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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Jan 31. 2022

본가로 다시 돌아왔다

독립을 기다리며

지난 10년간 자취를 했다. 중간에 휴학을 위해 1년 정도 본가에서 지낸 세월을 빼면 그렇다. 그동안 대학도 다니고, 군대도 다녀오고, 교환학생도 하고, 직장생활도 했다. 그러다 최근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서 다시 본가로 돌아왔다. 다행히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 근처로 이사를 오게 되어 시기가 잘 맞물렸다.


사실은 조금 어색하다. 가족이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집에 붙어있다니. 시간이 날 때마다 잠깐씩 보던 가족이었는데 이제는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밥을 먹는다. 본가 생활의 장점이야 말할 것도 없다. 지긋지긋한 월세나 관리비도 안 들어가고 생활비도 대폭 아낄 수 있다. 자취를 할 때는 뭐만 하면 다 내가 스스로 구입해야 했던 물건이 알아서 냉장고와 서랍을 채워가니 돈을 쓸 일이 없다. 독립에는 돈이 든다. 아주 많이.


다만 그 모든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사람들이 독립을 하는 건 자취생활이 주는 자유와 달콤함 때문이리라. 본가 생활을 한지 한 달이 넘어가는 지금, 더욱더 그때가 그리워진다. 막상 자취생활이라고 해봐야 조그마한 원룸에 어떻게든 몸을 구겨 넣고 살아남기 바빴다. 아플 때 죽을 끓여줄 사람도, 불을 끄고 나왔는지 체크해줄 사람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본가는 훨씬 넓고 따뜻하다.


우리 가족은 거의 전국에 흩어져 살았다. 아버지가 해외 주재원으로 계셨을 때에는 아예 글로벌하게 찢어진 가족이기도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오다 합치려니 잡음이 많다. 서로가 지켜오던 생활습관이 부딪힌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여는 문제부터, 방은 어디를 써야 하는지, 청소는 어떻게 할지 등 맞춰가야 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직은 본가 짐이 다 올라오지 않아 컴퓨터가 거실에 있는데 (이 글도 거실에서 쓰고 있다) 중학교 이후로 내 등 뒤에서 누군가 내 화면을 들여다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자취방에서는 음악도 크게 틀어놓고 영화를 보든 글을 쓰든 게임을 하든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지금은 뭔가 모를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짐이 정리되고 독립적인 내 공간이 생기면 나아질 문제겠지.


식습관도 규칙적으로 변해간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식단을 챙겨 먹는다. 사실 좋은 일이다. 다만 모두의 취향이 온전히 반영될 수는 없다. 고기를 먹고 싶어도 냉장고를 가득 채운 마른반찬을 처리해야 하는 날도 있고, 끼니를 거르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외식을 거의 하지 않는 집안 분위기 탓에 주변에 있는 식당에서 뭘 파는지도 잘 모른다. 안 그래도 외식을 안 하는데 코시국이다 보니 더더욱 집안에서 삼시 세끼를 다 해결한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아마 지금이 가족과 함께 살 마지막 순간이 아닌가 하고. 어떤 형태로든 독립을 해서 다시 집 밖을 나설 것이고, 그때가 되면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 지금 순간에도 마냥 불평할 건 아니다. 내가 불편한 만큼 가족들 역시 불편할 테고, 어쨌든 이 집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서로가 잘 양보하고 배려하며 살아갈 수밖에.


자유는 비싸다. 실제로 그렇다. 월세든 전세든 자가든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자유롭게 꾸린다는 건 그만큼 엄청난 일이다. 경제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그래도 아직은 의지할 부모님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생각해야겠다. (반)백수를 이렇게 받아줄 수 있는 분이 부모님 말고 또 있겠는가. 집에 친구를 초대할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난 아직 철이 덜 든 거겠지?






2020년 기준 1인 가구의 비중은 전체 가구의 31.7%를 차지했다고 한다. 단일 가구로는 가장 높은 비율이다. 사별 등의 이유로 노인 1인 가구가 많은 외국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20대의 1인 가구 비중이 가장 높다고 한다. 학교든 직장이든 본가에서 떨어져 나와 사는 2030 청년, 이게 1인 가구의 흔한 모습이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다 보니 생활을 도와주는 각종 서비스가 보편화된다. 소프트웨어적으로는 각종 생활 애플리케이션이, 하드웨어적으로는 1인용 제품이나 무인 가게가 골목을 빼곡히 채워간다. 무인 과일가게를 가면 1인 가구에 맞춘 소포장 제품이 가득하다. 이제 모든 걸 혼자 해야 하는 시대다.


