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틀렉(Bootleg)

체계를 교란하며 권위에 저항하는 전위적 태도

by 건킴 아카이브

부틀렉은 원본을 그대로 복제하지 않고 원본의 권위를 흔들고 그 의미를 변형한다.


OOIEE의 “There’s No Separation” 프로젝트에서 드러난 부틀렉적 요소를 구체적으로 짚어보면, 전시는 Ryan Gander, Robert Breer, Diana Thater, Anna Sew Hoy의 기존 작품 위에 하늘 이미지를 프린트한 대형 커버를 덮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기존 작품을 가리는 동시에 재해석하고 변형하는 과정을 전위적으로 제시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외부를 표상하는 ‘하늘’을 전시장 내부에 끌어들임으로써, 안과 밖의 경계를 흐리고 미술관 내부에서의 작품 유통 질서에 균열을 만들어냈다. 결국 이 전시는 부틀렉이 가진 모호성과 교란의 의미를 실험적으로 탐구한 장치로 기능했다.


우리는 부틀렉을 노래의 커버와 비교할 수 있다. 어떤 커버는 원곡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 하고, 또 다른 커버는 연주자만의 해석을 더해 원본을 넘어서는 새로운 감각을 창조한다. 이때 커버는 단순한 모방을 넘어 원작을 초월하는 또 하나의 작품으로 자리 잡는다. 부틀렉 역시 단순한 복제에서 출발하지만, 결국에는 원본의 권위를 흔들고 그 이상을 가리키는 역이데아적 현상을 드러낸다. 예술이란 개념을 형상화하여 감각 속에서 울림을 만들어내는 행위라면, 부틀렉은 그 근본적 조건을 재현하는 하나의 예술 행위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틀렉은 또한 상업적 욕망, 즉 자본의 추출과 부의 재분배에 관한 비윤리적 전유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이는 비윤리성과 모방의 행위가 체제의 균열을 드러내고, 권위가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풍자하게 된다. 단순히 “짝퉁”을 생산하는 산업적 기생(parasite)가 아니라, 기존 질서를 조롱하며 위계의 허상을 무너뜨리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희극(Comedy)은 권위를 탈주시키는 힘”이라는 말이 있듯, 옛 개그맨들의 풍자는 지배계급과 권력자들의 무게를 경쾌한 모방으로 전환시켰다. 그들의 몸짓과 말투를 흉내 내는 행위는 표면적으로는 웃음을 자아내지만, 그 웃음 속에는 권위를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게 만드는 정치적 힘이 숨어 있다. 모방(Imitation)은 이때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차이에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무언가”이다. 이는 원본이 가진 권위를 흔들며 그 이면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는 희극이라는 플랫폼을 벗어나 산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산자이(Shanzhai)나 GooApple 같은 브랜드는 애플의 권위, 글로벌 자본의 상징을 그대로 복제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안드로이드 기반의 아이폰”이라는 부조리한 형식을 통해 진정성과 독창성의 허구를 드러낸다. 그것은 다다이스트적 콜라주처럼 체제를 교란하며, 소비자가 당연시하던 정품/가품, 진짜/가짜의 구분을 전복한다. 하지만 이러한 ‘저항의 형식’은 종종 곧바로 자본주의에 흡수되는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풍자가 단순히 소비되는 스타일인지, 아니면 체제의 균열을 드러내는 실질적 저항인지의 구분은 부틀렉을 에술적 태도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러나 이때 문제는 단순히 ‘피상적 차용’ ‘진정성 있는 저항’의 대립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실제로 많은 부틀렉은 상업적 욕망과 저항적 실천이 뒤엉킨 모순적 형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전위예술이 언제나 그러했듯, 개념은 쉽게 유행으로 소비되고, 표면적 차용은 트렌드와 자본의 파도로 흡수된다. 하지만 그 거대한 파도가 물러간 뒤에도 남는 것은, 무겁고 잔잔하게 지반을 이루는 ‘진정성의 흔적’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틀렉은 단순한 경제적 파생물이 아니라, 행위예술적 저항으로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옛 광대나 개그맨이 지배자를 흉내 내며 권력의 부조리를 폭로했던 장면과 닮아 있다. 흉내와 모방은 권위를 잠식하고, 체제를 더듬거리게(stutter) 만들며, 결국 웃음 속에서 저항의 힘을 발생시킨다.


트로츠키의 유물론적 변증법을 전제로 한다면, 부틀렉은 고정된 동일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는 변형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원자에서 우주까지, 모든 것은 완결된 실체가 아니라, 반복과 변화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이 불안정한 존재는 열역학 제2법칙이 말하는 엔트로피처럼, 완전함을 향해 수렴하기보다 불안정성과 차이를 생산하며 끊임없이 복제를 낳는다.


생명 또한 마찬가지다. 유전적 차원에서 본다면, 생명의 순환은 부틀렉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자식은 부모의 복제 같지만, 결코 동일하지 않고, 매번 변이와 차이를 수반한다. 자연은 모방과 반복, 확장과 번식을 통해 유지되며, 정보 또한 그렇다. 텍스트로 전해지는 정보는 항상 변질의 가능성을 동반하고, 그 과정에서 매번 이동하고 진화하며 확장된다.


따라서 부틀렉은 단순한 위법적 복제가 아니라, 자연의 질서와 닮아 있는 일종의 “연주”로 이해할 수 있다. 위계와 권력은 본래부터 자연의 섭리 속에서 끊임없이 도전받으며, 단일화되고 규제된 체계는 필연적으로 교란된다. 부틀렉은 바로 그 교란이자, 차이와 변화 속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또 다른 질서의 징후다.


“지금의 나는 어제 나의 부틀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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