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으로 보는 역사_추석 추천영화 <사도>(02)
영조는 세자를 호출합니다.
그리고, 무릎 꿇고 앉은 세자에게 명령합니다.
“자결하라!”
방금 영조는 아들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어명을 내린 겁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결하라는 명령을 하다니!
그날 궁궐 상황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겠습니다.
세자(世子)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 …(중략)…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扣頭)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세자가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중략)…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1762년) 윤5월 13일
이날 영조의 말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사관조차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렸다고 기록했을까요.
영화 <사도>는 <실록>의 내용을 많이 참고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사료를 따라가기만 한 것도 아니고,
영화가 보여주는 상상력이 매우 뛰어난 작품입니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라는 내용도,
‘춘방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라는 내용도 영화에 나옵니다.
그대로 나오지만, 단순한 재연에서 그치지 않고,
긴장감이 한껏 올라가게 잘 표현했습니다.
연출자와 배우의 힘 같아요.
사소한 장면일 수도 있지만….
배우 송강호 님이 세자 앞으로 긴 칼을 던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힘 조절(?)을 어떻게 했는지,
절묘하게 세자의 무릎 앞으로 칼이 떨어지더라고요.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게!)
저만 놀랐나요?^^
영화 <사도>에서 영조가 세자를 불러 꾸짖고
뒤주에 가두는 건물 현판을 보니,
창덕궁 ‘인정전’으로 쓰여 있었습니다.
실제 인정전 앞은 아니고, 세트장에서 촬영한 것 같습니다.
(※ 실제 인정전과 양옆 행랑을 비교하면, 지붕 선과 문 색깔 등이 달라 보입니다.)
실제 임오화변이 시작한 장소는 창경궁 ‘문정전’이었습니다.
다시 <실록>을 보겠습니다.
세자가 …(중략)… 어가를 따라 휘령전(徽寧殿)으로 나아갔다. …(중략)…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扣頭] 하고….
―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1762년) 윤5월 13일
여기서 말하는 ‘휘령전’이 문정전입니다.
건물 이름이 다르죠?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조선시대 때 궁궐의 주요 건물은 경우에 따라 쓰임새가 바뀌었습니다.
예를 들어…,
평소에는 ‘편전(便殿, 왕의 집무실입니다.)’으로 사용하다가,
왕이나 왕비, 세자가 죽으면 관을 보관하는 장소인 ‘빈전(殯殿)’으로 바뀝니다.
시신을 모신 관은 국상 기간 중에 빈전에 보관하다 마지막 장례 때 왕릉으로 나갑니다.
국상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장례를 치르고 관은 왕릉에 묻지만,
신위를 모시고 다시 궁궐로 돌아옵니다.
이때 신위를 모실 건물이 필요하겠죠.
건물 한 채를 ‘혼전(魂殿)’으로 지정해 신위를 보관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마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3년입니다.
창경궁 문정전은 유독 왕비의 혼전으로 많이 쓰였는데요.
이때 이름을 ‘휘령전’으로 바꿔 부르는 겁니다.
문정전(휘령전)은 지금도 창경궁에 있습니다.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하지 않은 이유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이 영화가 고증에 신경 쓴 흔적이 많은 걸로 봐선,
단순 실수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문정전보다 인정전이 훨씬 더 크고 멋지기 때문에
영화의 장면을 위해 인정전 세트 앞에서 촬영하지 않았나 추정해봅니다.
영화 <사도>의 여러 장면이 <실록>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아버지 사도세자를 살리겠다고 할아버지 영조에게 울면서 간청하던
세손(이산, 정조)의 모습도 기록되어 있고요.
② 세자를 살리겠다고 왕을 말리다 쫓겨난 신하들의 모습도 묘사되어 있고.
③ 세자에게 자결을 명령하러 가는 영조를 붙잡고,
“어찌 일개 후궁의 말만 듣고 나라의 뿌리를 흔들려고 하시옵니까?”
라고 말리는 신하도 있었습니다.
다만, 영화에서는 채제공이 말한 걸로 나오지만,
실제 이 신하는 ‘이이장’이란 인물입니다.
경종 때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우연히도 임오화변이 일어나던 1762년 ‘도승지’(왕의 비서실장)에 올랐습니다.
채제공 또한 영조 때 이이장보다 앞선 1758년 도승지에 올랐던 신하입니다.
다만, 임오화변이 있었던 1762년에는 모친상을 당해 잠시 관직을 떠나 있었습니다.
(※ 영화 내용과 <실록>의 내용을 위, 아래 숫자로 비교해놓았습니다.)
① 세손이 들어와 관(冠)과 포(袍)를 벗고 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② 여러 신하들 역시 감히 간쟁하지 못했다. 임금이 시위하는 군병을 시켜 춘방의 여러 신하들을 내쫓게 하였는데….
③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영빈(暎嬪)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는데, 영빈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誕生母) 이씨(李氏)로서 임금에게 밀고(密告)한 자였다.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서 국본(國本)을 흔들려 하십니까?”
―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1762년) 윤5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