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 변수

by 무딘

“주문이요?”

“그래, 내 ‘5단계 회전식 자물쇠’를 푸는 주문. 그걸 아는 이는 세상에 둘밖에 없거든. 하나는 나, 그리고 다른 하나는... 쿨럭쿨럭.”


침을 꿀꺽 삼키며, 월운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리.


“나의 아버지, 일자!.”

“일자요?”


놀란 리와 비토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로를 바라봤다.


“그래, 일자. 그건 아버지와 함께 만들었거든. 세상의 어둠을 결박하는 나만의 비기(秘技)로.”


‘쿠구구구궁.’


공간의 흔들림은 갈수록 거세져, 이내 리가 서 있는 절벽까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은 어느새 대부분 뜯어져 나가 밤하늘처럼 검게 변해있었다.


“아무리 조각이 발견돼도 자물쇠를 풀지 못하는 한 코어와 조각은 결합할 수 없단다. 쿨럭쿨럭. 같은 극의 자석처럼 서로 맴돌기만 할 뿐이지.

그런데 여기서 너와 조각들의 결합을 지켜보는데 말이야, 쿨럭쿨럭, 어떻게 된 일인지 조각들이 이미 암호를 알고 있더구나. 다가가기만 하면 풀리도록 조각에 암호가 각인되어 있었어.”


‘오막사라무, 바라미라제.’

‘달라다라, 워제아니’

‘계르디달타, 무제아니’

‘보르디름, 아카사이레’

‘오막사라무, 달라다라, 계르디달타, 보르디름’


순간, 일부로 떠올린 것도 아닌데, 리의 머릿속으로 다섯 가지 주문들이 주르륵 연이어 흘러갔다.

마치 랩이라도 뱉듯이.


“조각과 결합할 때마다 네가 직접 주문을 외우더구나. 심지어 대사제조차 ‘자물쇠 해제 주문’을 알고 있었어. 난 조각의 위치만 알려줬지, 주문까지 알려주진 않았거든. 그래 처음엔 ‘시간이 너무 흘러 결계가 약해져서 그런 게 아닐까’라고 추측했단다. 쿨럭쿨럭, 오판이었지.”


민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월운신.


“그럼, 월운님 이야기는 주문을 아는 다른 한 사람, 곧 일자가 조각에 주문을 새겨 넣었다는 건가요? 하나하나 광마보다 먼저 찾아서? 그래, 조각들이 공허검의 코어와 다시 결합하도록?

말이 안 돼요. 자신을 해치려 들었던 무기를 왜 다시 결합시켜요? 그것도 굳이 광마의 손을 빌려서?”


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껏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월운이 어금니를 깨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세계의 모든 에테르는 일자와 연결되어 있단다. 시냇물이 모여 강이 되고, 강이 모여 바다가 되는 것처럼. 쿨럭쿨럭. 어둠 속에서 물질의 이면을 지켜보는 나 월운만이 아는 사실이야.

그래, 나는 줄곧 의아했단다. 코어와 조각이 결합되며 에테르의 커다란 변화가 생겼을 텐데, 그걸 일자가 눈치 못 챘을 리 없는데, 왜 일자는 막질 않으실까. 이러다 광마가 정말로 공허검을 완성시키면, 또 어떤 피해가 일어날지 모르는데...”

“아! 아! 아! 아!”


그때, 비토가 뭔가 떠올랐는지 손가락을 딱딱 튕기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 의심했단다. 어쩌면 이 모든 게 ‘광마의 계획’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쿨럭쿨럭쿨럭, 어쩌면 그 뒤에 ‘또 다른 의도’가 숨어있을지 모른다고. 그렇게 의심하는 순간, 모든 이상했던 일들이 톱니바퀴 맞듯 하나로 맞물리더구나.”

“리! 리! 대절멸! 대절멸이야! ‘대절멸의 전설’은 광마가 하는 게 아니었어. 일자가, 일자가 하는 거라고!”


비토가 이리저리 날뛰며 고함을 질러댔다.


“일자가...?”


순간, 광장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난쟁이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이 세상을 만든 힘 ‘절대 공허구’가 밤하늘에 뜨는 날, 세상은 다시 무(無)로 돌아가리라!’


동시에 파피루스를 건네어받던 대사제의 온화한 미소도 겹쳐졌다.


‘탐욕이 순결의 그릇을 흘러 넘칠 때,

하찮은 외침들이 고결한 속삭임을 뒤덮을 때,

당연하지 않은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만연할 때,

대절멸의 피눈물이 쏟아지리라.’


이어 영혼들로 빽빽한 길을 꾸역꾸역 걸으며, 대성당을 향해 리 일행을 안내하던, 천계 브로커의 뒷모습도 떠올랐다.


