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 절대 공허검

by 무딘

*


“컥!”


일권에게 목덜미를 붙잡힌 채, 다리를 흔들며 버둥거리는 리.

그때 일권이 다른 손에 쥐고 있던 하얀 조각이, 실타래가 풀리듯 흰 막을 벗기 시작했다.

덮개 안으로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을 듯 새까만 막대가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자, 인자 안 막을랑께, 인역 뜻대로 하쑈!”


일권이 손을 놓자, 흰 막을 완전히 벗어버린 조각은 리와 일권의 주위를 위성처럼 두 바퀴 ‘빙글’ 돌았다.

그리곤 리의 정수리 위에 멈춰 서더니 천천히 자전하기 시작했다.


“놔! 놓으란 말이야, 이 자식아!”


위기감을 느낀 비토가 일권에게 달려들어 연신 물성화된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일권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저 조각만을 바라봤다.


“월운! 임자의 마지막 주문은 내 안즉 생생히 기억 한당께. 하하하하. 오막사라무, 달라다라, 계르디달타, 보르디름! 오막사라무, 달라다라, 계르디달타, 보르디름!”


일권이 주문을 외우자, 조각의 자전 속도가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회전했다.

두 사람의 주위로 거센 바람이 일었다.


그러다 순간, ‘펑!’ 소리와 함께 미세한 정육면체로 산산이 부서진 조각은, 리의 눈, 코, 귀, 입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크허헉”

“리!”


미세 조각들을 빨아들이며, 리는 하얗게 눈을 뒤집은 채 미친 듯이 몸을 떨었다.

그러다 갑자기 온몸을 대자로 쫙 펼쳤다.

리의 왼팔에 감긴 마지막 자물쇠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하얗게 빛났다.


“자, 가라고! 언능!”


일권의 재촉과 동시에 리 팔목에 감긴 마지막 자물쇠가 하얀 섬광을 뿜어대며 천천히 돌아가더니, 반 바퀴쯤 돌아 우뚝 멈춰 섰다.


‘때에에에에엥!’


예의 맑고 둔중한 종소리가 또다시 울려 퍼졌고, 빛을 잃은 자물쇠는 먼지처럼 변해 바람에 흩날렸다.

걱정스레 리를 바라보던 비토도 갑자기 외형이 희미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그라제, 그것이여!”


자물쇠가 열리자마자 리의 몸은 오래된 시체처럼 핏기를 잃은 채 굳어버렸다.

체온은 점점 더 떨어져, 마치 냉동고에라도 들어간 듯 새하얀 성애가 그의 몸을 뒤덮었다.

그러다 단전부터 점점 붉게 달아오르더니 다시 한번 미친 듯이 온몸을 떨어댔다.


몸 전체가 용암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무렵, 리의 입과 눈과 귀와 코에서 갑자기 검은색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섬광에 닿은 마물들이 형체도 없이 순식간에 녹아버렸다.

그러다 ‘쩡!’ 소리와 함께, 리의 몸이 수억 개의 미세한 정육면체로 와르르 부서져 내렸다.


“오쇼! 나의 오랜 벗이여!”


일권의 목소리를 듣기라도 하듯, 부서진 조각들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잠시 허공을 부유하다가, 이내 일권의 손 앞,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수억 개의 입자들이 빠르게 한 점으로 응축되며, 이번엔 하얀빛과 충격파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그 강도가 어찌나 강렬했던지, 천계의 바닥 전체가 ‘구구구’ 거칠게 진동했고,

심지어 하늘에 떠있던 일자와 천계군들 마저, 진파에 몸이 요동쳤다.


“응?”


충격파를 느끼고 바닥을 내려다보는 일자.


“광운, 네 이놈! 거기 있었더냐!”


일자가 광마, 아니 일권의 위치를 눈치채는 순간, 일권은 하얀빛을 뿜어대는 뭔가를 눈앞에 치켜들고 있었다.

그러다 일자의 목소리를 듣고는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미 늦어부렀소. 오랜만이요, 아부지.”


일권의 손에는 테두리는 하얗게 빛나는데 안쪽은 새까만 ‘장검’이 들려있었다.

