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바로 나야 나
유명 잡지 <엘르>의 편집장으로 일하던 장 도미니크는 어느 날 뇌졸중으로 온몸이 마비된다. 그가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건 왼쪽 눈꺼풀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절망감에 삶 자체가 완전히 망가져버릴 수 있을 정도의 사건이다. 물론 그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남은 왼쪽 눈꺼풀을 이용해 한 글자, 한 글자 글을 써 내려간다. 그렇게 나온 책이 바로 <잠수종과 나비>다.
도미니크의 정신은 명료했으나 그걸 외부로 표현할 신체적 조건이 되질 않았다. 마치 잠수종에 갇힌 나비처럼 내면이 날아오를 활주로가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진 유일한 수단, 즉 글을 활용했다. 그의 이야기는 인간승리의 표본이면서 동시에 얼마나 뭔가를 표현하는 게 중요한지를 일깨운다. 인생이란 자기표현의 장이다. 안에 있는 걸 밖으로 꺼내놓지 못하면 사람은 쉽게 피폐해진다. 그래서 누군가는 글을 통해, 누군가는 말을 통해, 누군가는 각종 예술적 표현 체계를 통해 내면세계를 다른 이에게 전한다. 하다못해 일기장에라도 안에 있는 무언가를 쏟아놓는다.
사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도미니크와 같이 어딘가에 갇혀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머릿속은 바삐 돌아가는데 이걸 말로 풀어내는 순간 어그러지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정제되게 말할 수 있는 건 평소에 정리하여 체화한 생각뿐이다. 말을 하면서도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고 계속 깊어져 간다. 어디선가는 끊고 말을 시작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하다가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그나마 친한 지인과는 말을 곧잘 하는 편이지만 그마저도 항상 장벽에 가로막힌다. 특히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한없이 서툴다. 애초에 그렇게 쉽게 감정적 발화가 이루어지지도 않거니와, 이게 말이라는 수단을 거치며 한번 더 방지턱을 만난다. 그렇게 덜컹덜컹 뭔가가 나오기는 하는데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니 말을 아낀다. 마음 안에서는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내면의 나비를 하늘 위로 훌쩍 떠나보낼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 그친다면 그저 허공으로 사라져 버릴 이 녀석들을 어찌하면 누군가의 마음에 안착시킬 수 있을까? 내겐 글이다. 글이라면 이 한없이 피어나는 사색의 결과물도 하나둘씩 어딘가에 얹어놓을 수 있다. 글이라면 타이밍을 재지 않고 편안하게 내 속도대로 뭔가를 표현할 수 있다. 글을 써야겠다는 다짐을 한 뒤로 내 인생은 정말 많이 변했다.
퇴사를 한 후 독립의 열쇠를 찾은 것도 바로 글에서였다. 책도, 브런치도, 유튜브도 결국은 글이 기반이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글이 없었다면 내 생각이 이렇게 많은 이에게 닿을 수 있었을까? 새삼 두 손 멀쩡하게 자판을 두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다. 왼쪽 눈꺼풀 하나만 가지고 있던 도미니크에 비하면 난 훨씬 더 나은 상황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구태의연한 질문에 '난 글 쓰는 사람이다'라고 답할 수 있게 되었다. 난 브런치, 책, 유튜브, 인스타그램, 블로그를 통해 글을 쓰는 사람이다. 글을 통해 인사이트와 삶의 통찰을 나누고 누군가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이다. 적어도 그렇게 살아가려고 한다. 자기표현의 욕구가 글을 만나 타인의 일상에 보탬이 된다면 이거야 말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