‘휴우우, 그렇죠, 엉망이죠. 천계는 이미 만원(滿員)이예요. 이렇게 된 지 한참 지났는데도, 끊임없이 영혼들이 밀려들고 있어요. ‘저런 사람들까지 영생을 보장받아야 되나’ 싶은 아줌마, 아저씨들이 계속해서 밀려드는데 이 꼴이 안 나겠어요.’


“설마... 설마, 일자가 천계의 영혼들을 모조리 없애려고 광마를...”


리가 한껏 인상을 찌푸린 채 생각을 정리하던 그 순간, 갑자기 ‘떼에에엥’ 종소리가 울리더니,

화염으로 불타오르던 바다가 미세한 정육면체 조각으로 쪼개져, 우르르 어둠 속으로 쏟아져 내렸다.

동시에 리를 둘러싼 공간 전체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리!”


비토가 얼른 리의 스카프 속으로 숨으며 소리쳤다.


“콜록콜록콜록, 그래! 일자는 광마를 이용해 천계, 나아가 이 세계 전체를 정리하려는 거야! 세계를 망가뜨렸다는 오명은 광마에게 뒤집어 씌운 채! 콜록콜록.”


월운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사력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어떻게, 신이, 그럴 수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렇지,

신이 자신을 따르는 영혼들을 없애려 하다니. 그래도 엄연히 자격시험을 통과해 천계로 들어온 영혼들인데.


게다가 거기에 이용당하는 암형계의 마물들은 물론이고,

왜 애꿎은 중간계와 다른 세계의 영혼들마저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이게 과연 창조주가 할 짓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무너지는 월운의 세계를 바라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젓는 리.


“하지만 리! 아직 다 끝나지 않았어. 포기하긴 이르다고! 모든 게 그렇게 일자의 뜻대로 흘러간 듯했지만, 쿨럭쿨럭, 단 하나! 그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어!”

“변, 변수요?”

“그래, 변수! 그거라면 분명 일자를 막을 수 있을 거야! 그래 변수의 존재를 눈치챈 뒤부터, 난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단다! 이 세계 전체, 그리고 모두의 운명과 함께!”

“그게, 그게 도대체 뭔데요?”

“그건 말이야...”


순간, 월운이 서 있던 바닥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리가 얼른 몸을 날려 월운신을 끌어안았다.


리와 월운이 동시에 끝 모를 어둠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갔다.


*


“인자 끝냅시다, 아버지요!”


공허검을 머리 위로 치켜든 채, 광마가 퀘이사의 구체 위로 뛰어올랐다.

그의 발아래로 일자의 하얀 머리카락이 보였다.


“갈!”


기합과 함께 광마가 구체를 향해 공허검을 내리그었다.

여전히 구체 속에서 굳어버린 일자는,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공허검에 당할 판이었다.

공허검이 지나친 궤적을 따라 검은 검기가 번개를 지직거리며 뒤늦게 따라왔다.


“응?”


공허검이 퀘이사의 윗면으로 파고들려는 그때,

마치 탄성 높은 공에 튕긴 것처럼, 갑자기 공허검이 ‘퉁’ 튕겨 하늘로 솟아올랐다.

검을 붙잡은 광마도 덩달아 하늘 위로 끌려갔다.


“뭐시여! 갑자기 뭔 일이래!”


로켓처럼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공허검을 억지로 멈춰 세우는 광마.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공허검을 살피는데, 검 끝이 향하는 하늘 위로 뜬금없이 거대한 ‘은색 달’이 보였다.

새파란 하늘과 어울리지 않는 ‘낮달’이었다.


“저건 또 뭐여?”


순간 달의 중심에서 한 줄기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공허검의 검 끝과 연결되었다.

빛에 닿은 공허검은 검날 주위의 화염과 검은 검기가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검 끝부터 하얗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공허검 주위로 흰 서리가 안개처럼 일어났다.


“왐마, 이 잡것이 뭔 지랄이랴!”


끝까지 공허검을 붙들고 씨름하던 광마는, 손잡이마저 얼어붙자 어쩔 수 없이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하늘에 멈춰 선 채 하얗게 얼어붙은 공허검은, 이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쩌저적’ 소리와 함께 표면에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


“으아아악! 리!”


함께 떨어지며 고함을 지르는 비토.

리가 이를 깨물며 어떻게든 날아보려 애를 썼지만, 끌려 내려가는 속도가 너무나도 빨라 어떻게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 리를 와락 껴안았다.

어느새 리를 향해 돌아선 월운신이었다.

그 품이 너무나 포근해 잠시 떨어진다는 공포마저 잊을 정도였다.


“리, 그게 너란다.”


리를 껴안은 월운신이 리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전음으로 말하는 듯, 떨어지는 와중에도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선명하게 들렸다.