마치 일식(日蝕) 중인 태양을 길쭉하게 늘린 것처럼.


검 끝이 갈퀴 마냥 세 갈래로 갈라진 검날 주위로, 일곱 가지 색의 작은 구슬들이 달처럼 제각기 공전하고 있었다.

구슬들 사이로 파란 번개, 노란 번개, 붉은 번개가 어지럽게 튀었다.


“절대 공허검!”


빛의 정체를 눈치챈 일자가, 눈썹을 V자로 치켜뜨며 인상을 썼다.


“와하하하하!”


‘절대 공허검’을 치켜든 일권, 아니 광마가 천계가 떠나가라 웃어댔다.

그가 웃을 때마다 그의 몸이 점점 커지더니, 환생 관리자 옷이 ‘쫙’ 찢어지며 ‘하얀색 가운’을 걸친 ‘신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광마의 가운 형태는 일자의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

차이가 있다면, 광마도 다른 신들처럼 11자 형태의 금색 영대를 가슴 앞으로 드리우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광마가 커질 때마다 손에 든 공허검도 덩달아 커지며 강렬한 번개가 튀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번개는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고,

폭발에 휩쓸린 영혼과 마물들이 아득히 멀리 날아가 먼지처럼 흩어졌다.

번개가 튄 자리엔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웅덩이가 파였다.


“형제들이여, 광마께서 오셨다!”


광마가 하늘로 날아올라 일자를 마주 보고 서자, 잽싸게 광마의 곁으로 날아온 마제가 화염창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일자의 등장으로 잔뜩 위축되어 있던 마물들이, 하나같이 무기를 치켜들며 ‘우워어! 우워어!’ 고함을 질렀다.


“절대 공허검! 그 흉악한 물건을 어찌 다시 만들었을꼬.”

“하하하하. 혹시나 다 맹글기 전에 들킬까, 내 솔찬히 걱정했지라. 암또 모르게 할라니 월매나 번잡스랍든지. 그나마 ‘월영이 찜한 종자’가 똥멍청인지라 쪼까 수월혔소. 길만 터주믄 물불 안 가리고 막 뛰어들어 붕께. 하하하.”


공허검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바라보던 광마가 허공을 향해 가볍게 검을 내리긋자,

‘쿠구구구궁’ 공기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검은 검기가 바닥으로 내리 꽂혔다.

‘쿵!’ 검기에 맞은 대지는 ‘쩌저적’ 소리를 내며 둘로 갈라지더니, 갈라진 틈이 수평선을 향해 끝도 없이 뻗어 나갔다.


‘으아아악!’


근처에 있다가 충격에 휩쓸린 수만 명의 영혼들이, 검기가 만든 거대한 낭떠러지 아래로 우르르 떨어졌다.


“과거의 잘못을 또다시 반복하려는 게냐! 어리석은 자여.”

“참말로 아부지도. 생각을 쪼까 해보쑈. 뭐 땀시 이 검이 다시 내 손으로 돌아왔겄소. 암만 생각해 봐도 이것은 아부지가 좋아라 하는 ‘순리’ 아니겄소. 아부지가 맹근 세계가 실패했응게, 나, 광운더러 다시 맹글라는 의미 지라.”


갈라진 검 끝으로 손가락을 콕콕 찌르며 대답하던 광마는, 이번엔 머리 위, 하늘을 향해 공허검을 그었다.

그러자 붉은 번개가 ‘콰광!’ 소리를 내며 튀어 나가더니, 하늘을 그대로 찢어버렸다.


찢어진 하늘 위로 천계 밖의 무한히 검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 틈으로 파란색 하늘이, 하수구 물 빠지듯 천천히 빨려 나갔다.


“그냥, 받아들이쑈. 아부지 좋아라 하는 그 순리 말이요.”


광마가 씩 썩은 미소를 지으며, 일자를 향해 공허검 끝을 겨눴다.

검 주위를 돌던 구슬 하나에서 ‘화르륵’ 불길이 일며, 검 주위에 소용돌이 같은 화염을 만들었다.


“멈춰라!”


그때, 위기감을 느낀 천제가 일자의 앞으로 나서며 광마와 마주 섰다.


“오호!”


