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뭐 할지는 묻지말아줘. 나도 아직 잘 모르겠으니까.
부모님에게, 친구에게, 회사 동기에게 던진 한마디.
"나 연말에 퇴사할 거야."
입사한 지 이틀째부터 퇴사 퇴사 노래를 부른 지 어언 2년 반이 지났다. 직장인 예비 3년 차의 당돌한 포부를 들은 주변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당장 내일, 다음 달도 아니고 연말이라니. 굳이 손가락으로 헤아려봐도 아직 반년이나 남지 않았는가. 아직 머나먼 일이어서인지, 아님 저러다 말겠거니 하는 마음에서인지. 나의 '퇴밍아웃'은 우선 부드럽게 이륙했다.
퇴사란 하나의 사건이다. 어지간한 용기와 간절함 없이는 이루어지기 힘든 사건. 다만 퇴사 자체보다 더 두려운 건 그 이후에 펼쳐지는 일상이다. 정확히는 일상의 '빈자리'다. 매달 통장에 들어오는 월급, 8시간 넘게 갇혀있는 사무실, 회사 선후배와 동료, 어디 가서 나 누구요하며 내세울 수 있는 소속감까지, 회사라는 공간은 내 일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 모든 것을 박차고 나온 자리에는 텅 빈 구멍이 남는다. 그 구멍을 무엇으로 채우지? 처음에는 그저 쉬는 것 만으로 행복하겠지만 그런 생활이 오래 갈리 없다. 생활비는 바닥나고, 주변 사람들은 수군거리고, 한국인 특유의 K-불안감도 엄습해오겠지. 남들은 자기 집도 마련하고, 결혼도 하고, 승진도 하고, 소시민으로서의 단계를 하나씩 밟아 나간다. 그런데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서있다. 내 안에 자리한 거대한 구멍만을 끌어안고서.
이 모든 상황까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나니 정신이 아득해진다. 나 정말 퇴사해도 되는 건가? 괜히 질렀나? 그냥 조용하게 있다가 이직 면접에라도 붙으면 얘기할 걸 그랬나? 이런 불안감이 사그라드는 건 의외로 직장에서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람들과, 같은 일을 하는 바로 그 공간에서 말이다. 숨이 턱턱 막힌다. 맞아, 나 이래서 떠나려고 했지.
"난 왜 퇴사를 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도 명확하다. 바로 '남아있을 이유가 없어서'다. 보통 퇴사라고 하면 머릿속에서 '떠날 이유'를 떠올린다. 월급이 작다, 야근이 많다, 조직에 비전이 없다, 저 상사 때문에 등등. 그런데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그런 이유는 있다. 하지만 모두가 회사를 박차고 나오지는 않는다. 세상에 완벽한 조직은 없고 사람은 원래 불만의 동물이다.
회사에 더 이상 남아있을 이유를 찾지 못한 이들은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그리고 다음 행선지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지금의 내 상황이 딱 그렇다.
문제는 이거다. 퇴사를 하는 이유는 정해졌다. 그런데 다음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았다. 설령 정해졌다고 해도 '명확하고 현실적인 계획'이나 '가시적인 성과'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내야 한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설득하지 못한다. 무조건 환승 이직을 해라, 사이드 프로젝트가 월급만큼의 수익을 낼 때 퇴사해라, 무작정 나오지 마라 등의 조언은 바로 이 지점을 겨누고 있다.
이런 조언은 일견 타당하나 두 가지 한계점을 갖는다.
1. 모든 것이 정해질 때까지 무의미한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2. 다음 스텝이 꼬일 경우 영영 퇴사할 수 없다.
마라톤 풀코스를 뛰고 이제 결승선이 코앞이다. 숨은 턱을 넘어 머리 끝까지 차오르고, 다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갑자기 결승선이 5km 밖으로 당겨진다. 결승선을 통과하고 나서 어떻게 할지가 정해지지 않아서란다. 누군가 옆에서 말한다. 여태까지 잘 뛰어 왔으니, 5km 정도는 견딜 수 있지?
타인의 시선은 순간에 머문다. 그들은 지금껏 달려온 과정이 아닌 지금 달리고 있는 장면만을 본다. 그 모든 여정을 겪어온 나는 미쳐버린다.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더 뛰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여기서 멈추겠어.
퇴사 시기를 아예 못 박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음 직장이 날 뽑아줄 때까지, 내 사이드 프로젝트가 성공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겠다. 내가 견딜 수 있는 만큼만 견디고 나오겠다. 외부적인 조건이 아니라 내 내면을 따르겠다. 그런 나름의 선언이다.
그래서 뭐 할 건데? 이렇게 묻는다면 아직은 할 말이 없다. 내 손에 남아있는 건 구체적인 계획이 아니라 나아가고 싶은 상(像)이다. 마치 북극성처럼 걸어도 걸어도 닿을 수 없는. 꿈결을 헤매는 것 같다가도 한 번씩 선명하게 다가오는.
너무 모호하지 않냐고? 맞는 말이다. 꿈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실행이 필요하다. 북극성을 의지하여 방향을 찾아가되 두발 역시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눈앞이 깜깜하다면 손으로 더듬어서라도, 귀를 있는 힘껏 세워서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인생의 진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무언가를 한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이루어짐은 대부분 운에 좌우된다. 내 노력은 다만 그 운을 담아낼 그릇을 빚어내는 작업이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 그릇을 빚어내며 그 결마다 느껴지는 감촉에, 그 눅진한 향에 한껏 스며들 수 있다.
삶에 스며듦. 그건 삶만으로 내 안을 충만하게 채워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충만함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들은 외부세계에서 자신의 갈증을 푼다. 그게 꼭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 이런 질문에 답해야 한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왜 이리 허무한 걸까?' 회사를 다니면서도 수없이 답해야 했던, 대개는 애써 무시하며 덮어야 했던 의문. 내가 퇴사를 하는 진짜 이유는 어쩌면 충만함을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