전에 얼른 어미한테 꽂아 주소. 내 얼음 속에 잘 보관해 두라 해뒀응게.”
일권이 바닥에 떨어진 하얀 덩어리를 집어 들며 말했다.
손에 심장을 움켜쥔 오랑우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마물들이 밀려드는 천승문을 향해.
“뭐야, 쟤는 왜 저래? 그리고 그건 뭐예요?”
리가 인상을 쓰며 묻자, 일권이 흰 덩어리를 눈높이로 들어 올리며 리에게 다가갔다.
손가락 두 개 정도 크기의 납작한 석고조각처럼 보였다.
“잉, 긍게 이거시 말이쟤. 하하하하.”
능글맞게 웃기 시작하는 일권. 그러다 갑자기 리의 목덜미를 콱 움켜쥐었다.
조각을 쥐지 않은 다른 손으로.
“컥!”
“리!”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천천히 리를 위로 들어 올리는 일권.
그는 평소의 장난기 섞인 표정 그대로, 이빨을 보이며 웃었다.
일권에게 목을 붙들린 채, 리가 다리를 흔들며 버둥거렸다.
“서, 서, 선배... 왜... 이러는...”
얼굴이 벌게진 리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손을 풀어내려 힘을 줬지만, 급소를 눌린 듯 조금도 에테르가 모아지지 않았다.
비토도 달려들어 일권의 손가락을 깨물었지만, 역시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하하하하하.”
리를 치켜든 채, 호탕하게 웃는 일권.
그 순간, 조각을 감싸고 있던 흰 막이 위에서부터 풀리기 시작했다.
마치 촘촘히 감아놓은 털실이 풀리는 것처럼.
막이 풀리자,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을 듯 새까만 막대 같은 게, 그 속에서 부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동시에 일권의 목 뒤, ‘뒤집어진 태양’ 문신이 은은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
3년 전. 암형계 외각 ‘통곡의 강’ 속.
강물에 닿아 식어버린 용암의 부유물들로, 강 속은 흙탕물처럼 뿌옜다.
그 속을 한 인간형 마물이 다 해진 옷을 펄럭이며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몸은, 용암의 열 때문인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흙바닥 이곳저곳에 손을 찔러 넣으며 무언가를 찾고 있던 마물은, 이내 뭔가를 발견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멈췄다.
손을 빼자, 머리가 다섯 달린 뱀장어 같은 괴물이 손에 붙잡혀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 머리부터 잘근잘근 씹어먹는 마물. 뱀 머리 하나가 마물의 윗입술을 깨물었지만 개의치 않고 씹어먹었다.
‘두두두두드.’
한창 맛있게 먹고 있는데,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듯 강 전체가 거세게 진동하다가 멈췄다.
크고 작은 거품들이 우르르 수면으로 올라갔다.
먹다 말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마물.
긴 앞 머리카락이 물결에 흔들리며 얼굴이 드러났다.
깡말라 볼이 쏙 들어간 앳된 청년의 얼굴이었다.
꼬리까지 맛있게 먹고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려는데,
마치 ‘등받이 없는 의자’처럼 불룩 솟아오른 바닥에서, 뭔가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조금 전까진 평평했던 바닥이었다.
“응?”
호기심에 조심스럽게 다가가, 반짝이는 걸 살펴보는 마물.
수정같이 작고 뾰족한 뿔들로 둘러싸인 돌멩이가, 흙 속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집어 들어 자세히 보니, 반지 같이 작은 원형 고리들이 서로 엇갈리며 돌멩이를 감싸고 있었다.
신기해서 이리저리 돌려보는데, 순간 고리 하나가 ‘탈칵’ 돌아가더니 돌멩이에서 무지갯빛 섬광이 쏟아져 나왔다.
인상을 쓰며 얼른 눈살을 찌푸리는 마물.
빛은 멈추지 않고 점점 더 밝아지더니 그대로 마물을 집어삼켰다.
‘우워어어어!’
마물이 강물 속에서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질렀다.
동그란 거품들이 그의 입에서 우르르 몰려나와 수면 위로 올라갔다.
*
“후아, 역시 나는 여그가 좋아부러. 이 매캐한 유황 냄새, 월매나 좋탄가.”