광마를 노려보며, 천제는 양팔을 벌린 채 에테르를 끌어모았다.

그러자, 천제의 모습도 신들처럼 하늘의 10분의 1 크기로 점점 커졌다.


동시에 천제 뒤에서 대기하던 세 천사장이 순간 빛 덩어리로 변하더니, 천제의 몸에 차례차례 달라붙었다.

하나는 금빛이 영롱한 갑옷으로, 다른 하나는 양 끝이 송곳처럼 뾰족한 쌍창으로, 마지막 하나는 천제가 들고 있던 방패를 감싸더니 태양 모양의 거대한 방패로 변했다.


“이자는 제가 맡겠습니다, 일자님. 물러서시죠.”

“하하하하, ‘이자는’은 반말인디? 자네가 근자에 신의 경지에 도달혔다는 ‘빛의 창기사’인가? 아따, 싸가지가 바가지구마. 대사형을 대하는 태도가 참말로 불손혀 부러.”


천제가 활짝 펼쳤던 날개를 접으며, 광마를 향해 창끝을 겨눴다.

커다란 방패 위로 창을 얹은 게, 당장이라도 돌진할 기세였다.


“워워, 인사 정도는 해도 안 쓴가? 매너가 꽝이구마. 그랴, 그냥 직접 맛 보드라고. 이 공허검이 월매나 매서븐지.”


광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제가 광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방패로 온몸을 가린 천제는 광마가 창의 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빠르게 창을 찔러 넣었다.

순식간에 수백 개의 창끝이 광마를 향해 날아왔다.


“훗, 웃샤!”


천제의 공격을 비웃기라도 하듯, 광마가 자리에 멈춰 선 채 빠르게 몸을 움직여 창끝을 죄다 피했다.

심지어 얼굴엔 가벼운 미소마저 띠었다.


“라잇 브레스(light breath)!”


순간, 천제의 방패가 하얗게 빛나더니, 거대한 빛의 화염이 광마를 향해 뿜어져 나갔다.

동시에 천체의 창끝에 볼펜 촉 같은 하얀 ‘에테르 볼(ball)’이 만들어졌다.

빛의 화염을 피해 광마가 몸을 움직이는 순간, 바로 에테르 볼을 찌를 계획이었다.


“그게 단 겨?”


그때, 갑자기 천제의 등 뒤에서 광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뒤를 돌자, 갑자기 자신이 쏜 빛의 화염이 자신을 향해 훅 날아오고 있었다.


얼른 방패를 들어 아슬아슬하게 화염을 막는 천제.

‘쿵’ 강렬한 충격파가 천제의 몸을 뒤흔들었다.


빛의 화염이 막 뿜어져 나오려는 찰나,

광마가 주변 공간을 빠르게 왜곡시켰고, 왜곡된 공간을 휘어 돌아온 화염이 되려 천제에게 쏟아진 것이었다.

그 충격에 창 끝에 맺혔던 에테르 볼이 튕겨져 나가, 천계 바닥에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럼, 이건 워쩔랑가!”


순간 광마가 미끄러지듯 다가오며, 천제의 허리춤에 공허검을 그었다.

얼른 방패를 내려 공허검의 궤적을 가리는 천제. 동시에 창을 쥔 손목을 ‘핑그르르’ 돌렸다.

검이 방패에 막히자마자 그대로 쫓아가 광마의 목을 관통시킬 생각이었다.


“응?”


그런데 공허검이 막히긴커녕, 멈추지 않고 그대로 천제의 방패를 지나쳐 갔다.

마치 방패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깜짝 놀라 방패를 바라보자, 천제의 방패 중간 부분이 마치 지우개로 지운 듯 깔끔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방패뿐이 아니었다.

자신의 허리조차 말끔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공허검이 훑고 지나간 자리의 물질들을 죄다 흡수해 버린 것이었다.


“약해!”


천제가 당황해하고 있는 사이, 천제를 둘러싼 공간 여기저기서 갑자기 수십 개의 공허검이 동시에 쑤욱 튀어나오더니, 천제의 온몸을 그대로 관통했다.


“크허헉!”


피를 토하는 천제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광마가 허공에 찔러 넣었던 공허검을 뽑았다.

