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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 죽음의 배후 조종자, 인조

영화 <올빼미>를 보고 01

by 궁궐을 걷는 시간



무능한 왕은 전쟁에 패배했습니다. 이 때문에 세자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8년 만에 귀국하고요. 그런데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세자가 세상을 뜨고 맙니다. 이 장면을 맹인 침술사가 지켜봤죠. 영화 <올빼미>의 기본 줄거리입니다.


<올빼미>는 인조(16대) 때 있었던 일을 소재로 만든 영화입니다. 전쟁의 패배, 왕과 세자의 갈등, 그리고 세자의 죽음 등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았던 사건입니다. 제작 소식을 뉴스로 본 후부터 기다리던 작품이라 개봉하자마자 보고 왔습니다. 감상부터 말씀드리면, 기대만큼 재미있었는데요. 영화 <올빼미>의 등장인물이 실제 역사에서는 어떻게 행동했는지, 배경이 되는 장소는 어디였는지 등에 대해 정리해봤습니다. 6회에 걸쳐 글을 나눠 올릴 예정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세자 죽음의 배후 조종자, 인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화 감상에 도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8년 만에 귀국한 세자에게 냉랭했던 아버지 인조(유해진)


영화에서 소현세자(김성철)의 죽음은 인조와 후궁 소용 조 씨(조소용), 이형익 등이 저지른 일로 나옵니다. 아들을 아버지의 지시로 죽였다? 이 사건에 아버지의 후궁과 어의가 적극 참여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본다면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는 어땠을까, 정말로 인조가 소현세자의 죽음에 개입을 했을까, 이런 의문이 드는 데요. 세자가 죽을 당시 세 인물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가장 먼저 인조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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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올빼미>는 병자호란(1636년 12월∼1637년 1월)이 끝나고 8년 후의 이야기입니다. 병자호란부터 말하는 이유는 이 전쟁의 패배로 소현세자가 청나라로 볼모로 잡혀갔기 때문인데요. 그러다가 오랜 시간 청나라에 머물던 세자가 8년 만에 귀국을 했는데(1645년 2월), 조선으로 돌아온 지 겨우 두 달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던 거죠.(1645년 4월) 영화는 청나라에 잡혀간 소현세자가 귀국한 이후부터 죽기까지의 과정을 주요 스토리로 삼았습니다.


지금 생각 같아선 (자신의 무능으로) 패배한 전쟁 때문에 타국으로 잡혀갔던 세자가 8년 만에 귀국했다면, 아버지는 당연히 아들을 반기고 미안해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고생하고 돌아온 소현세자를 대하는 영화 속 인조의 태도는 영 냉랭하기만 하죠.


세자가 불편했던 부왕(父王)


실제 인조는 어느 순간부터 청나라에 머물던 세자의 존재를 불편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청나라가 자신을 내쫓고 대신 세자를 왕위에 올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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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집을 지어 단확(丹艧, 고운 빨간 빛깔의 흙.)을 발라서 단장하고, 또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으므로, 상(인조)이 그 사실을 듣고 불평스럽게 여겼다.

- 《인조실록》 46권, 인조23년(1645년) 6월 27일


세자는 비록 전쟁의 볼모로 끌려갔지만, 이 시기를 허송세월로 보내지 않았던 겁니다.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를 무너뜨릴 만큼 강력한 국가였어요. 군사력은 물론, 과학과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배울 게 많은 나라였죠. 훗날 임금 자리에 올라 조선을 이끌어야 할 소현세자 입장에서는 패전국의 세자 신분이란 사실만을 내세워 분노와 원통함으로 청나라 생활을 하기에는 시간이 아까웠을 테고요.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국력을 배우는 것은 물론, 함께 끌려간 조선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청나라 신하들과도 외교적으로 필요한 친분을 쌓고 말이죠. 청나라 입장에서도 중국 대륙을 통일해야 하는 커다란 과제 앞에서 나중에 조선의 왕이 될 세자와의 좋은 관계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인조는 이런 세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겁니다. 병자호란 당시 자신을 무릎 꿇리고 머리를 조아리는(三拜九叩頭禮, 삼배구고두례) 모욕을 준 청나라와 세자가 친하게 지내고 있으니 말이죠. 거기에 세자가 자신의 자리까지 위협하는 것 같으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거고요. 이런 상황에서 세자가 귀국하고 끝내 사망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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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가 죽고난 후 인조의 의심스런 태도


청나라에서 생활한 모습 때문에 세자를 불편해했다고는 하지만, 단지 이런 사실만 갖고 인조를 소현세자 죽음의 배후로 지목하기엔 정황증거가 뭔가 부족합니다. 여기에 더해 세자의 죽음 이후에 보인 인조의 태도까지 종합해보면 더욱 의심스러워 지는 거죠.

보통은 왕실 가족 중 한 명이 세상을 떠나면 이에 대한 책임을 어의와 의관에게 묻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세자의 죽음에 여러 의문스러운 상황이 있었음에도 인조는 의관 이형익의 죄를 물으려고 하지도 않았는데요. 아래 기록을 보면 신하들이 이형익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건의하지만 인조는 끝내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신중하지 않고 망령되게 행동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형익을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고” …(중략)… 하니, 답하기를, “여러 의원들은 신중하지 않은 일이 별로 없으니, 굳이 잡아다 국문할 것 없다.”하였다. 재차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 《인조실록》 46권, 인조23년(1645년) 4월 27일


《인조실록》을 보면 위와 비슷한 내용이 여러 차례 나오지만, 그때마다 인조는 신하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격식을 갖춰 치러야 하는 세자의 장례 또한 짧은 기간에 간소하게 마치고 말았고요.


※ 다음 글에선 ‘세자 죽음의 행동대장 후궁 조소용과 행동대원 이형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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