혼자 살기 좋은 사회는 그 반대급부의 욕구도 동반한다. 바로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욕구다. 유튜브나 아프리카TV, 트위치 등 인터넷 방송 플랫폼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다른 건 다 아웃 소싱해도 외로움만은 결국 사람으로 풀어야 한다. 아무리 내향적인 사람이라도 관계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 이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생물학적 본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하다못해 배구공에 얼굴을 그리더니 '윌슨'을 찾는 게 인간이다.


그런데 이런 욕구와는 달리 막상 사회적인 관계를 원만하게 맺기는 어렵다. 친구나 가족끼리 만나도 스마트폰부터 열어보는 게 요즘 분위기다. 비단 '젊은' 세대만의 풍경은 아니다. 이제 어르신들도 친구와 만나 '스타벅스'에 앉아 '카톡'을 체크한다. 혼자인 삶에 익숙해져 있지만 여전히 어딘가에 속하고 싶은 욕구. 그 타협점을 찾은 모습이다.


어쩌면 관계라고 부르는 걸 다시 정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꼭 면대면으로 누군가를 만나야만 관계를 정의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전자 매체를 통해 글자의 형태로만 만나도 관계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차피 관계란 매개체를 통한 둘 이상의 상호작용이다. 말도, 표정도 어쩌면 그저 매개체다. 그런데 왜 눈앞에 친구를 두고 자기 스마트폰부터 들여다보는 장면에는 여전히 거부감이 들까? 사실 나도 이런 행동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의식적으로 억누를 뿐이지. 그래도 대화를 할 때는 핸드폰을 최대한 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 행동에 거부감이 드는 건 비단 바뀐 세태 때문만은 아니리라. 인간은 아직 카톡만으로 온전히 외로움을 해결할 수 있게끔 진화하지 않았다. 생물학적인 업데이트를 진화라고 부른다면, 이 업데이트는 굉장히 느리게 진행된다. 기술의 발전과는 사뭇 다르다.


물론 그렇다고 매번 피부를 맞대고 직접 대면을 할 수는 없다. 코로나 사태는 이런 시도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어떻게 보면 긍정적으로 바뀐 측면도 있다. 송길영 부사장은 이런 현상을 '선택적 대면'이라고 부른다. 펜데믹 사태를 핑계 삼아 보고 싶은 사람만 본다는 거다. 그래서 보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최소한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되면 안 된다.


그럼 보고 싶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근본적으로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배려란 아주 에너지가 많이 드는 행동이다. 아직도 마스크를 내리고 당당하게 길거리에서 길빵을 하며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세 가지 차원에서 배려심이 없는 사람이다. 하나, 담배연기가 달갑지 않은 이들에 대한 배려가 없다. 둘, 펜데믹 사태 이후 바이러스 감염에 경각심을 가진 이들에 대한 배려가 없다. 셋, 함께 걷고 있는 일행의 안위 혹은 이미지에 대한 배려가 없다. 길빵 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 나도 그런 사람 취급을 받는다.


담배 피우는 거 가지고 왜 이리 호들갑이냐고 생각할 수는 있다. 혼자 살아가는 사회, 개개인의 삶을 존중하고 지켜주는 게 중요해진 사회에서 이런 생각은 꽤 위험할 수 있다. 코시국에 길빵을 하는 사람이 다른 삶의 영역에서는 반듯하게 살아갈까? 최소한 다른 사람이 만나고 싶은 사람처럼 살아갈까? 물론 자신과 비슷한 이들과는 어울릴 수 있겠지만 사회적으로는 은근히 고립되어간다. 안 그래도 외로움이 만연해있는데 본인의 삶을 그렇게 조금씩 갉아먹는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어느 순간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는다.


물론 '고작' 담배 하나로 사회적 고립을 말하기에는 너무 과장한 감이 없잖아 있다. 결국 배려심이 중요하다. 모두가 외롭게, 또 혼자 분투하는 사회에서 배려심은 베푸는 게 아니라 당연히 가져야 할 기본 소양이 된다. 식당에서 갑질 한 번만 해도 일약 소셜 미디어 스타가 되는 게 요즘 세상이다. 기존에는 공인에게만 요구되던 사회적 책임감이 미디어를 통한 자기 검열을 필두로 개개인에게도 부여된다. 이제 함부로 해도 괜찮은 사람은 없다.


본가에서 살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여전히 배려심이 필요하고 이해심이 필요하다는 걸. 내 삶의 방식을 온전히 고수하려면 굉장한 에너지와 비용이 든다는 걸.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힘들긴 하지만 말투라도 부드럽게 하고 쏘아붙이는 말버릇도 고쳐보려고 한다. 사실 부모님을 태우고 운전만 안 하면 된다. 가족끼리는 운전 같이 하는 게 아니다 정말.


언젠가 다시 찾아올 독립의 그날까지 잘 웅크리고 살아보려고 한다. 우선은 얼른 내 방이 생겼으면 한다.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도 아닌데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전 회사 동기가 영끌을 해서 자기 집을 산 게 조금은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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