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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킴 아카이브 Jun 27. 2023

건킴의 책 리뷰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하루키가 무엇에서 영감을 받고 좋아하는지 알고싶다면

안녕하세요, 영감을 나누는 공간 <치즈(Cheese)>의 진행자 건킴입니다. 

https://www.instagram.com/gunkimm_art/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은 말 그대로 그가 적은 잡다한 이야기이다.



그와 대화하는 느낌을 줄 정도로 사소한 이야기부터,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의 가치관까지 엿볼 수 있으며 그가 좋아하는 노래, 술, 책 그리고 영화까지 다양하게 추천받을 수 있다!


하루키의 LP 바 사랑

그는 대학교에 다니는 와중에 LP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너무 좋아 LP바를 차릴 정도였고, 그 과정에서 어린 나이에 안정적으로 교제하던 여자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는 29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글을 쓰기 시작하며 작가의 생활을 이어왔다.


하루키가 여가 시간에 즐겼던 '번역 일'


인상 깊었던 부분은 그가 오랜 세월 작가로서 작업을 한 것뿐만 아니라 번역일을 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가 번역하며 애정했던 책들은 내가 직접 읽으면서도 하루키를 상기시켰던 책들이었다는 부분이 놀라웠다.


예를 들어 그는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 레이먼드 커버의 작품을 전집 번역하였는데 자그마치 1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여자 주인공 데이지를 처음 본 닉 케러웨이는 그녀의 등장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하는데, “바람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커튼을 밀고 방안을 한바퀴 돌며 천천히 깃털이 땅 위로 착지하듯 그녀의 주변에 앉았다”라며 표현을 하는데(정확하지 않다) 이러한 디테일한 장면 묘사가 하루키와 참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또한 호밀밭의 파수꾼 또한 하루키가 애정하는 작품 중 하나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소설 속 나오는 주인공 홀든 코필드의 찌질함에 대한 표현 또한 하루키가 즐겨 사용하는 주인공의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작가로서 다른 작품을 습득하는 행위는 중요한 연습 중 하나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하루키 처럼 한 작품을 다른 언어로 변환할 때 각 문장의 표현을 깊이 있게 사고한다는 점이 그의 이야기를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같은 정보여도, 여러번 곱씹다 보면 타인에게 말할 때 자신의 정보인 것 처럼 말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지 않는가?!



끝으로 하루키가 좋아하는 작가, 뮤지션들 그리고 인상깊었던 문장들을 아래 나열하겠다.


하루키가 좋아한 뮤지션: 비틀스, 짐 모리슨

하루키가 좋아한 작가: J.D Salinger(호밀밭의 파수꾼),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프랜시스 스콧 피츠 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하루키 잡문집 책 디자이너: 칩 키드 (Chip Kidd)




<하루키가 말하는 음악의 변천사>


하루키는 그런말을 한다. 시대가 흐르면서 음악은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값을 하게 되었고, 이제는 작은 장치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수없이 많은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 무한에 가까운 정보가 가끔은 한정적 정보보다 매력이 덜 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다.

또한 기술이 발달하여 좋은 오디오 장치를 갖추어도 원음이 자아내는 공기의 떨림과 재생음이 재생음이 자아내는 공기의 떨림은 물리적으로나 감각적으로나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는 말을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레코드나 CD에 담긴 음악은 어찌보면 번역능력을 요구하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그는 한다.

이는 마치 그가 영어에서 일본어로 번역을 할 때 추구하는 방향성과 같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에 관하여>


죽은 자를 칭송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 댓ㅇ이 젊은 나이에 죽었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죽은 자는 배신도 반격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죽은 자일 뿐이다. 혹여 당신이 그들의 죽음에 신물이 났다고 해도 딱히 문제될 건 없다. 그냥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그걸로 끝이다. 자기를 잊어버렸다고 해서 그들이 구태여 당신 집 현관으로 찾아와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죽은 자를 칭송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상실/죽음 이라는 개념을 항상 물리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하루키의 시선이다.


<노르웨이의 숲 제목에 대하여>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비틀스의 제목이자 하루키 소설의 제목이 사실 ‘노르웨이산 가구’라고 번역이 되어야 맞다고 하는 말이 여기저기 많이 들린다. 하루키 또한 책이 출판되고 나서 여럿 들었다고 하는데, 그가 말하기로는 정확한 해석은 어이까지나 원어 ‘Norwegian Wood’일 뿐 그 밖의 해석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잘못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밝힌다.

“노르웨이산 가구 = 북유럽 가구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만약 그것이 전부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협의적으로 단정하는 방식은, 이 곡의 애매모호함이 선사하는 불가사의한 심오함을 치명적으로 손상시켜버리는 일이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나무는 보고 숲은 못 보는’일이 아닐까”라고 말한다.


또한 마지막으로, 플레이보이 메거진에서 인터뷰한 존 레넌은 자신이 항상 다른 여성과 분륜에 바졌는데, 곡 안에서는 그런 육체적 관계를 교묘하게 얼버무려 묘사하고자 했다. “마치 연막으로 덮어씌우듯 실제 상황이 아닌 것 처럼. 이건 누구와의 정사였는지 잊어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말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다." 라고 말 했다.  이 발언은 Norwegian Wood는 노르웨이산 가구를 뜻한게 아니라는 것을 상당히 분명하게 시사하고 있다.

여담으로 원래는 제목이 ‘Knowing She Would’라고 한다. 그 뜻은 앞의 가사를 보면 알겠지만 “Isn’t it good, knowing she would?”(그녀가 해줄 거라는 걸 안다는 건 멋지잖아)라는 뜻이다. 하지만 음반사에서는 그런 선정적이고 부도덕한 문구는 제목으로 삼을 수 없다며 Knowing She Would를 말장난하듯 비틀어 Norwegian Wood로 바꿨다는 루머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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