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글을 쓴다
침대에 누워 있다 문득, 찾아오는 감정. 할 일이 있고, 괴로운 건 아닌데 몸을 일으키질 못하겠다. 힘든 건가? 피곤한 건가? 그렇지도 않다. 천장을 보기 위해 드러누울 의욕조차 없어 엎드려서 그저 생각만 한다. 아, 나 공허하구나.
지난 약 30년 간 날 끌어온 건 공허감이었다. 영혼 한 구석이 푹 하고 파인듯한 그 실체 없는 감정이라니. 우울감이나 게으름과는 다르다. 다른 감정은 백번 양보해 의식적인 노력으로 어찌어찌 개선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공허감만은 그럴 수가 없다. 아무리 재밌는 영화를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해도 그 순간뿐이다.
삶이 공허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 모든 노력은 그 자체로 허무하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 거지? 혹자는 죽음에 대한 자각이 그 원인이라고 말한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언젠간 모두가 죽기 마련인데 그럼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이렇게 되뇔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한 정답은 아니다. 삶에 때때로 찾아오는 공허감은 인생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오기 때문이다. 삶은 대체로 재미없고, 대체로 공허하고, 대체로 의미 없구나.
이런 감정이 항상 내 곁에 있는 건 아니다. 즐거울 때는 즐겁고, 슬플 때는 슬프고, 충만할 때는 충만하다. 다만 온갖 잡음과 커튼이 걷어질 때 드러나는 속살일 따름이다. 자각하기 싫지만 언젠가는 마주해야 한다. 들여다보기도 무서울 만큼 시꺼멓지만 그래도 대면해야 하는, 그 마음.
어제 살바도르 달리 전시회를 다녀왔다.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붙잡고 싶었던 건 달리 특유의 창의성이면서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었다. 예술가의 입장에서 느끼는 살아있음이란 무엇일까? 왜 사람은 카뮈가 말했듯 '자살하지 않고' 살아야 할까? 크고 작은 캔버스 위, 그가 나에게 말을 건다. 거기에 한참 동안 매료되었다. 살아있는 존재와 죽은 존재가 내뿜는 이미지가 뒤엉켜 내면을 유영한다. 내가 보는 건 종이 위에 칠해진 물감이 아니다. 물감에 반사된 공허한 마음이다.
그런데 묘하게 편하다. 나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지독한 공허감을 느꼈던 누군가를, 그렇게 마주하게 되니. 이는 크게 두 가지 함의를 갖는다. 하나, 누군가의 공허를 들여다보는 일은 충만함을 준다. 둘, 나의 공허를 풀어내는 일 역시 충만함을 준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있는 힘껏 살아냈던 달리라는 사람은 그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비록 달리와 같은 천재성은 없을지라도 나만의 방식으로 공허감을 조심스레 내놓으려 한다. 책 <마이너 필링스>에서 저자는 말한다. 고통을 명명해야 신체에서 분리해 다룰 수 있게 된다고. 자아와 관련해서 공허감만큼 중요한 주제는 없다. 이만한 고통도 없다. 이를 정확하게, 그리고 적절히 정의하려는 노력만이 삶을 보다 더 의미 있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비가 내린다. 빗방울이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난다. 불빛은 따뜻하고 조용한 음악이 방 안에 퍼진다. 그리고 지금, 여기, 내가 있다. 공허감에서 조금은 벗어난 채로, 앞으로 찾아올 이 필연적인 감정을 지켜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