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을 걷는 시간X창덕궁 나무 산책
창덕궁 나무 풍경을 보러 가는 시작점으로 저는 늘 계동길과 북촌로가 만나는 사거리를 선택합니다. 창덕궁 방향으로 낮은 언덕길이 이어지는데요. 이 길로 오르면 궁궐의 나무 풍경이 마치 일출 장면처럼 떠오르기 때문이에요. 동쪽으로 향한 채 편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으면 해가 수평선 너머에서 저절로 떠오르는 것과는 다르게 궁궐의 나무 풍경을 보고 싶으면 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몇 걸음 옮겼을 뿐인데 뾰족한 세모 모양의 지붕 선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바로 인정전의 지붕인데요. ‘여기 궁궐 있어요.’라고 손짓하는 것도 같고, 먼데까지 자기 위치를 알리기 위해 꽂아 놓은 깃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세모의 지붕 선을 이정표 삼고 쭉 직진하면 드디어 궁궐의 서쪽 담장이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내죠. 멀찍이 물러 앉은 인정전을 중심에 두고 양옆으로 비대칭한 경치가 펼쳐지고요. 건물은 대개 직선과 완만한 곡선으로 이뤄져 있지만, 그 사이 공간을 채우는 나무는 불규칙한 모습입니다.
나뭇가지와 이파리, 그 안에 작게 피고 지는 꽃과 열매의 모양을 한두 단어나 문장으로 설명할 방법은 없어요. 다만 곧은 선으로 모양을 이룬 건물과 규칙 없는 모습으로 선 나무가 만든 풍경이 무척 근사하다는 점만은 확실이 말할 수 있답니다. 창덕궁의 서쪽 담장을 20~30여 미터 앞에 두고 보는 장면을 저는 무척 사랑합니다. 잘 만든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예고편을 보는 기분이랄까요. 바람의 이동 방향을 따라 흔들거리는 나무의 순한 모습도, 봄이면 뽐 내며 꽃을 피워올리는 도도한 자세도 모두 마음에 들죠. 이 정도면 창덕궁 나무 풍경 감상의 출발점이 왜 이 길인지 설명이 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곳엔 나무가 보고 싶어 궁궐에 간 마음을 풀어놓으려 합니다. 나무를 주인공삼아 꽃과 건물과 옛 이야기를 담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