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어른처럼 일하고 싶다
"넌 언제 제일 화가 나?"
친구가 물었다. 내가 가장 화날 때?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다. 내가 화났던 순간을 돌이켜본다. 회사에서, 학교에서, 여행지에서, 하다못해 방구석에서. 있다, 그런 순간이. 손발이 묶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 화가 났다. 삶을 내가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질질 끌려다닐 때.
회사를 다니면 마치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다. 조금만 엇나가도 나를 가로막는 손, 그 손들. 나는 분명 성인인데, 그저 나이만 그랬나 보다. 여전히 잘못을 하면 혼나고, 내 일에 온전히 책임지지 못하는 그냥 어른 아이. 나를 채근하는 상사도 위만 쳐다본다. 이렇게 해도 될까요? 저렇게 해도 될까요? 부모의 허락을 기다리는 아이와 같다. 정말 아찔하다.
자신의 행동에 온전히 책임질 수 있어야 어른이다. 그 대가로 권리를 얻는다. 그게 주인이다. 흔히 자기 일에 주인의식을 가지라고 한다. 주인의식은 추상적인 구호로 얻을 수 있는 간편한 마음가짐이 아니다. 실제로 그 일을 끌고 가는 주인이어야 한다. 주인이 아닌 자에게 주인의식은 차라리 노예근성에 가깝다. 권리 없는 책임. 딱 노예다.
니체는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노동자를 노예로 규정했다. 노예는 시간도, 돈도, 관계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반면 주인은 자기 스스로에게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그 명령을 충실히 따른다. 삶의 주체성을 얻기 위해. 자유롭게 살기 위해.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에서 주인공 박새로이는 말한다. "제 삶의 주체가 저인 게 당연한, 소신에 대가가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단단하다. 이 사람은 자기 삶의 주인이다. 아무리 목줄을 잡아끌어도 끌려가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위계나 권력 앞에서는 한없이 움츠러든다. 강자 앞에서도 당당하게 할 말을 하는 그런 멋진 사람은 아니다.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다가도 몸은 바삐 움직인다. 한편으로는 편하다. 내가 스스로 한 일이 아니니 책임을 온전히 지지 않아도 되니까.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삶은 이토록 달콤하다.
그래서 조직에는 끝없는 '컨펌의 굴레'가 있다. 광고 시안을 하나 올린다. 과장, 부장, 상무, 부사장이 좋다고 해도 (디자인팀을 포함해서) 사장의 맘에 들지 않으면 다시 내려온다. 기껏 올린 결과물이 미끄럼틀을 타고 주르르 미끄러진다. 사장의 안목, 혹은 심기가 조직의 방향성을 좌지우지한다.
그래서 중요한 건 특별함이나 새로움이 아니다. 설령 위에서 각종 추상적인 단어를 써가며 새로운 시안을 요구해도 마찬가지다. 그럼 뭐가 중요할까? 바로 '보여짐'이다. 위에서 볼 때 특별해 '보이고' 새로워 '보이는' 결과물. 흔히 말하는 보여주기 식 문화는 이렇게 탄생한다. 특별히 아랫사람이 비굴해서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가장 효율적이어서다.
업무에는 항상 데드라인과 컨펌이라는 두 관문이 존재한다. 수많은 일을 떠안은 K-직장인 입장에서 이를 수호하는 건 금과옥조와 같다. 대부분의 의사결정은 탑-다운(Top-Down) 방식으로 이루어지니 위에서 문을 걸어 잠그면 방법이 없다. 별것도 아닌 걸로 꼬투리를 잡지만 그걸 따질 여유도, 시간도 남아있지 않다. 일을 어떻게든 제시간에 해내는 게 지상과제가 되어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제일 합리적인 방법은 그저 네네 하고 모든 걸 수용하는 것이다. 폰트 크기나 표 테두리 두께를 붙들고 씨름한다. 간신히 하나 끝. 그렇게 계속 반복이다. '이럴 거면 자기가 다 하지'라는 생각이 떠오르겠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조직의 생리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장 업무는 마쳤지만 영혼에는 깊은 상흔이 남는다. 주체성이 사라지고 노예근성이 자리한다.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이런 상황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담담하게 서술한다. 독일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아돌프 아이히만. 그는 패전 후 체포되어 예루살렘의 법정에 선다. 유대인이자 저자인 한나 아렌트는 법정에서 그를 관찰한 끝에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발견한다. 아이히만은 피에 굶주린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아니다. 그저 충실하게 명령을 수행한 공무원이다. 자신은 죄가 없다며, 그저 지시를 따른 것뿐이라며 반문한다.
그는 무슨 죄를 지은 걸까? 한나 아렌트가 생각한 죄목은 다음과 같았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은 죄. 자신의 행동에 따라오는 결과를 생각했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고통받을 수많은 유대인을 생각했어야 했다. 그는 그러지 않았고 결국 사형을 언도받았다.
예루살렘의 재판관은 지금의 나를 보고 어떤 판결을 내릴까? 그 법정에서 어떻게 나 자신을 변호할 수 있을까? 당당하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적어도 이 회사에 몸을 담그고 있는 이상은 말이다. 이제는 정말 '내' 일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