일권이 용암이 굳어 형성된 둔덕 위에 서서, 하늘을 향해 양팔을 쫙 펼쳤다.
환생 관리자가 입는 갈색 가죽조끼가 좌우로 쭉 늘어났다.
짙은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에서 이따금 주홍빛 번개가 지지직거렸다.
“좋아하시긴 좋아하시나 봅니다. 암형계로 오실 때마다 여길 들르시는 걸 보면.”
해골 장식 갑옷을 입은 남자가 일권의 뒤로 다가와 섰다.
그가 늘어뜨린 화염 망토 위로 벌레가 지나가다가 ‘화르륵’ 타올랐다.
“여그만 오면 희한하게 맘이 차분해져.”
“그러게, 이 좋은 곳을 놔두고 뭐 하러 중간계까지 가서 고생하십니까.”
“겸사겸사 아니겠는가. 여그가 편하긴 헌디, 너무 따분하기도 하고. 이것 땀시 에테르를 억누를라믄 요로고 있는 게 수월하기도 허고.”
일권이 손으로 뒷목을 문지르며 말했다.
일권의 뒷목엔 태양 문신이 그려져 있었는데, 중앙의 눈과 입이 위아래가 바뀌어 있었다.
꼭 스마일 아이콘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문신 한가운데에 코처럼 생긴 검은 점 하나가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도 암형계에서 관리하시는 게 더 편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괜찮아, 재밌기도 헌게. 중간계서 영혼들 환생시키는 거.”
한참 강 풍경을 즐기던 일권은, 투닥거리는 소리를 듣고 육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일권이 선 둔덕 아래로, 부채꼴 모양의 널따란 공터가 강을 바라보며 펼쳐져 있었다.
용암이 녹아 만든 낮은 구릉지였다.
공터 중앙에는 쇠몽둥이를 든 마물 네댓 마리가, 둥글게 모여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고,
구릉지 건너편으론 커다란 흰털 오랑우탄들이 삼삼오오 모여 새끼의 털을 골라주고 있었다.
“뭐시여, 뭣들 하는디 저라고 있는겨.”
“흠, 아마도 죄수를 처형하는 것 같은데요. 저기 보세요.”
마제가 손가락으로 공터 한쪽을 가리켰다.
공터 끝에서부터 쥐 형상을 한 마물이 죄수 하나를 중앙으로 끌고 오고 있었다.
죄수는 두 손, 두 발이 굵은 쇠사슬에 묶인 상태였다.
“오호, 처형! 간만에 눈요기 좀 하겄는디.”
쥐 마물은 죄수를 공터 중앙에 무릎 꿇리고는, 머리에 보자기 같은 걸 씌웠다.
그때까지 가위바위보를 하던 마물 중 하나가,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듯 주먹을 치켜들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더니 쇠방망이를 허공에 ‘부웅, 부웅’ 돌리며 죄수에게 다가갔다.
죄수 옆에 선 그는, 거리를 재듯 멀리 통곡의 강 쪽을 잠시 바라보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쇠몽둥이를 휘둘렀다.
마치 야구라도 하듯이.
‘깡!’
알루미늄 배트에 맞은 야구공처럼, 죄수의 머리가 한참을 날아가 통곡의 강 속에 빠졌다.
‘와아아!’ 다른 마물들이 그 모습을 보곤 탄성을 질렀다.
“에이, 머리가 저라고 멀리 날아 갈라고. 그 자리서 바로 터져 불쟤.”
“여긴 암형계 아닙니까. 안 되는 게 어딨겠어요.”
마제가 팔짱을 낀 채, 피식 웃었다.
연이어 다른 쥐 마물이 쇠사슬에 묶인 죄수 하나를 또다시 끌고 나왔다.
앞머리가 코까지 덥수룩하게 자라있고, 온몸이 빼빼 말라 뼈만 남은 인간형 죄수가, 비틀비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벌 같은 것에 쏘인 듯, 그의 윗입술 전체가 퉁퉁 부어 있었다.
마물이 죄수를 무릎 꿇리자,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언덕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일권과 눈이 마주쳤다.
“응?”
순간, 송곳으로 찌르는 듯 날카로운 통증이, 일권의 뒷목을 파고들었다.
“뭐시여?”
인상을 쓰는 일권.
뒷목에 그려진 태양 문신이 갑자기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