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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와 강빈의 세 아들, 그리고 옷 한 벌

영화 <올빼미>를 보고 04

by 궁궐을 걷는 시간
영화 <올빼미>는 인조(16대) 때 있었던 일을 소재로 만든 영화입니다. 전쟁의 패배, 왕과 세자의 갈등, 그리고 세자의 죽음 등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았던 사건입니다. 영화 <올빼미>의 등장인물이 실제 역사에서는 어떻게 행동했는지, 배경이 되는 장소는 어디였는지 등에 대해 정리해봤습니다. 6회에 걸쳐 글을 나눠 올릴 예정입니다. 오늘은 네 번째로 ‘소현세자와 강빈의 세 아들, 그리고 옷 한 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화 감상에 도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강빈의 가족까지 입은 피해


소현세자의 의문투성이 사망과 누명을 쓴 강빈의 죽음. 안타까운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강빈의 어머니는 물론, 형제들까지 죽임을 당했으니 말이죠.


피해는 소현세자와 강빈의 아들들에게까지 이어지는데요. 영화에서는 소현세자의 아들이 한 명만 등장하지만, 실제 세자와 세자빈은 3남 3녀를 두었습니다.


그중 세 아들은 어머니 강빈이 세상을 뜬 다음해(1647년)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고요. 이때 장남 이석철의 나이가 12세, 차남 석린은 8세, 막내 석견은 고작 4세였습니다.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인 이석철(李石鐵)·이석린(李石麟)·이석견(李石堅)을 제주에 유배하였다. (…) 당시 석철은 12세, 석린은 8세, 석견은 4세였다.

- 《인조실록》 48권, 인조 25년(1647년) 5월 13일



그리고 유배를 떠난 다음해(1648년) 9월과 11월 첫째와 둘째가 그만 세상을 뜨고 맙니다. 인조에게는 손자가 되는 어린 아이들이었죠. 이를 두고 사관이 《인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두었습니다.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큰아들인 이석철(李石鐵)이 제주(濟州)에서 졸하였다. (…) 성상의 손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장독(瘴毒)이 있는 제주도로 귀양보내어 결국은 죽게 하였으니, (…) 슬플 뿐이다.

- 《인조실록》 49권, 인조 26년(1648년) 9월 18일


11월 26일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둘째 아들 이석린(李石麟)이 제주의 배소(配所)에서 병으로 졸하였다.

- 《인조실록》 49권, 인조 26년(1648년) 12월 23일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가 귀양지에서 죽은 사실이 슬프다는 사관의 기록이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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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형은 제주도에서 죽었지만, 막내 석견은 강화도로 옮겨가 유배 생활을 이어가다 이내 풀려났습니다. 할아버지 인조가 세상을 뜨고 효종(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이 즉위한 지 10년째 되던 해(1659년)에는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나 ‘경안군(慶安君, 1644~1665년)’으로 지위가 회복되었고요. 부모(소현세자와 강빈)가 죽은 지 10년이 훨씬 지난 후의 일입니다.


막내 석견의 건강을 바란 두 나인의 마음


소현세자와 강빈, 세 아들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그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지난 2009년 순천 송광사에서 유물이 발견되는데요.


당시 목조관음보살 좌상을 수리하던 중 복장물(불상을 봉안할 때 가슴에 넣는 물건)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저고리 한 벌이 나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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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옷에는 부처님께 오랜 유배생활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경안군(막내 석철) 부부의 무병장수를 기도하는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경안군 부부를 보살피던 궁중 나인 노씨(盧氏)와 박씨(朴氏) 두 사람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1662년(현종 3년) 쓴 거였어요.


하지만 두 나인의 정성스런 마음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글씨를 쓴 저고리를 복장물에 넣은 지 3년 후 경안군은 세상을 떠나고 만 겁니다. 이때 경안군의 나이 겨우 스물 하나였죠.


※ 다음 글에선 ‘영화의 배경 장소와 조소용의 최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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