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왐마, 이 잡것이 뭔 지랄이랴!”
하늘에 멈춰 선 채 하얗게 얼어붙은 공허검은, 이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쩌저적’ 표면에 균열이 생겼다.
‘떼에에에엥!’
순간, 예의 맑고 긴 종소리가 울리더니 공허검이 와르르 부서져 내렸고,
검의 중심에서부터 광선 한 줄기가 하늘로 쏘아져 올라갔다.
마치 글씨를 쓰듯 하늘을 휘휘 돌던 광선은, 광마를 포착한 듯 그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돌진했다.
그 형상이 꼭 화살촉처럼 보였다.
“뭐시여, 일섬(日纖)!”
위협을 느낀 광마가 얼른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모아 하늘 위로 치켜들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레이저 한줄기가 그의 손가락 위에 내리 꽂혔다.
일섬이 모이자마자 광마는 다가오는 광선을 향해 그대로 손을 내리그었다.
“꺼져부러!”
광마의 일섬과 공허검의 광선이 부딪히려는 찰나, 갑자기 광선이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곤 광마의 뒤쪽에서 느닷없이 나타나더니, 그대로 광마의 뒷목을 꿰뚫었다.
정확히 ‘뒤집힌 태양 문신’의 한가운데였다.
“푸흡!”
순식간에 광선에 목을 관통당한 광마.
양손으로 목을 부여잡은 채, 입에서 붉은 안개를 내뿜었다.
“사형!”
충격이 생각보다 컸던 것일까.
목을 붙잡은 채 허공에서 부들부들 몸을 떨던 광마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비틀거리나 싶더니, 이내 고개를 꺾으며 뒤로 쓰러졌다.
‘우워어어어!’
쓰러지는 광마를 보고 마물들이 여기저기서 탄식을 내뱉었다.
맥없이 추락하며 점점 몸이 작아진 광마는 까마득한 낭떠러지 속으로 떨어져 모습을 감췄다.
광마를 꿰뚫고 지나온 광선은 빙그르르 허공을 한 바퀴 돌더니, 날개를 활짝 펼쳤다.
어느새 나비 형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날개의 중심에 흰 머리칼을 발뒤꿈치까지 드리운 남자가 서 있었다.
리였다.
온몸이 새하얗게 변한 리는 몸에서 물결 같은 은은한 파장을 내뿜었다.
리가 움직일 때마다 그의 주변으로 초록빛 오로라가 부드럽게 너울거렸다.
“너, 이 자식, 감히!”
이빨을 ‘으득’ 깨물며 에테르를 끌어올리는 화운.
두꺼비처럼 둥그렇게 배를 부풀리더니, 리를 향해 그대로 화염을 내뿜었다.
폭포 줄기 같은 화염이 ‘휘휘’ 소용돌이치며 날아갔다.
에테르의 변화를 느끼고 천천히 화염 쪽으로 돌아서는 리.
신기하게도 화염이 아니라 화염 이면을 타고 흐르는 에테르 자체가 보였다.
그 모습이 꼭 작은 토네이도 같았다.
“오!”
화운의 화염이 덮쳐오려던 찰나, 리가 화염을 향해 가볍게 왼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화염의 아랫부분이 지우개로 지운 듯 사라지더니, 갑자기 화운의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렸다.
“헉! 크으윽.”
놀란 화운이 얼른 몸을 단단하게 굳히며 화염을 맞았다.
쏟아지는 화염에 근처에 있던 마물들이 휩쓸려 불타올랐다.
“아, 이게 에테르인가...”
화염에 휩싸인 화운을 지켜보며 탄성을 내뱉는 리.
화운의 겉모습뿐 아니라, 그의 몸을 핏줄처럼 타고 흐르는 에테르의 흐름이 선명하게 보였다.
화운에게서 시선을 거둬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는 리.
화운뿐 아니었다.
그 옆에 자리한 마물들,
건물 뒤에 숨어 싸움을 지켜보는 영혼들,
여기저기서 불타오르는 나무들,
바닥을 뒹구는 돌들,
심지어 활짝 펼쳐진 하늘과 끝없이 이어지는 대지까지,
모두가 연속되는 에테르의 흐름으로써 리의 눈에 구분되었다.
겉모습으로 볼 때와는 사뭇 다른, 뭔가 조화로운 느낌이었다.
“너 이 개자식!”
그때, 다시 화운이 에테르를 끌어올리는 게 느껴졌다.
다시 그를 바라보자 화운이 거대한 화염낫을 머리 위에서 빠르게 돌리고 있었다.
그가 낫을 돌릴 때마다, 머리 위에 훌라후프 같은 둥근 화륜이 쌓여갔다.
“거기까지만. 초월(超越)!”
화운을 지켜보던 리가, 왼손을 펼치더니 그의 몸의 절반을 가렸다.
그리고 다시 손을 치우자, 돌연 손바닥에 가려졌던 화운의 몸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정말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마치 그 짧은 순간 다른 공간으로 보내진 것처럼.
