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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큼하고 교사스러’웠던 조소용의 최후

영화 <올빼미>를 보고 05

by 궁궐을 걷는 시간


영화 <올빼미>는 인조(16대) 때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전쟁의 패배, 왕과 세자의 갈등, 그리고 세자의 의문스런 죽음 등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은 사건이었지요. 영화 <올빼미>는 픽션이지만, 실제 역사와 연결되는 흥미로운 지점이 많습니다. 영화 속 등장인물이 실제 역사에서는 어떻게 행동했는지, 배경이 되는 장소는 어디였는지 등 총 6편의 글로 소개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읽으시면, 더욱 더 재밌을 거예요.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출세 길을 달렸던 조소용


앞의 네 편의 글에서 소현세자가 죽는 과정에서 아버지 인조와 그의 후궁 조소용, 의원 이형익 등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살펴봤습니다. (영화에서는 조연 정도로만 등장했지만) 세자가 죽은 이후 아내 세자빈과 자식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소개했고요. 이번 글에서는 영화에서 다룬 시기 이후 인조의 후궁 조소용의 삶은 어땠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조소용이 어떤 인물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그가 후궁으로서 어떤 품계에 올랐는지 알아볼게요. 후궁의 품계란 쉽게 말해 조직 체계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조소용을 부르는 ‘소용’이란 호칭은 이름이 아니라 직위에 해당합니다.


후궁도 신하들과 마찬가지로 18등급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조소용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1637년(인조 15년) 종4품에 해당하는 ‘숙원’에서 출발해 1649년(인조 27년) 종1품인 ‘귀인’까지 올랐습니다. 일종의 승진에 해당하는데요. 아래에 후궁 조소용의 품계 승진 과정과 시기를 정리해봤습니다.



조소용이 최종적으로 도달한 ‘귀인’은 후궁으로선 가장 높은 ‘빈(嬪, 정1품)’의 바로 아래 품계에 해당합니다. 후궁 직위로 치면 두 번째 단계로 상당히 높은 품계라고 할 수 있어요. 숙원에서 귀인까지 올라가는데 약 12년이 걸린 셈인데요. 이 기간이 길다, 짧다는 평가는 미루더라도 인조에게 상당한 총애를 받은 것만은 확실합니다. 다음 기록을 볼까요. 숙원 조씨가 조소용입니다.


숙원(淑媛) 조씨(趙氏)를 소의(昭儀)로 삼았다. (…) 이때 중전 및 장숙의(張淑儀)가 모두 사랑을 받지 못하고 소의만이 더더욱 총애를 받았으며, 또 성품이 엉큼하고 교사스러워서 뜻에 거슬리는 자를 모함하기가 일쑤이므로, 궁중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소현 세자빈 강씨(姜氏)가 가장 미움을 받아 참소와 이간질이 날이 갈수록 더 심하였는데, (…)

-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1645년) 10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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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의 문장만으로 많은 사실을 말해주는 기록입니다. 아무래도 《실록》을 기록한 사관의 눈에도 조소용의 태도가 좋게 보이지 않았나봅니다. 위 내용을 보니 영화 <올빼미>에서 보여준 조소용의 모습이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설정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조소용의 최후는?


조소용은 인조와 사이에 1녀 2남을 두었는데요. 장녀 효명옹주가 당시 권력자였던 김자점의 손자와 혼인해 사돈을 맺었습니다. 김자점은 인조가 왕위에 오르는 인조반정에 참여해 공을 세운 인물인데요. 인조가 왕으로 있을 때는 영의정 자리에까지 올랐죠. 임금의 사랑을 받던 후궁과 권력을 휘두르던 신하가 사돈관계가 되었으니 무서울 게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조소용과 김자점이 몰락하기 시작한 건 인조가 세상을 뜬 후였습니다. 인조 다음으로 차남 봉림대군(소현세자의 동생)이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17대왕 ‘효종’입니다 그런데 효종이 왕위에 오른 후 김자점을 비롯한 그의 아들과 손자들이 역모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모두 처형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지요. 김자점의 사돈이었던 조소용도 무사할 리가 없었고요.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처형당했습니다.


(…) 역모한 정상이 발각되게 되었다. 죄가 종묘 사직과 자전에게 관계되니 내가 어찌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있겠는가. (…) 그로 하여금 자진하게 한다. (…)

- 《효종실록》 7권, 효종 2년(1651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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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은 효종이 조소용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령하는 장면입니다. 효종은 이렇게 벌을 내렸지만 조소용의 장례만큼은 예를 다해 치러주라고 다시 명령했는데요. 선왕(인조)이 사랑했던 후궁에 대한 마지막 배려라고 할 수 있겠지요.


(…) 또 하교하기를,
“역적 조씨가 이미 복죄(伏罪)되었다. 특별히 예장(禮葬)하게 하여, 이로써 나의 뜻을 표하고자 한다.” (…)

- 《효종실록》 7권, 효종 2년(1651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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