“일자가 놓친 변수, 그게 바로 너라고.”

“네? 그게 무슨...”

“일자는 인간형 마물과 공허검의 코어를 결합시켰어. 멀리 떨어진 조각에게 쉽게 다가가도록 만든 거였지. 하지만 그게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었단다.

이전의 공허검이 그저 에테르 덩어리였다면, 지금의 공허검은 달라. 그 안에 ‘인간의 의지’가 담겨있단다.”

“인간의 의지...”

“그래, 조각과 결합된 너는 놀랍게도 너의 의지로 움직이더구나. 영혼들을 구하고 마물을 물리치기 위해 공허구의 힘을 이용하더구나. 의외였어, 코어에 장악당하지 않고 네가 네 의지로 움직이는 게. 그게 인간이 가진 ‘내면의 힘’인가 싶어 내심 놀라워했지.”

“하지만, 하지만, 전 암형계로 쫓겨난 마물이잖아요. 암형계에서 형벌을 받아야 할 만큼 나쁜 놈이란 거잖아요. 저 같은 놈의 의지래 봐야, 그게 뭐가 대단하겠어요.”

“아니다, 리. 네 과거 따윈 중요치 않아. 인간은 ‘선택하는 존재’란다. 과거가 어떻든 ‘다른 미래’를 선택했다면, 그 미래대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란다.

과거와 미래를 완전히 단절시켜, 이전과 ‘전혀 다르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있단다. 인간만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야.”

“선택...”

“그래, 난 봤다. 네가 선택한 미래를. 위기에 처한 영혼들을 구하고 약자를 위해 나서는. 그래 함께한 사람들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네 과거가 어떻든 그건 ‘과거의 너’ 일뿐이야. 지금의 너는 그렇게 살기로 선택한 ‘환생 관리자, 미스터 리’란다. 네가 선택한 그 미래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거란다.”


월운을 껴안은 채, 잠시 생각에 잠기는 리.

그러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정신없이 흔들리던 세계가 사라지고, 영화 스크린 같은 하얀 화면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위로 지나온 일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처음으로 환생계 속에 들어가 흑백 대지를 보며 깜짝 놀랐던 일,

혼자서 영혼을 환생시키며 가슴 콩닥거렸던 일,

도일의 부채질에 맞고는 한참을 날아가 뒹굴었던 일,

캉캉이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 이빨도 없는 입으로 리의 손가락을 깨물던 일이 떠올랐다.

사자 독수리를 타고 하늘에서 보던 중간계의 평화로운 모습,

길게 뻗은 환생의 숲 대나무가 잎사귀를 비비며 느리게 흔들리는 모습,

두 개의 태양이 서로를 끼고돌며 아름답게 석양을 드리우던 모습들도 한 편의 영화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동시에 화염견, 노파, 마계의 괴수, 암형계 대장군 등, 숱하게 지나온 싸움의 순간들도 하나씩 스쳐 갔다.


환생 관리자들 장난기 어린 표정,

길가에 늘어선 감찰사들의 의심 어린 눈빛,

영귀풀을 팔던 천계 꼬마들의 놀라는 얼굴,

주먹을 치켜들며 위협하던 유니의 개구진 표정,

마지막으로 역사책을 머리에 얹은 채 코를 골던 일권의 모습도 차례차례 이어졌다.


그렇게 환생 관리자로서 살아왔던 지난 몇 개월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가자, 더 이상 다른 어떤 장면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 동안 하얀 스크린만이 눈앞에 가득했다.

마치 환생 관리자로서의 삶만이 리의 전부라 말해주는 것처럼.


“그래, 그래 너란다, 리. 암형계의 마물도, 공허검도 아닌, ‘환생 관리자 미스터 리’, 그게 지금의 너란다.”

“환생 관리자, 미스터 리... 환생 관리자, 미스터 리... 환생 관리자! 미스터 리!”


소리를 지르며 눈을 번쩍 뜨는 리.

리의 눈에서 새하얀 빛이 화염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래! 리! 부탁하마! 이번엔 네가 막아주렴. 내 아버지의 어리석음을.”


리를 안고 있던 팔을 푼 채, 월운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검은 하늘 위에 은빛으로 ‘월(月)’이라는 글자가 나타나더니,

글자 중간에서 흰빛이 뿜어져 나와 리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동시에 리를 밀치며 뒤로 물러서는 월운.

그의 몸은 투명도를 높인 그림처럼, 어느새 희미하게 변해있었다.


“내 시간은 여기 까지란다. 리, 너와 함께했던 시간,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 잘 가거라, 나의 ‘미스터 리’여!”


흰빛을 따라 솟구쳐 올라가는 리의 뒷모습을 보며, 월운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할 일을 모두 끝마친 사람처럼, 그의 표정은 전에 없이 평화로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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