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얼마 전 모임에서 처음 보는 사람끼리 MBTI 얘기가 나왔다. 이제는 이름과 나이 다음으로 MBTI 유형을 묻는 게 국룰인듯 싶다. 순순히 말해주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맞춰보라는 사람도 있다. 사실 어느 정도 의도된 행동이다. 다른 사람이 나의 MBTI 유형을 추리하는 과정에서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순순히 유형을 대답해주면 얻을 수 없는 인사이트다.
MBTI 유형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나'를 중심으로 정해진다. 타인의 시선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그래서 '내가 보는 나'와 '남이 보는 나'가 괴리를 일으키면 주로 이런 말이 나온다. "A 유형이라고요? 난 B 유형인 줄 알았는데...." 그러면 이렇게 결론이 난다. 난 B 같은 A라고. 이는 이 검사 방법의 한계점을 드러낸다. 외향적(E)으로 보이는 내향형(I)과 내향적(I)으로 보이는 외향형(E)이 있다고 치자. 그럼 이 사람은 내향적인가, 아니면 외향적인가? 이 사람의 성격 유형은 어떤 식으로 정의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MBTI 성격유형 검사의 경우 회색지대를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51%의 외향성과 49%의 내향성을 가지고 있으면 이 사람은 외향적이라고 결론이 난다. 수치적으로 어느 성향이 강한지는 결과에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구태여 그걸 언급하지 않으면 그냥 '그런 사람'으로 정형화된다. 미리 깔끔하게 정해진 16가지의 성격 유형으로.
MBTI 담론이 계속 재생산되며 느껴지는 피로감과 더불어 날 괴롭히는 건 바로 이 정형화다. 내 머리 위로 잘 짜인 틀이 하나씩 써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거기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자기 검열이 된다. 난 인식형(P)인데 이렇게 꼼꼼하게 계획을 세워도 되나? 이런 식으로. 외향적이면 왠지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할 것 같고, 내향적이면 왠지 집에만 틀어박혀야 있어야 할 것 같다. 가장 돈을 못 버는 성격유형이라고 하면 경제적 자유의 꿈은 영영 포기해야 하나?
물론 이 성격 유형검사에도 분명히 장점이 있다. 얼핏 이해받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해당 유형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장점. 이건 생각 이상으로 유용하다. 왜 이렇게 약속에 잘 안 나오냐고 하면 '난 내향적(I)이라서 수시로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면서 충전을 해줘야 하거든'이라고 답하면 된다. 계획을 안 세우는 건 인식형(P)이라서, 냉정하게 말하는 건 사고형(T)이라서, 별거 아닌 거에 화를 내는 건 또 어떤 유형이라서 등등.
다만 이 역시도 일종의 자기변명으로 비칠 위험이 있다. 또 내가 어떤 유형이라고 해서 모든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내 모든 행위가 정형화될 이유도 없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고유한 성격 유형을 가지고 있다. 큰 범주로 묶을 수는 있겠지만 너는 어떤 유형이구나 하고 간편하게 정해버리는 태도는 어떻게 보면 참 무례하고 게으르다. 물론 참고는 할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은 관계가 깊어지는 과정에서 차차 드러나기 마련이다.
한편으로는 얕고 가볍게 맺는 관계 사이에서는 이만한 대화 소재가 없다. 만약 70~80% 정도만 맞다는 판단이 들면 어떤 사람을 이해하는 데는 꽤나 도움이 된다. 실제로 내가 내 성격 유형을 봐도 대략 그 정도는 맞다. 그런데 다른 유형을 봐도 또 그 정도가 맞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보면 MBTI 검사는 '내가 누구인가'와 더불어 '나는 누가 되고 싶은가'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실제로 내가 어떠한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나의 모습이라는 게 존재할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가진 '편견'에 의해서 수정되는 걸까? 그 편견에 저항하는 건 힘든 일이다. 그래서 오늘도 열심히 내가 어떤 유형인지를 찾고 그에 맞게끔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역시 난 A 유형이었어' 이렇게 되뇌면서.
참 아이러니하다. 나를 알아가려고 만든 검사방법이 나를 얽매다니. 나답게 살아가려고 퇴사까지 했는데 예상치 못한 방해물을 만났다. 이제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MBTI 검사는 일종의 놀이라고. 일종의 RPG(Role Playing) 게임이랄까? 그 안에서는 유형별 궁합을 보든, 감각형(S)과 직관형(N)이 어떻게 다른지 토론하든 마음껏 즐기면 된다. 하지만 나 자신을 알고 싶다는 조금은 진지한 결심을 했다면 상상의 나라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덧붙이는 말 - 여기까지 읽었다면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근데 이 작가의 MBTI 유형은 뭘까? 일단... 사고형(T)인 것 같고, 그다음은 판단형(J)? 인식형(P)인가? 둘 차이가 뭐더라? 나무위키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