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4강 죽음이라는 한계 앞에서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 성서학당 강의

by 하정

욕구(needs)는 몸으로부터 출발된 결핍에서 비롯되는 배고픔, 수면 등이며 채워져야 한다. 욕구는 원하는 대상에 직접적으로 발생한다. 목마르면 물을 마셔야 하고 졸려우면 자야 한다. 이에 반해 욕망(desire)은 마음으로부터 출발된 것으로 결핍이 아닌 필요 이상의 것을 원하는 것이다. 욕망이란 타인을 매개로 하여 그가 소유한 것을 보고 갖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연예인이나 아이돌 스타를 보며 그들이 입은 옷을 갖고 싶은 것이 이런 것이다. 욕망에는 언제나 매개가 있다. 타인이라는 매개를 통해 욕망이 발생하며 욕망은 끝이 없다.



행복 공식

< H(행복) = M(돈)/D(욕망)>


인간은 행복을 위해 많은 돈을 벌고자 하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오히려 행복을 놓치는 아이러니한 삶을 산다.


어떤 고양이가 제자리에서 빙빙 돌고 있다. 이런 고양이를 보며 개가 왜 그러고 있는지 질문한다. 고양이는

"누가 그러는데 내가 내 꼬리를 물 수 있으면 행복해진대"라고 답한다. 그러자 개가 웃으며 한마디 한다.

"그냥 앞을 향해 걸어가면 꼬리(행복)는 그냥 따라올 텐데"라고.


인생의 목적이 욕망이 될 때 행복은 줄어들고 자유가 사라진다. 욕망을 줄일 때 인간은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



오늘의 본문은 전도서 2:12-17절 지혜와 우매에 관한 것이다.


2:12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까 이미 행한 지 오래 전의 일일 뿐이리라

전도자가 타자를 통해 본인의 모습을 돌이켜 본다. 모든 왕들이 행한 일이고 왕 뒤에 오는 자 역시 동일한 일을 행할 뿐임을 깨닫는다.


2:13 내가 보니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도다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유익함)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지식이다. 빛(생명)이 어둠(죽음) 보다 낫다는 것은 죽는 거보다 사는 게 낫다는 의미다.


어느 철학자는 “인간은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존재이다”라고 했다. 인간은 세상에 오는 걸 선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 받았음을 알고 있다.


2:14 지혜자는 그의 눈이 그의 머리 속에 있고 우매자는 어둠속에 다니지만 그들 모두가 당하는 일이 모두 같으리라는 것을 나도 깨달아 알았도다

지혜자의 눈이 머릿속에 있다는 것은 세상을 눈이 보이는 대로 감각적으로만 인식하지 않음, 눈에 보이는 대로만 보지 않음을 의미한다. 살다 보면 보이는 게 우리를 속일 때가 참 많다.


복숭아는 색깔이 참 예쁘다. 인간은 복숭아의 색에 끌리지만 먹을 때는 껍질을 깐다. 복숭아의 목표는 씨를 통해 생명을 전달하는 것이며, 복숭아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씨(영혼)다. 인간 역시 보이는 것을 예쁘게 만드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자신을 대표하는 스펙(spec)(직장을 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학력, 학점, 토익 점수 따위를 합한 것을 이르는 말)을 꾸미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람을 만나다 보면 스펙은 크게 중요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스펙(껍질) 보다 더 중요한 것 인격(과육)이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 참된 인격의 핵심은 영혼(씨)이다. 나의 영혼은 누구를 지향하고 있는가?


'우매자는 어둠 속에 다닌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본다는 의미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모두가 당하는 일이 같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함을 의미한다.

죽음은 모든 생명의 보편적 운명이다. 그렇다면 죽음이 없다면 인생을 의미 있게 살 수 있을까?



T.S. 엘리엇(T.S.Eliot, 1888-1965) 영국의 시인, 평론가, 극작가. 대표작 <황무지>

황무지의 첫 부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조롱 속에 들어있는 무녀에게 아이들이 질문한다.

“쿠마의 무녀야, 네 소원이 뭐니?”

“죽고 싶어”

무녀의 능력을 귀히 여긴 신이 무녀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다. 무녀는

"제 손아귀 속 먼지 수만큼 살게 해 주세요"라는 소원을 빈다.

무녀는 매우 긴 생명을 얻었으나 젊음을 유지해 달라는 소원을 빌지 않았다. 결국 늙고 늙어 쪼그라들어 조롱 속에 갇히고 죽고자 하지만 죽을 수 없는 신세가 된다.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다>_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이것은 인간이 죽음을 의식하며 사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죽음이 없다면 의미도 없다.


모든 사람은 생각한다. '난 언젠가 죽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라고.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겪어보지 못한 매우 두려운 경험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장례 전문 기업을 통해 죽음을 접하지 않고도 장례가 진행된다. 이로 인해 불쾌한 죽음과 대면할 일이 줄어들고 죽음을 의식하지 않음으로 성숙할 기회를 잃게 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대문호 톨스토이가 노년에 이르러 깨달은 삶과 죽음의 진실한 의미를 담고 있는 책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그의 집에 직장 동료들이 모인다. 그들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는 그의 죽음이 자신의 직책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가 아닌 그가 죽은 사실에 안도한다. 아내는 남편의 연금을 더 많이 받을 생각에만 빠져있다.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이야기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 삶 속에 일어나는 일을 다룬 것이다.


2:15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매자가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게 지혜가 있었다 한들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하였도다 이에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하였도다

죽음이란 위대한 평등(Great Equalizer)이다.


2:16 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모두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죽음이 고통스러운 이유 중 하나는 잊힘이다. 인간은 자기를 잊히지 않게 하기 위해 유적지에 이름을 새기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인간은 잊힐지 모른다는 근원적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불행은 잊어야 할 것을 잊지 못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 것에 있다.


역사 속에서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다.

forgive but not forget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 말아라. <아우슈비츠 수용소 담벼락에 적혀있는 문구>

잊는 순간 역사는 반복된다. 우매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기억’ 해야 한다.


독일에는 슈톨퍼슈타인이라는 돌이 있다. 이것은 베를린 거리 곳곳에 있는 바닥 돌이다. 여기에는 나치 희생자 이름 여기에 살았다, 태어난 해, 추방된 해, 어느 수용소에서 죽었는지 기록돼 있다. 나치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돌인 것이다.


슈톨퍼슈타인: stolpern(걸려서 넘어지다)+stein(돌)

나치 희생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걷다가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거친 돌


1992년 예술가 ‘군터 뎀니히’에 의해 만들어진 이후 현재는 유럽 전역에 약 4만 8천 개 이상의 슈톨퍼슈타인이 있다.


2:17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

무의미한 삶을 성찰하며 도달하게 되는 인생의 핵심. 전도자는 양파 껍질을 벗기듯 삶의 핵심에 이르려 노력한다. 전도자는 사는 게 헛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사는 건 헛되지 않고 소중하다.

소중한 핵심 가치를 붙잡기 위해 중심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주어진 인생을 통해 삶이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는 인간.

우매자나 지혜자나 죽음 앞에서는 동일하나 지혜자란 인생의 핵심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 성서학당 <전도서 4강 죽음이라는 한계 앞에서>

https://youtu.be/2MZd2esvxAo?si=2TfTSRtVfZ3yay7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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