공허검이 시공간을 왜곡시켜 천제의 주변에서 동시에 튀어나왔던 것이다.


광마가 검을 뽑자, 천제의 몸 여기저기에 검은 구멍이 뚫렸다.

뚫린 구멍에서 흰 빛줄기가 레이저처럼 뿜어져 나왔다.


“허미, 딱 고슴도치구마.”


두 눈을 하얗게 뒤집은 채 정신을 잃은 천제는,

몸이 점점 줄어들더니 커다랗게 입을 벌린 낭떠러지 속으로 맥없이 떨어졌다.


“뭐시여, 고작 이 정도여? 모처럼 신의 경지에 도달혔다길래, 쪼까 기대했드마, 이거 완전히 허풍선이네. 자네는 낙젤세, 낙제여.”


광마가 입을 비죽거리더니, 일자 옆에 길게 늘어선 천계병들을 향해 공허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거대한 붉은 검기가 마치 천둥처럼 지직거리며 날아가 천계병들을 덮쳤다.


“우와아아악!”


번개에 맞은 천계병들이 순식간에 몰살된 것은 물론,

그들 뒤쪽 하늘이 마치 캔버스를 가로로 찢은 듯 볼썽사납게 갈라졌다.

그 틈으로 또다시 파란 하늘이 하수구 물 빠지듯 빨려 들어갔다.


“네, 이놈! 그만두지 못할까.”


‘쩌적, 쿵!’


순간 하늘에서 엄청난 크기의 번개가 광마의 머리 위로 내리 꽂혔다.

흠칫 놀란 광마가 얼른 공허검으로 머리를 가렸다.

그러자 공허검에서 검은 화염 같은 게 확 퍼져나가더니, 일자의 번개를 그대로 삼켜버렸다


“워허메, 놀래라. 노인네도 참.”


그때, 마물들 사이에서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우워어!’ 다시 한번 거대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광마의 등 뒤로 화운신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거대한 ‘ㄱ’ 자 화염낫을 손에 쥔 화운신은,

수운신과의 전투가 치열했던 듯, 볼 한쪽엔 깊이 배인 상처가 남아있었고 오른쪽 어깨가 터질 듯 퉁퉁 부어 있었다.

게다가 허벅지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상처에서는 용암이 뚝뚝 흘러내렸다.


“여, 사제, 좀 늦었구마.”

“킁! 딱 맞춰 왔는데.”


화운신이 ‘킁’ 콧방귀를 뀌자, 그의 코에서 기다란 화염이 땅바닥을 향해 뿜어져 나왔다.


“어찌, 어찌 이리도 어리석은가. 결국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건가?.”


광마와 화운신을 마주 보고 선 일자가, 눈을 감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하, 인자 우짤랍니까. 있으나 마나 한 보디가드도 없고, 전번처럼 훼방 놓을 ‘월영’도 없는디. 하하하하.”


광마가 공허검을 두 손으로 잡고, 일자를 향해 칼 끝을 다시 겨눴다.

화운도 긴 화염낫을 꽉 움켜쥐었다.

마주 선 세 신들 주변의 공기가, 달궈진 아스팔트 위 공기처럼 거세게 일렁거렸다.


그때, 눈을 번쩍 뜨는 일자.

하얀 에테르가 그의 눈에서 회오리치며 뿜어져 나왔다.


“말이 많은 건 여전하구나. 좋다, 오너라. 이것이 순리인지, 네 놈들의 욕심인지, 내 직접 확인하겠노라.”


기도하듯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 일자가 에테르를 급격히 끌어올렸다.

천계 공간 전체가 거세게 진동하며, 대지와 건물에 ‘쩌저적’ 균열이 생겼다.

동시에 엄청난 크기의 소용돌이가 대지를 훑으며 일어나더니, 일자의 손끝으로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내 이날을 월매나 기다렸는지 앙가! 앙!”


그때, 일자를 향해 훌쩍 뛰어오르는 광마.

머리 위로 치켜든 공허검이 울부짖듯이 엄청난 번개를 사방으로 튀었다.


‘콰광!’


번개에 맞은 대지가 폭죽 터지듯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이전 19화49화 – 미스터리한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