“이, 이게, 무슨...”
화운이 반만 남은 자신의 몸을 보며 당황해하는 찰나, 리가 그를 향해 검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환형(換形)!”
그러자 남아있는 화운의 몸이 갑자기 갈색으로 변하며 가운데로 뭉쳐지더니, 커다란 원기둥 형상으로 바뀌었다.
리가 재차 손짓하자 그의 몸에서 굵은 가지와 잎사귀들이 우수수 뻗어 나와, 이내 어마어마한 크기의 떡갈나무를 만들었다.
나무가 드리운 그늘이 운동장만큼이나 거대했다.
“와하하하하, 와하하하하!”
그때, 어디선가 호쾌한 웃음이 들려왔다.
웃음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리는 리.
어느새 광마의 퀘이사에서 빠져나온 일자가 리를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광마의 웃음은 필시 일자를 닮은 것이리라.
“놀랍구나, 놀라워. ‘절대 공허검’의 힘을 제어하다니. 에테르 자체를 볼 뿐 아니라, ‘물자체’까지 변경할 수 있더냐.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른 자로다.”
떡갈나무를 한 바퀴 빙글 돈 리가, 쏜살같이 날아가 일자의 얼굴 앞에 섰다.
리의 날개에서 미세한 입자들이 떨어지며 반짝반짝 빛났다.
일자가 바닥에 떨어진 공허검의 파편들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자시여.”
“깨우친 자여, 아직 광운이 살아 있을게다. 어서 그를 찾거라. 그 정도 충격에 물러설 자가 아니야.”
“일자시여. 멈춰주십시오.”
“분명 어딘가에 숨어서 결정타를 노리고 있을 게다. 겪어봐서 알겠지만, 그는 지극히 간교한 위인이거든. 네 능력으로 얼른 그를 찾아 숨통을 끊어놓아야 한다. 언제 또다시...”
“일자시여, 제발! 제발, 멈춰주십시오!”
리가 고함을 지르자, 리의 몸에서 강력한 진파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진파에 일자의 머리카락과 하얀 가운이 거칠게 펄럭거렸다.
순간, 흠칫 놀란 일자가 재촉하기를 멈추더니 물끄러미 리를 바라봤다.
어느새 얼굴에선 웃음기마저 사라져, 의아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멈추라고? 무엇을 멈추란 말이냐. 네 눈으로 보았다시피, 천계를 공격한 건 광운과 그의 무리들이야. 내가 아니라고. 그런데 내가 뭘 멈춰야 한단 말이냐? 설마 그들을 막지 말라는 말이더냐?”
“천계를, 이 세계를 없애려는 ‘대절멸의 계획’을 말입니다!”
일자를 바라보며 단호한 표정을 짓는 리.
일자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리를 노려봤다.
리의 뒤로 거대한 달의 모습이 겹쳐졌다.
“대절멸...이라...”
뭔가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닫더니, 손으로 긴 수염을 ‘스윽’ 훑는 일자.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이 리와 일자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일자가 뭔가 알겠다는 듯, 검지 손가락으로 연신 리를 가리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그래, 뜬금없이 왜 ‘낮달’이 뜨나 했다. 월운이구나. 네게서 월운의 에테르가 보여. 단지 그 자물쇠 때문만이 아니었구나. 하하하, 재미있군, 재미있어.”
연신 흰 수염을 훑어내리며 웃는 일자.
“그래, 녀석은 조용한 만큼 섬세했고, 섬세한 만큼 현명했지. 나름 완벽히 숨겼다고 자신했는데, 역시 월운의 눈을 속일 수는 없더냐. 하하하하. 하아, 그가 장자로 태어났어야 했건만. 비극이로다, 비극이야.”
긴 한숨을 내쉬며 입맛을 다시는 일자. 리가 주먹을 움켜쥐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일자시여. 이건 월운신의 뜻이기도 합니다. 천계를 없애려는 계획을 재고해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일자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리를 내려다봤다.
리의 뒤로 이미 전쟁터가 되어버린 천계의 모습이 보였다.
몇몇 살아남은 영혼들이 두려움에 가득 찬 눈빛으로 일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휴우, 월운이라. 그래 모처럼 월운을 대하는 거니, 내 잠깐 하소연이라도 해볼까.
최초에 우리가 설계했던 천계 시스템은 실패했단다. 너도 눈으로 직접 봤을 거 아니냐. 이곳이 얼마나 엉망인지. 명색이 천계라는 곳이 영혼들로 가득 차, 발 디딜 틈도 없단다. 천계의 고즈넉함은 옛이야기가 돼버린 지 오래지.
이미 만원(滿員), 만석(滿席), 만차(滿車)가 되어버렸는데도, 여전히 꾸역꾸역 영혼들이 밀려들고 있어. 구역질이 날 정도로 말이야.”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헛구역질을 하는 일자.
“스스로 봐도 너무나 하찮은 인간들이, '신의 약속'을 믿고 따랐다는 이유로 천계로 들어오고 있지. 사실 그런 자들을 위해 만든 천계가 아니거든.
