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덕후가 본 <옷소매 붉은 끝동> : 프리퀄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주인공 산과 덕임만큼 중요한 관계가 바로 영조(할아버지)와 사도세자(아버지), 이산(손자)에 이르는 3대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의 비극적인 스토리가 드라마 전반에 흐르고 있지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옷소매 붉은 끝동> 이전 이야기를 조금 나눠보겠습니다.
영조에게는 평생을 안고갈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왕비가 아닌 무수리(숙빈 최 씨)의 아들이라는 것이었어요. 무수리는 궁녀보다도 낮은 신분으로 궁궐의 허드렛일을 담당하던 종 신분이었는데요. 출신을 중요하게 여기던 조선시대 당시 무수리의 아들이 왕이 된다는 건 ‘개천에서 용 난다’ 정도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신분의 어머니란 존재는 영조에게는 마음 아픈 상처이면서 동시에 콤플렉스였을 겁니다.
또 하나는 이복형인 ‘경종’을 암살하고 임금 자리에 올랐다는 세상 사람들의 의심이었어요. 경종은 조선시대 임금치고 재위 기간이 4년 2개월로 비교적 짧았습니다.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난 경종 다음으로 왕이 된 이가 이복동생인 ‘연잉군(영조)’였습니다. 물론 영조가 이복형 경종을 암살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고, 단지 당시 정황만 남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정황이라는 게 사람을 참 곤란하게 만드는 면이 있는데요. 사람들이 날 의심한다고 해서 그냥 인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의 결백을 확인해줄 확실한 증거도 없는 그런 상태니까 말이죠. 이는 <옷소매 붉은 끝동> 10회 마지막쯤에 나오는 ‘생감과 게장’ 에피소드의 모티프가 되는데요. 자신의 형을 죽였다는 의심은 영조 권력의 정통성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역모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10회를 소개하면서 자세히 이야기해볼게요.
영조를 괴롭혔던 두 가지 콤플렉스가 아들에게 투영되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즉 다음 왕에게만은 영조 자신이 평생을 두고 시달렸던 ‘출신 성분 콤플렉스’와 ‘권력의 정통성을 부정 당하는 콤플렉스’에서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결심하게 했다는 거죠. 이런 이유 때문인지 영조는 사도세자의 교육에 유독 신경을 씁니다.
영조에게는 사도세자 이전에 낳은 ‘효장세자’란 첫째 아들이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죽고 맙니다. 그 후로 한참 아들을 낳지 못하다 영조의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아들을 얻었는데요. 그게 바로 ‘이선(사도세자)’입니다. 늦게 탄생한 아들이 얼마나 예뻤을까요. 애정이 큰 만큼 기대도 컸을 게 분명하죠.
세자는 영조의 기대에 부응해 어린 나이부터 매우 영특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하는데요. 공부를 게을리 할 뿐 아니라, 온갖 기행을 저질렀어요. 급기야 궁녀와 내관을 죽이는 사건까지 벌어지고 맙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는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습니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임오년의 그날, 아버지 영조는 아들 사도를 뒤주에 가두고 맙니다.
세자는 뒤주에 갇힌 채 8일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벌어진 참극이었어요. 이 사건이 바로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임오년의 그날’로 표현하는 ‘임오화변(1762년)’입니다.
물론 8일 동안 벌어진 사건만을 두고 임오년의 그날을 정확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날’이 있기 전부터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오랜 시간 좋지 않았거든요. 아들에게 유난히 엄격했던 영조의 성격, 아버지에게 상처 받아 끔찍한 짓을 저지른 사도의 잘못, 여기에 당파의 싸움 등이 복잡하게 얽히고 얽혀 벌어진 임오화변의 원인은 몇 문장으로 정리하고, 설명하기엔 어렵기만 합니다.
지금까지 임오화변을 다룬 드라마와 영화에서 사도세자는 아버지 손에 죽은 불쌍한 아들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면 영조는 끔찍한 방법으로 아들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로 보여졌죠. 이렇게만 해석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사도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 손에 죽었기 때문에 참 불쌍한 아들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볼 수는 없는데요. 죽기 전까지 사도가 저지른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죽인 내관과 궁녀가 100여 명이 넘습니다. 그 방법 또한 매우 참혹했습니다. 글로 다 옮기기 어려울 정도죠. 그렇게 죽인 사람 중에는 사도세자의 후궁도 있었습니다.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는 궁녀들을 끔찍하게 살해한 사도세자에게 복수를 하려는 궁녀 비밀 조직으로 ‘광한궁’이란 설정을 두었습니다. 물론 광한궁이란 조직이 궁궐 안에 있었을 리는 없지만, 사도의 살인 행위라는 역사적 사건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당시 궁녀들도 사도에게 복수심이 있었지 않을까 하는 상상력은 설득력 있는 설정 같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사도가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고 추측하고, 엄한 아버지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그런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이유가 사도세자의 행동에 면죄부를 준다고 할 수는 없을 거예요. 왕조시대라는 점을 감안해도 실수로 덮고 넘기기에는 큰 죄를 저질렀던 게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아들을 죽인 영조의 결정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영조가 보기엔 단지 아들이 왕이 되기에 조금 무능하거나, 행동이 불량한 수준이어서 다음 임금의 자리를 잇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었어요. 아들은 사람을 끔찍하게 여럿 죽인 살인자였던 겁니다. 살인자에게 다음 왕권을 넘긴다는 건 현재 조선을 이끌던 영조 입장에선 매우 무책임한 행동이었을 테고요.
조선의 임금인 영조로서는 조선의 세자 사도를 용서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생각해봐도 과정과 결과는 참으로 슬프기만 합니다. 정리하자면 임오화변은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라 생각해요.
임오년 이후 ‘그날’은 궁궐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상처로 남았을 게 분명합니다. 영조도, 이산도 그날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생을 살았을 거예요.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도 할아버지 영조는 손자 이산을 정치적 상황에서 보호하려는 행동을 합니다. 이산의 잘못을 용서해주기 위해 (신하들이 반발하지 않을) 때를 기다린다든지, 엄하게 체벌하면서 변할 수 있다고 다그친다든지 등의 모습입니다. 아들을 역적의 죄로 죽여야 했던 실제 영조도 자기의 다음 왕이 될 손자를 이렇게 때로 보호하고, 때로 다그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임오화변의 모든 과정을 겨우 열 살 나이의 이산이 지켜봤습니다. 이때 사도세자와 혜경궁 나이는 스물일곱이었고요. 지옥 같은 일을 겪기에 이들은 너무 어리고, 젊었습니다. 참혹한 일이 벌어졌지만, 시간은 야속하게도 흘러갔죠.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이야기는 ‘임오년의 그날’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은 때 시작됩니다.
다음 글에서 본격적으로 01회부터 이야기를 이어가볼게요.
※ 궁궐의 아름다운 산책 코스와 다양한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저의 책 <궁궐 걷는 법>(이시우, 유유출판사)을 참고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