진짜 가관인 건, 그렇게 운 좋게 들어와 분에 넘치는 행복을 받으면서도, 당연하다는 듯 감사의 마음조차 갖질 않는다는 거야.
얼마나 복에 겨웠는지, 이 삶이 지루해 일부러 다시 환생하는 영혼들까지 생겼다지.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영혼들의 행태가 괘씸한지 팔짱을 끼며 콧방귀를 내뿜는 일자.
일자가 일으킨 바람에 바닥을 불태우던 화염이 훅 꺼졌다.
“하지만, 그것이 당신의 뜻 아니었습니까. 당신의 약속을 믿고 따르면, 천계에 자리를 내주기로.”
“그래, 내 오판도 분명 있었지. 약속과 함께 서로를 보살피고 배려하라는 가르침을 주면, 약속을 얻고자 더 노력할 줄 알았어. 가르침대로 희생하며 사는 인간들을 천계로 인도하면, 다들 그렇게 살거라 믿은 거지.
어리석었어. 지금처럼 약속의 맹점을 눈치채고, 약삭빠르게 자기들 좋은 쪽으로 해석할 줄은 몰랐다니까.
그래, 계획대로라면 S급, A급 영혼으로 가득해야 할 나의 천계가 D급, 폐급으로 가득한 쓰레기장이 되고 말았다고.”
일자가 말을 멈추더니 천계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으아아악!’ 낭떠러지에 매달려 근근이 버티던 영혼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그를 지켜보며 일자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천계를 더 확장시키면 안 됩니까?”
“바보 같은 소리. 최초에 천계는 암형계와 균형을 이루도록 설계되었어. 음과 양, 물질과 반물질의 조화지. 둘 사이 균형이 깨지면 전체가 뒤틀려 무너지게 되어있어.
그래 고육지책으로 ‘대절멸의 신화’를 빌어 천계를 몇 번 비워내 봤지만, 금세 똑같아지더군. 인간들은 말이야, 암 덩어리 같거든. 순식간에 늘어나 이곳을 차지해 버리지.”
혐오스럽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일자.
“가장 큰 문제는 이거야. 명천계의 존재를 알아챈 뒤부터는 환생계의 인간들이 기껏 만들어 준 '생의 찰나'를 너무도 소홀히 여기더군. 천계만 보고 살며, 정작 살아있는 일분일초를 가볍게 여기는 거야.
현생을 잘 살라고 준비한 천계인데, 천계를 위해 오히려 현생을 희생하는 거지. 선후가 완전히 뒤바뀐 셈이야.
그런 한심한 인간들에 둘러싸여 사는 일, 이젠 정말 지긋지긋하다고.”
일자가 팔을 앞으로 내밀더니 바닥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지진이 일듯 천계의 바닥이 ‘구구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 난 결심했어. 이 세계를 다시 만들기로. 천계 따윈 없애버리고, 책임만 벌하는 ‘암형계 중심의 세계’로 만들기로.
광운 녀석의 탐욕을 빌어 좀 편하게 처리하려 했더니만, 결국 내 손을 더럽히게 생겼구나. 허허허.”
“그래도 최소한 기회는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리가 급격하게 에테르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그로 인해 리와 일자를 둘러싼 공기가 거세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기회? 무슨 기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곳 천계의 영혼들이 몰살당해야 할 만큼 대단한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잖아요. 최소한 ‘무엇을 잘못했는지’ 반성할 기회는 줘야 할 것 아닙니까.
또 환생계의 인간들에게도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알려는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뜻대로 안 된다고 이런 식으로 다 죽이고 없애버리는 건, 창조주으로서 너무 무책임한 일 아닙니까?”
“무책임?”
순간 일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일자의 흰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월운이여, 너도 달라졌구나. 건방도 떨 줄 알고.”
그때, 천계의 바닥이 거세게 흔들리더니, 바닥에서 날카로운 무언가가 우르르 공중으로 떠올라 반짝거렸다.
리가 깨고 나왔던 공허검의 파편들이었다.
“어차피 말로 될 일은 아니었다. 그만 끝내자꾸나.”
파편들을 향해 주먹을 움켜쥐는 일자.
순간, 공허검 파편들이 액체처럼 뭉그러지더니, 이내 둥그렇게 허공에 맺혔다.
동시에 공간이 꿈틀꿈틀 움직이더니, 끈적거리는 젤리 같은 ‘천계의 저항’이 갑자기 다시 시작되었다.
‘으아아아악!’
천계 여기저기서 ‘천계의 저항’이 이계(理界)의 물질들을 뒤덮기 시작했다.
마물들이 몸부림치며 들러붙는 공간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늪 속에 빠진 동물처럼 점점 공간 속으로 끌려 들어가다, 결국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마물을 삼켜 없앤 공간은 얇은 막처럼 잠시 출렁거리다가, 이내 투명한 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마치 자신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시치미를 떼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